김대중정부가 막 출범한 98년 4월15일 천용택 당시 국방부장관은 ‘작지만 강한 군대’를 만들겠다며 국방개혁위원회(국개위)를 출범시켰다. 국개위는 국방 각 분야를 진단해서 불필요한 군살을 과감히 잘라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여력은, 북한의 도발 억제에 꼭 필요한 전력을 증강하는데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개위는 58개 과제를 선정했는데, 이중 대표안은 육군의 1군과 3군을 합쳐 지상작전사령부(지작사)를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일사천리로 북진할 때의 일이다. 맥아더 원수는 경쟁을 시켜 진격속도를 높인다는 생각으로, 작전권을 평안도를 무대로 한 서부전선은 미 8군에, 함경남도를 전장으로 한 동부전선은 미 10군단에 나눠줘 청천강선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주요 한국군 부대들은 미 8군과 10군단에 배속돼 있었다).
이준 개혁위원장 정치권으로 옮겨가
그런데 중공군이 미 8군과 10군단 사이로 파고들어 후방을 차단하고 포위한 뒤 인해전술을 펼치자 일패도지(一敗塗地)해 서울을 포기하고 장호원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러한 1·4후퇴의 패배 원인을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비판이 “왜 맥아더 원수는 하나의 전선에 두 개 사령부를 두었는가”는 것이다.
정전후 한국 육군은 전방은 1군이, 후방은 2군이 전담케 했다. 그러다 월남전이 끝나 주월사령부가 돌아오자 3군을 창설해 서부전선은 3군이, 동부전선은 1군이 맡도록 했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이같은 1·3군 체제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한국전 사례’를 지목하며 문제 제기를 하는 전략가가 많았다. 지작사 창설은 이러한 토론에 종지부를 찍는 일대 사건이었다.
지작사 창설은 대장이 지휘하는 군사령부 하나를 없애는 것이므로 군 관계자들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국개위는 후방을 담당하는 2군 예하 2개 군단도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사실 불필요하다) 해체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맞춰 육군도 후방에 있는 ×개 사단을 해체하고, 특전사도 임무를 조정해 병력수는 유지한 채 ×개 여단으로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개위는 이렇게 해서 마련한 여력을 지작사 예하 군단을 강화하는데 투입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기갑여단-특공연대-자주포대대 등 군단장 지휘하에 직접 전투를 벌이는 부대를 증설하고, 신형 장비를 도입한다는 것. 이와 별도로 육군은 항공 강습 작전을 감행하는 항공작전사령부(항작사)를 창설하고, 북한의 화학전 공격에 대비해 화생방방호사령부(화방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개혁은 ‘펜대’ 나 굴리는 행정 부대는 줄이고, 직접 싸우는 부대는 늘리겠다는 것이어서 ‘괜찮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득을 보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만, ‘칼 맞는’ 자리의 사람들은 갖가지 논리로 개혁의 부당성을 홍보하기 때문이다. 국개위 개혁안에 대해서도 적잖은 저항세력이 있었다. 이러한 세력에 큰 힘이 되어준 것이 미군이 주도권을 쥔 한미연합사였다. 한미연합사는 유사시 한국군과 미군을 통합 지휘하는 최고 사령부인데, 연합사는 “작전계획(작계) 개정없이 지작사를 창설하는 것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미군은 숱한 전쟁을 치러왔기 때문에 전쟁 대비 태세가 아주 철저하다. 유사시 어떻게 전투를 치르고, 전투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품은 어떻게 보급할 것인지에 대해 미리 계획을 만들어 둔다. 이러한 계획을 가리켜 ‘작전계획’(작계)이라고 하는데, 한미연합사는 한반도용으로 ‘작계 5027’을 마련해놓고 있다. 그런데 작계 5027은 현재의 1·3군 체제를 근간으로 짜여 있다. 때문에 한미연합사는 “작계를 개정 하지 않고 1·3군을 통합하면 혼란이 온다”며 매월 두 차례씩 지작사 창설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이 논의 과정에서 국개위의 지작사 창설안은 작계 부분을 간과한 채 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성태국방장관은 야인 시절 성급한 지작사 창설에 반대했었다. 그러다 국방장관에 취임하자, 자기 의견을 일단 접어두고 지작사 창설문제를 토론에 붙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99년말로 예정한 지작사 창설이 지지부진해지자, 구랍 12월24일 지작사 창설을 연기한다고 최종 결정했다. 결국 조장관은 ‘전임 천용택장관이 작계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털컥 지작사 창설안을 발표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로서는 이런 의견을 솔직히 밝힐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내놓은 이유가 △지난해 연평해전에서 깨진 북한군이 “1년후에 두고 보자”고 했다는 첩보가 있어, 급격한 군개혁은 피해야 한다(한미연합군은 연평해전 직후 북한군이 1년후 보복을 다짐한 것을 통신 감청해낸 바 있다) △군단을 강화하려면 군단사령부를 중심으로 지휘통제 체제인 C₄I를 구축해야 하는데, IMF 사태로 국방예산이 줄어 미처 이 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 등이다.
올 봄으로 예상되는 북한의 보복이 과연 우리 군의 개혁을 중단시킬 정도로 과격할 것인가. 그리고 국개위가 개혁안을 내놓을 때 이미 IMF 상황이었는데, 이제 와서 IMF 운운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지작사 창설은 한미연합사도 원칙적으로 찬성할 만큼 방향만은 분명 옳은 것이다. 그래서 국방부는 현 정부 임기말에 지작사를 창설하겠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때쯤이면 대선 열풍이 몰아치고 레임덕현상이 극심할 때인데, 과연 지작사를 창설할 수 있겠느냐는 것. 또 이들은 “앞장서서 국방개혁을 추진해야 할 이준 국개위원장이 위원장 자리를 버리고 민주당 발기인으로 옮겨가 버렸다”며 답답해한다.
답답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육군은 해체키로 한 1개 야전군과 2개 군단, ×개 후방 사단, ×개 특전여단을 하나도 해체하지 않았으면서도, 군단급 부대인 항작사를 창설하고, 여단급 부대인 화방사를 신설했다. 뿐만이 아니다. 육군은 지작사를 만든다며 중장이 위원장인 ‘지작사창설위원회’를 탄생시켰는데 이 조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위원장이 바뀐 국개위 역시 개혁업무를 관장한다는 이유로 현 정부가 끝날 때까지 그냥 두기로 했다. 결국 요란했던 국방개혁은 줄인 것은 하나도 없이 조직만 늘린 ‘개악’이 돼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정부 출범후 소장이 맡는 국장 4석과 대령이 맡는 과장 14석을 줄였으니, 전체적으로는 조직이 줄어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국 국방개혁이 군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밥그릇’ 다툼으로 변질돼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용택 전임 국방장관의 성급했던 개혁을 비판하는 국방 전문가들은 “조직과 거시기는 건들수록 커진다”며 자조하고 있다.
한국전쟁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일사천리로 북진할 때의 일이다. 맥아더 원수는 경쟁을 시켜 진격속도를 높인다는 생각으로, 작전권을 평안도를 무대로 한 서부전선은 미 8군에, 함경남도를 전장으로 한 동부전선은 미 10군단에 나눠줘 청천강선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주요 한국군 부대들은 미 8군과 10군단에 배속돼 있었다).
이준 개혁위원장 정치권으로 옮겨가
그런데 중공군이 미 8군과 10군단 사이로 파고들어 후방을 차단하고 포위한 뒤 인해전술을 펼치자 일패도지(一敗塗地)해 서울을 포기하고 장호원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러한 1·4후퇴의 패배 원인을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비판이 “왜 맥아더 원수는 하나의 전선에 두 개 사령부를 두었는가”는 것이다.
정전후 한국 육군은 전방은 1군이, 후방은 2군이 전담케 했다. 그러다 월남전이 끝나 주월사령부가 돌아오자 3군을 창설해 서부전선은 3군이, 동부전선은 1군이 맡도록 했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이같은 1·3군 체제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한국전 사례’를 지목하며 문제 제기를 하는 전략가가 많았다. 지작사 창설은 이러한 토론에 종지부를 찍는 일대 사건이었다.
지작사 창설은 대장이 지휘하는 군사령부 하나를 없애는 것이므로 군 관계자들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국개위는 후방을 담당하는 2군 예하 2개 군단도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사실 불필요하다) 해체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맞춰 육군도 후방에 있는 ×개 사단을 해체하고, 특전사도 임무를 조정해 병력수는 유지한 채 ×개 여단으로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개위는 이렇게 해서 마련한 여력을 지작사 예하 군단을 강화하는데 투입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기갑여단-특공연대-자주포대대 등 군단장 지휘하에 직접 전투를 벌이는 부대를 증설하고, 신형 장비를 도입한다는 것. 이와 별도로 육군은 항공 강습 작전을 감행하는 항공작전사령부(항작사)를 창설하고, 북한의 화학전 공격에 대비해 화생방방호사령부(화방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개혁은 ‘펜대’ 나 굴리는 행정 부대는 줄이고, 직접 싸우는 부대는 늘리겠다는 것이어서 ‘괜찮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득을 보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만, ‘칼 맞는’ 자리의 사람들은 갖가지 논리로 개혁의 부당성을 홍보하기 때문이다. 국개위 개혁안에 대해서도 적잖은 저항세력이 있었다. 이러한 세력에 큰 힘이 되어준 것이 미군이 주도권을 쥔 한미연합사였다. 한미연합사는 유사시 한국군과 미군을 통합 지휘하는 최고 사령부인데, 연합사는 “작전계획(작계) 개정없이 지작사를 창설하는 것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미군은 숱한 전쟁을 치러왔기 때문에 전쟁 대비 태세가 아주 철저하다. 유사시 어떻게 전투를 치르고, 전투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품은 어떻게 보급할 것인지에 대해 미리 계획을 만들어 둔다. 이러한 계획을 가리켜 ‘작전계획’(작계)이라고 하는데, 한미연합사는 한반도용으로 ‘작계 5027’을 마련해놓고 있다. 그런데 작계 5027은 현재의 1·3군 체제를 근간으로 짜여 있다. 때문에 한미연합사는 “작계를 개정 하지 않고 1·3군을 통합하면 혼란이 온다”며 매월 두 차례씩 지작사 창설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이 논의 과정에서 국개위의 지작사 창설안은 작계 부분을 간과한 채 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성태국방장관은 야인 시절 성급한 지작사 창설에 반대했었다. 그러다 국방장관에 취임하자, 자기 의견을 일단 접어두고 지작사 창설문제를 토론에 붙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99년말로 예정한 지작사 창설이 지지부진해지자, 구랍 12월24일 지작사 창설을 연기한다고 최종 결정했다. 결국 조장관은 ‘전임 천용택장관이 작계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털컥 지작사 창설안을 발표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로서는 이런 의견을 솔직히 밝힐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내놓은 이유가 △지난해 연평해전에서 깨진 북한군이 “1년후에 두고 보자”고 했다는 첩보가 있어, 급격한 군개혁은 피해야 한다(한미연합군은 연평해전 직후 북한군이 1년후 보복을 다짐한 것을 통신 감청해낸 바 있다) △군단을 강화하려면 군단사령부를 중심으로 지휘통제 체제인 C₄I를 구축해야 하는데, IMF 사태로 국방예산이 줄어 미처 이 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 등이다.
올 봄으로 예상되는 북한의 보복이 과연 우리 군의 개혁을 중단시킬 정도로 과격할 것인가. 그리고 국개위가 개혁안을 내놓을 때 이미 IMF 상황이었는데, 이제 와서 IMF 운운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지작사 창설은 한미연합사도 원칙적으로 찬성할 만큼 방향만은 분명 옳은 것이다. 그래서 국방부는 현 정부 임기말에 지작사를 창설하겠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때쯤이면 대선 열풍이 몰아치고 레임덕현상이 극심할 때인데, 과연 지작사를 창설할 수 있겠느냐는 것. 또 이들은 “앞장서서 국방개혁을 추진해야 할 이준 국개위원장이 위원장 자리를 버리고 민주당 발기인으로 옮겨가 버렸다”며 답답해한다.
답답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육군은 해체키로 한 1개 야전군과 2개 군단, ×개 후방 사단, ×개 특전여단을 하나도 해체하지 않았으면서도, 군단급 부대인 항작사를 창설하고, 여단급 부대인 화방사를 신설했다. 뿐만이 아니다. 육군은 지작사를 만든다며 중장이 위원장인 ‘지작사창설위원회’를 탄생시켰는데 이 조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위원장이 바뀐 국개위 역시 개혁업무를 관장한다는 이유로 현 정부가 끝날 때까지 그냥 두기로 했다. 결국 요란했던 국방개혁은 줄인 것은 하나도 없이 조직만 늘린 ‘개악’이 돼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정부 출범후 소장이 맡는 국장 4석과 대령이 맡는 과장 14석을 줄였으니, 전체적으로는 조직이 줄어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국 국방개혁이 군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밥그릇’ 다툼으로 변질돼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용택 전임 국방장관의 성급했던 개혁을 비판하는 국방 전문가들은 “조직과 거시기는 건들수록 커진다”며 자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