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로동신문’은 5월25일 발행된 신문 1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가족에게 보낸 조전을 게재했다(좌측 사진). 2001년 3월24일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측 조문사절단이 정주영 명예회장의 빈소에 김 위원장이 보낸 조화를 들고 들어서고 있다(우측 사진).
그 대신 북한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사흘째인 5월25일 2차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국상(國喪)의 슬픔에 빠진 한국인과 그런 한반도에 눈과 귀를 집중하는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남한 유명인에 대한 ‘조문정치’로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을 외부에 밝혀온 것을 떠올린다면 북한의 이런 ‘무례’는 노 전 대통령이 지시한 ‘대북 송금 특별검사’ 수사와 이명박 정부 이후 악화된 남북관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차례에 걸친 북한의 조의(弔意) 표시는 매우 짧고 건조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5월24일 오전 10시44분 “보도에 의하면 전 남조선 대통령 노무현이 5월23일 오전 사망했다고 한다”면서 “내외신들은 그의 사망동기를 검찰의 압박수사에 의한 심리적 부담과 연관시켜 보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5월25일 오전 5시57분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유족에게 조의를 표했다. 김 위원장의 직함이 빠진 ‘김정일’ 명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불상사로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여 권양숙 여사와 유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북한은 이어 대내용 라디오 방송인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방송·신문 통해 건조한 호칭의 ‘弔電’뿐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위의 두 보도 내용과 조문단을 파견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5월24일자 보도 내용은 매우 냉정하다. ‘보도에 의하면’이나 ‘보도하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은 남한 언론을 통해 알고 있을 뿐 직접 서거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전 남조선 대통령 로무현’이라는 건조한 호칭을 사용한 점도 마찬가지다. 조전 역시 그러하다.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고인의 사전 업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함께 북한 스스로 ‘6·15 공동선언의 실천 강령’이라고 한 10·4 정상선언에 사인한 당사자가 아닌가. 북한 ‘노동신문’은 5월25일 아침자에 “김 위원장이 조전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당국이나 유족 가운데 통상적인 조전(조의를 담은 문서 등)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북한은 25일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남한과 유족에 대한 전문이라고 자체적으로 갈음한 것 같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과거의 통상적인 ‘조문정치’와 확연히 다르다. 북한은 2001년 3월21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사망하자 하루 뒤 김 국방위원장 명의의 조전을 보내 고인을 애도했다. 이어 사흘 뒤인 24일 송호경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2004년 사망)을 단장으로 한 조문단을 파견했다. 조문단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빈소를 찾아와 김 위원장이 보낸 조화를 전달했다. 당시 송 위원장은 “나는 북남 사이의 화해와 협력, 민족 대단결과 통일 애국사업에 기여한 정주영 선생의 사망에 즈음하여 현대그룹과 고인의 유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김 위원장의 조전을 낭독했다.
북한은 2003년 8월4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자살했을 당시에는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명의의 조전을 보냈지만, 조문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금강산에서 정 회장에 대한 추모식을 가졌다. 정 명예회장에 대해 북한은 조전과 조문이라는 두 가지 형식을 다 갖췄다. 조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김 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북한은 친북 재야인사들에 대한 조문을 통해 남한 보수세력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남남갈등을 유도하기도 했다. 1994년 1월 문익환 목사가 사망했을 당시 김일성 주석 개인이 조의를 표했고, 2004년 10주기 행사 때는 7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다. 2000년 김양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 본부 상임부의장의 사망과 2005년 신창균 범민련 공동의장 사망 때도 조전을 보냈다.
5월25일 핵실험 ‘시간표’대로 진행
어쨌든 북한의 보도에 따라 남한 전문가와 당국자들은 걱정과 기대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북한대학원대 양무진 교수는 “북한이 이번에도 조전은 보내올 것으로 보지만, 조문단 파견 여부는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전망했다. 24일 북한의 무미건조한 첫 보도에 대해 한 당국자는 “조문단은커녕 조전도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25일 오전 김 위원장의 조의 내용이 알려지자 다른 당국자는 “조문단이 온다면 남북관계에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은근히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5월25일 오전 11시29분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했다는 소식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면서 조문단 파견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북한은 25일의 2차 핵실험 계획을 미리 세워놓은 상태였으며, 23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돌발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핵실험 후 조문단 파견을 제의해 남남갈등을 조성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했지만 기우로 끝났다.
북한과 노 전 대통령의 관계는 취임 때부터 좋지 않았다. 북한은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어난 대북 송금사건에 대한 특별검사 수사를 재가하자 이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한동안 남북관계를 단절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북정책 방향을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은 점도 북한의 속을 태웠다. 김대중 정부의 화해·협력 정책을 계승해 평화·번영 정책이라는 대북 포용정책을 폈지만, 북한과 일부 친북세력은 “철학도 내용도 없다”며 노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 결국 김 위원장과 노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퇴임을 넉 달 앞두고 성사됐다.
북한은 평양에 도착한 노 전 대통령을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방북 때만큼 환대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10·4 정상선언에 사인하면서 과감한 대북 경제지원을 약속했지만 ‘10년 만의 정권 교체’를 막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