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보르도(Bordeaux) 와인을 고르다 보면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레이블에 포도 품종을 적지 않고 생산지와 와이너리 이름만 표기한 경우가 많아 무슨 맛인지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와인 맛을 품종보다 지역별로 구분하는 데서 유래한 관행이다. 우리가 쌀을 경기미, 전남쌀처럼 지역명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보르도 지역이 단일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지 않는 풍습을 가진 것도 레이블에 품종을 쓰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보르도 레드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등을 섞어 만든다. 보르도는 대서양에 가까워 습하고 서늘하며 기후 변화가 심하다. 한 가지 품종만 심으면 자칫 한 해 수확을 완전히 망칠 수 있어, 마치 보험을 들듯 싹이 트고 익는 시기가 각기 다른 여러 품종을 재배하고 이것들을 섞어 와인을 만든다.
복잡해 보이는 보르도 와인도 요령만 알면 고르기 어렵지 않다. 레이블에 보르도가 적혀 있으면 보르도에서 생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뜻이다. 어느 포도밭인지, 얼마나 우수한 포도인지 따지지 않고 만든 와인인데 보르도 와인 중에서도 입문 등급인 경우가 많다. 레이블에 보르도 슈페리외르(Supe′rieur)라고 쓰인 와인은 보르도라고만 적힌 와인보다 우수한 포도로 만든 것이다. 대개 늙은 포도나무에서 수확해 맛과 향이 더 좋은 포도로 만들고 12개월 이상 숙성을 거친 뒤 출시한다. 레이블에 보르도 대신 메독(Me′doc), 오메독(Haut-Me′doc), 생테밀리옹(St. E′milion) 등 보르도에 있는 특정 지명이 적혀 있으면 그 지역에서 생산한 포도로만 만든 와인이다. 이런 와인은 해당 지역 특유의 와인 맛을 잘 살렸기 때문에 보르도나 보르도 슈페리외르 와인보다 가격이 비싼 편이다. 경기미보다 이천쌀이 품질이 좋고 값도 더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양한 품종을 생산해 마치 교과서처럼 표준이 되는 맛을 내는 와인도 있다. 이런 와이너리를 알아두면 전체 보르도 와인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두르트(Dourthe)가 그런 곳이다. 두르트는 보르도 전역에 300ha(300만m2)가 넘는 포도밭을 보유하면서 여러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출시하고 있다. 두르트의 뉘메로 엥(N°1)은 레이블에 ‘보르도’라고만 적혀 있는 입문용 레드 와인이다. 가격은 3만 원대로 메를로 함량이 많아 과일향이 풍부하고 타닌이 부드러워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다.
샤토 페이 라 투르(Cha^teau Pey La Tour)는 보르도 슈페리외르 와인으로 6만 원대다. 뉘메로 엥보다 농축된 과일 맛, 정교한 타닌, 긴 여운이 특징이다. 두르트가 생산하는 보르도 내 지역별 와인 중에는 오메독 와인 샤토 벨그라브(Cha^teau Belgrave)가 주목할 만하다. 이 와인은 1855년에 정한 보르도 등급표상 그랑 크뤼(Grand Cru) 5등급 와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많이 섞는 오메독 전통을 잘 살린 와인으로, 맛과 향이 복합적이며 구조감이 탄탄하다. 가격은 13만 원 정도다.
몇몇 유명 브랜드가 이끄는 맥주나 위스키와 달리 소규모 생산자가 많은 점도 와인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레이블 읽는 법을 익히고 다양하게 즐기면서 천천히 와인을 알아가는 재미야말로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매력적인 술이 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