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이자 아랍권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가 4월 25일(현지시각) “석유 중독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했다. 석유 판매로 정부 재정의 90% 정도를 마련하고 과도한 복지 등 막대한 재정지출을 감수하는 지금의 경제구조가 저유가 장기화로 불가능해졌음을 인정한 것이다. 사우디는 이러한 경제구조를 바꾸는 고강도 개혁안도 발표했다.
‘비전 2030’이란 이름의 이 개혁안은 세계 최대 석유기업이자 사우디 대표 국영기업인 아람코 지분의 5%(약 2조 달러·약 2302조 원)를 기업공개(IPO)로 처분하고, 최대 3조 달러(약 3453조 원)의 국부 펀드를 조성한 뒤 교육, 보건, 과학기술 분야에 적극 투자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다. 석유 외 성장동력을 마련하고자 광업(채굴), 국방, 관광 산업에 투자를 늘리고 이를 통해 국내총생산에서 20%를 차지하는 중소·중견기업 비율을 2030년까지 35%로 끌어올리는 한편, 실업률은 11.6%에서 7%까지 낮추겠다는 게 골자다.
비전 2030에 대한 외부 평가는 “취지는 좋으나 과연 실현 가능하겠느냐”는 게 주를 이룬다. 짐 크레인 미국 라이스대 베이커공공정책연구소 연구원은 “발상은 좋지만 더디기 짝이 없는 사우디 정부의 시스템을 고려할 때 계획대로 추진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사우디 왕족과 국민 모두 지금 체제에 너무 익숙하다”며 “개혁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고, 특히 왕족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할 땐 (개혁 추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우디는 과거 저유가 시기에도 석유 의존도를 줄인다는 개혁안을 마련한 적이 있지만 내부 반발과 고유가 시대 도래가 겹쳐 사그라진 전력이 있다.
반면 이번은 좀 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비전 2030의 기획과 발표를 담당하던 인물이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31) 왕자이기 때문. ‘실세 왕자’ ‘신세대 리더’로 불리는 무함마드 왕자는 살만 빈 압둘아지즈(81) 국왕의 아들로 왕위 계승 서열 2위다. 경제정책을 좌우하는 왕실 경제·개발위원회 의장과 국방부 장관을 맡고 있다. 올해 초 이란과 단교, 예멘반군에 대한 강경 대응 등을 결정해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과시한 당사자. 최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주요 산유국 회의에선 “이란이 빠진 합의는 무의미하다”며 석유 생산량 동결 합의를 거부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무함마드 왕자는 왕실에서 추진력과 개혁 의지가 가장 강한 인물”이라며 “그가 비전 2030의 컨트롤타워라는 건 사우디 리더들도 개혁의 필요성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무함마드 왕자는 스티브 잡스를 동경하고 부인도 한 명만 두는 등 기존 왕실 리더들보다 ‘훨씬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15년 동안 진행될 고강도 경제개혁안을 살만 국왕이나 무함마드 빈 나예프 알사우드(57) 왕세자 대신 무함마드 왕자가 발표한 것을 두고 후계 순위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전망마저 조심스럽게 제기할 정도. 과거에도 사우디 후계 순위가 바뀐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인 교수는 “무함마드 왕자가 비전 2030을 계기로 안보뿐 아니라 경제도 책임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영향력 역시 커졌다”며 “사우디 안팎에서 그의 행보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