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 이후 한동안 숨죽이던 친박(친박근혜)계가 총선 2주 만에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4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의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가 신호탄이 됐다. 박 대통령은 언론사 국장단과 간담회에서 “여당과 정부는 수레의 두 바퀴”라며 “서로 협의해가면서 계속 같이 굴러가야 국정이 원활하게 운영된다”고 말했다. “내부에서 (서로) 안 맞아 계속 삐걱거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도 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대통령의 ‘두 바퀴 수레’ 언급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비록 졌지만 친박계는 쫄지 말고 다시 한 번 국정운영을 적극 뒷받침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두 바퀴 수레론’을 언급한 이후 친박계는 활발히 정치 재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4월 27일 친박계 몇몇 의원은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향후 진로를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5월 3일로 예정된 새 원내대표 선출 때 친박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려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당초 친박 진영에서는 홍문종 전 사무총장과 유기준 전 해양수산부 장관 등이 원내대표에 나설 뜻을 비쳤다. 하지만 4·27 친박 회동 이후 유 전 장관으로 사실상 후보 단일화가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여당과 정부는 수레의 두 바퀴”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나경원, 정진석, 유기준 3파전으로 원내대표 경선을 치를 경우 그 결과를 장담키 어렵다는 얘기가 많다. 세 후보가 제각각 강점을 갖고 있어 선택이 쉽지 않기 때문. 여성 4선인 나경원 의원은 유연하면서도 참신한 리더십을 선보일 수 있다는 점과 총선 참패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비박(비박근혜)계라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정진석 당선인은 충청 출신이라는 점과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내는 등 정무 능력이 검증됐다는 것이 강점으로 여겨진다. 박근혜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유기준 의원은 당내 최대 계파인 친박계 출신이라는 점과 TK(대구·경북) 정권을 보완할 PK(부산·경남) 출신이라는 점이 강점으로 거론된다.그러나 친박계가 공천을 주도한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는 점은 유 의원에게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총선 3주 만에 친박계 인사가 당 전면에 나서는 것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이 20대 총선 당선인들의 표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변수다.
새누리당 한 비박계 인사는 “친박계 중심의 새누리당 구체제는 20대 총선에서 국민의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도 총선 3주 만에 친박계 인사가 원내대표로 다시 당 전면에 나선다면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기껏 표로 심판했더니 오히려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든다며 오만하다고 생각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은 크게 보면 친박계 후보냐, 아니냐를 가르는 선거가 될 공산이 커졌다. 총선 이후 김무성 대표와 최고위원들의 사퇴로 지도체제는 무너졌지만,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소관계를 중심으로 나뉜 당내 세력 분포까지 무너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새누리당에 친박계를 대체할 새로운 구심점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며 “새로운 리더십이 세워지기 전까지, 최소한 차기 유력 대권주자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친박과 비박으로 세력을 구분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원내대표와 당대표를 선출하는 당내 경선은 국민이 투표에 참여해 민의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선거가 아니다. 원내대표 경선은 새누리당 20대 총선 당선자들이 유권자이고, 전당대회는 새누리당 당원 또는 대의원들이 주요 투표권자다. 최 부소장은 “B2C(business to consumer) 성격이 강한 총선에서는 민의가 즉각적으로 총선 결과에 반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당권의 향배를 가늠할 당내 경선은 B2B(business to business) 성격이 강하다”며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참패했음에도 친박계가 조기에 등판하려는 것은 그 같은 당내 선거의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이숙현 시사칼럼니스트도 “새누리당 총선 공천이 친박계 위주로 이뤄지면서 20대 총선 이후 당내 세력 분포 측면에서 오히려 친박계의 순도가 더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며 “당내 세력 분포만 놓고 본다면 친박계가 각종 당내 경선에서 유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원내대표든 당대표든 당내 경선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친박계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당권을 손에 쥘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는 얘기다.
“원내 친박 순도 더 높아져”
그는 “총선에 나타난 민의를 거부하고 친박계가 세력을 앞세워 또다시 당내 경선을 통해 전면에 등장하면 국민은 다음 심판 기회가 찾아왔을 때 더욱 가혹하게 심판하려 할 수 있다”며 “친박계가 그 같은 미래 민심의 심판까지 염두에 둔 행보를 보일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당권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찰이지만 국민적 심판은 빨라야 1년 8개월 뒤 대통령선거(대선), 2년 2개월 뒤 전국동시지방선거, 그도 아니면 4년 뒤 총선에서나 이뤄질 수 있다.
친박계가 당권을 쥐려는 이유는 내년 대선 국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사전포석의 의미가 강하다. 특히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현재의 1여3야 구도가 내년 대선 때까지 지속된다면 새누리당이 1여다야, 이른바 4자필승론에 힘입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하고 있다.
20대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은 1987년 13대 대선 득표율에 비유된다. 새누리당(34%)과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37%) 지지율이 비슷하고 국민의당(27%)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28%), 더불어민주당(26%)은 평화민주당(평민당) 김대중 후보(27%), 정의당(7%)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8%) 후보의 득표율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다.
13대 대선과 20대 총선 정당 득표율의 유사성은 ‘새누리당이 35% 이상의 강력한 지지율을 내년 대선까지 유지하고, 1여3야 후보가 난립하는 4자 구도로 대선을 치른다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는 이른바 ‘신4자필승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1987년 당시 평민당 김대중 후보가 제시한 ‘4자필승론’은 호남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자신이 수도권에서도 우위를 보이기 때문에 TK의 노태우 후보, PK의 김영삼 후보, 충청의 김종필 후보보다 당선권에 더 근접했다는 논리로, 당시 김 후보는 야권분열이란 비판을 무릅쓰고 출마를 강행했다. 그런데 20대 총선 이후 이 논리가 내년 대선 때까지 1여3야 구도가 지속되면 35% 이상 지지를 확보한 새누리당이 다시 승리할 수 있다는 얘기로 둔갑해 회자되고 있다.
새누리당 한 비박계 관계자는 “야권분열로 다자구도가 되면 새누리당이 유리하다는 것은 역대 선거 때마다 늘 나오던 얘기”라며 “대선까지 1년 7개월 이상 남아 누가 후보가 될지, 대선구도가 어떻게 재편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찌감치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총선 참패의 주역으로 눈총받던 새누리당 친박계가 하나로 똘똘 뭉쳐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려는 논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