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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자(가명) 씨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마디마디 힘을 실어 음절을 뱉을 때마다, 미처 감추지 못한 울음이 함께 흘러나왔다. 그는 2009년부터 2010년까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어린 자녀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 언제부턴가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만큼 기침이 나기 시작했지만, 그게 가습기 살균제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급성천식 진단을 받고 연이어 폐렴, 기관지염, 후두염을 앓으면서도, 병원에서 약을 타고 돌아오는 길 숨이 곧 멎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던 순간에도 가습기만은 끄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 겨울쯤 누군가에게 가습기가 호흡기에 안 좋을 수도 있으니 사용을 중단해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온 언론을 뒤덮었죠. 그제야 ‘내가 겪은 이 모든 고통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김씨를 더욱 힘들게 한 건 아이에게도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창 뛰어놀 나이가 된 아이는 어느 날 김씨를 붙잡고 ‘엄마, 나 숨 좀 쉬게 해줘. 여기가 너무 답답해’ 하며 가슴을 쳤다. 숨 못 쉬는 고통을 먼저 겪은 엄마로서 마음이 덜컥 내려앉을 일이었다. 그리고 정밀진단 결과 아이의 몸속 특정 장기에서 섬유화가 진행 중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직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은 희귀질환이었다. 의사는 김씨에게 “섬유화가 더 진행되면 실명이나 뇌손상, 외모 변형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몸속 어느 신경에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부터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게 김씨에게는 기쁨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이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섬유화가 더 진행되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우리 애가 굉장히 잘생겼거든요. 그런데 치료가 안 된대요. 지금은…”이라고 말하다, 또 한 번, 말을 잇지 못한 채 흐느꼈다.
등급 따라 차별받는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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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015년 뒤늦게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접수, 조사한 질본은 폐손상을 기준으로 피해자를 1~4등급으로 나눴다. 1등급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손상이 ‘거의 확실’한 피해자를 의미한다. 2등급은 ‘가능성 높음’, 3등급은 ‘가능성 낮음’, 4등급은 ‘가능성 거의 없음’을 각각 뜻한다. 정부는 이를 기초로 1, 2등급 피해자에게는 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하고 있다. 배상이나 보상이 아닌 것은, 추후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에 구상권을 청구해 이에 상당하는 액수를 받아낼 계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비용 환수 가능성이 낮은 3, 4등급 피해자는 정부 지원에서 제외된 상태다. 그리고 김씨와 자녀는 이 조사에서 4등급을 받았다. 등급만 놓고 보면 이들의 질환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게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정부가 이미 ‘가능성이 낮다’는 딱지를 붙인 만큼 3, 4등급 피해자들이 가습기 살균제 제조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 문제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질본의 해당 조사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급성 중증 폐질환’에 국한돼 이뤄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임종한 인하대 의대 교수는 “질병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역학조사를 실시할 때, 물질과 질병 사이 인과관계를 분명히 규명하려고 잠정적으로 범위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 질본이 중증폐질환 관련성만 조사한 것도 이 때문”이라며 “그 내용을 바탕으로 가습기 살균제가 폐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거나, 폐에 큰 손상을 입지 않은 환자의 건강상 문제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임 교수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연구팀을 구성해 사건 실체를 조사한 학자다(32쪽 기사 참조). 이때부터 줄곧 가습기 살균제 독성 관련 연구를 살피고, 피해자들의 상황에도 주목해왔다.
그는 “지금까지 발표된 여러 조사를 보면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물질이 폐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피를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며 간, 신장 등에 손상을 주는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임신부의 태반을 통과해 태아에게 전달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며 “김씨 자녀에게 나타난 질환의 원인 역시 가습기 살균제라고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다”고 밝혔다. 의사로서 “노출 경로나 현재 나타난 양상을 보고” 판단한 결과다. 임 교수는 “김씨 아이의 질병은 다른 원인으로 생겼을 가능성이 낮다. 동물실험을 해보면 가습기 살균제와 해당 질환 사이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가습기 살균제 제조기업이 자발적으로 이런 연구를 할 리 없는 만큼, 정부가 김씨 같은 피해 사례를 접수해 과학적으로 문제를 규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게 임 교수의 의견이다.
백서 내용도 모르는 환경부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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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많고 인체 피해 기전을 파악하기 쉬운 제품부터 조사를 시작한 뒤, 추후 다른 제품에도 연구를 확대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애경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한 김씨와 그의 자녀는 이 조사가 추가로 이뤄져야 피해를 인정받고 보상, 배상, 최소한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김씨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조사는 보고서 발간 후 1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김씨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치려고 회사를 그만뒀고,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정보공개청구, 검찰청 민원 신청, 공정거래위원회 신고 등도 두루 했다고 밝혔다.
“그러다 4월 초 비로소 환경부 담당자들과 만날 기회를 얻었어요. 그 자리에서 CMIT/MIT 조사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물으니 ‘백서에 그런 내용이 있나요?’ 하고 되묻더군요. 피해자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예 모르는 것 같았어요. ‘백서 43쪽을 찾아보라고, 내가 그것 하나 기대하며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텨왔는데 그렇게 얘기하느냐’고 말하는데, 몸이 막 떨렸습니다.”
김씨 얘기다. 그는 “세상 천지에 이렇게 답답할 데가 없다”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부가 아직 독성피해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하지 않은 CMIT/MIT가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살충제’로 분류하는 물질이자, 제품화할 경우 겉면에 ‘흡입 시 위험(Harmful if inhaled)’ 표시를 반드시 할 것을 요구받는 성분이라는 점에도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해준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이번 사건은 정부의 화학물질 관리체계 전반의 부실 때문에 야기된 것인데, 정부가 문제되는 물질 조사를 소홀히 하고 특정 질병만 피해 구제 대상으로 삼는 걸 이해할 수 없다”며 “당장이라도 폐섬유증뿐 아니라 천식, 간경화 등 다른 질환과 가습기 살균제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들여다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1년 질본이 한국화학연구소 부설 안전성평가연구소로부터 제출받은 보고서에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불규칙 호흡, 체중 감소, 보행 실조, 탈모, 몸 떨림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금 정부는 이런 다양한 증상을 배제함으로써 피해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 주장이다.
김씨도 “주위 피해자들을 탐문한 결과 옥시 제품 사용자는 주로 폐를 비롯한 하기도에 문제가 발생한 반면, 애경 제품 사용자는 기도 비강 등 상기도에 문제가 생긴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가 이를 위해 나설 때까지,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들이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구제를 시작할 때까지 그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아이를 위해서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이렇게 입술을 앙다문 엄마 아빠가 수십, 수백, 수천 명이다. 2006년 두 살배기 아들에게 가습기를 틀어준 걸 지금까지 후회하는 박기용 씨도 그중 한 명이다. 박씨 아들은 당시 원인불명의 폐손상으로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다행히 생명을 건졌다. 다만 호흡곤란 후유증 탓에 지금도 마음껏 뛰지는 못할 뿐이다. 당시 옥시 제품을 사용했던 박씨는 지난해 5월 영국 본사의 책임을 묻고자 런던에 다녀왔고, 현재 영국 변호사를 통한 국제소송을 준비 중이다. 박씨는 “2012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제조기업 대표 등을 형사고발했지만 검찰은 제대로 수사도 안 하고 시간만 끌었다. 정부 역시 2014년에야 실태 조사를 시작했고, 그사이 기업은 계속 ‘우리는 아무 잘못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정부와 기업의 미온적 태도에 상처를 받아 국제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려 했는데, 변호사 자문을 받아보니 공소시효 문제로 이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송세월 5년 시효를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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