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5월23일 오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는 적막과 긴 한숨밖에 없었다. 수사팀 관계자들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검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전직 대통령 가족과 측근 사이에 오간 수십억원대의 수상한 자금 흐름을 포착한 성과가 일시에 공중분해됐다는 ‘충격’과,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정치적 역풍으로 검찰 조직이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였다. 임채진 검찰총장이 받은 충격은 특히 컸다. 임 총장과 가까운 한 검찰 관계자가 “총장께서 마음을 심하게 다친 것 같다.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듯하다”고 전할 정도.
인간적 고뇌에 검찰 조직에도 치명적 타격
대통령 임기 종료를 3개월 앞둔 2007년 11월 노 전 대통령은 임 총장을 선택했다. 정상명 검찰총장의 후임으로 안영욱 서울중앙지검장과 임채진 법무연수원장이 경합하던 상황이었다. 안 지검장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구도에서 노 전 대통령은 막판에 임 원장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그 믿음은 17대 대통령 선거 목전까지 이어졌다. 선거 판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변수로 지목된 ‘BBK 수사’에서 검찰이 결국 이명박 대선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를 발표했으나 노 전 대통령은 임 총장의 판단을 존중했다.
그러나 ‘운명처럼’ 임 총장이 주관한 대검 중수부의 수사로 노 전 대통령이 되레 코너에 몰렸다. 임 총장은 대검 간부들에게 사건의 중차대함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의 주임검사는 사실상 총장이다”라고까지 했다.
자신을 선택해 임명하고 믿어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임 총장은 즉각 사표를 써 김경한 법무부 장관에게 인편으로 보냈다. 김 장관은 이틀을 고심하다 5월25일 사표를 반려했다. 임 총장은 이때 기자들에게 ‘인간적인 고뇌’라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인간적인 고뇌 때문에 출근 즉시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께서 ‘사태 수습이 우선’이라고 하시며 사표를 되돌려 보냈다.”
이인규 중수부장, 홍만표 수사기획관, 우병우 중수1과장 이하 수사팀은 인간적인 괴로움뿐 아니라 수개월 동안 밤잠을 자지 않고 수사해온 ‘목표’가 사라진 허탈감이 더했다. ‘초거물급’ 피의자를 잡기 위해 공들여 준비해온 여러 증거관계와 진술은 영면(永眠)에 들어갔고,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온갖 의혹은 ‘공소권 없음’으로 방점을 찍으며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수사팀을 비롯한 검찰에 치명적인 타격을 예고했다. 정치권 등 외부 인사들은 물론, 검찰 출입기자들과 검찰 내부인사까지 이번 검찰 수사의 맹점을 지적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먼저 늘어진 수사기간을 놓고 비난 여론이 거세다. 통상 거물급 인사를 수사할 때 검찰은 피의자를 한 번 불러서 조사한 직후 구속영장을 청구하거나 불구속 기소 결정을 내렸다. 검찰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증거 관계를 구성해 소환조사 직전까지 사실상 수사를 끝낸 것이다. 장·차관, 현역 국회의원 등은 소환 자체가 어렵고 또 예우 차원에서 자주 출석을 요청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 씨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이광재 민주당 의원을 구속할 때도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조사 상황을 브리핑하는 홍만표 대검수사기획관. 피의 사실 공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좌측 사진).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 나머지 수사를 ‘격랑’ 속에서 할 가능성이 높다(우측 사진).
이 상태에서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이 예상도 못한 딸 노정연 씨 부부까지 불러 조사하고, “박 전 회장에게서 받은 시계를 버렸다”고 한 진술까지 알려지면서 노 전 대통령은 사실상 그로기 상태에 몰렸다. 여기에 한 차례 조사한 권양숙 여사의 재소환 일정 통보는 노 전 대통령에게는 ‘피니시 펀치’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피의 사실 공표 논란도 거세다. 사실 일반 사건 혹은 공인이 연루된 사건이라도 검찰이 피의 사실을 브리핑을 통해 공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검찰 출입기자들은 하나의 ‘팩트’라도 더 알아내려고 검찰을 압박하고 여러 질문을 던진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검찰 관계자가 “모르겠다” “확인해줄 수 없다”고 나오면 그제야 약간의 감을 잡는 정도가 매일의 일상이다. 오히려 검찰 안팎의 비공식, 은밀한 취재원에게서 듣고 기사를 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문제의 23일 동안엔 매우 이례적인 피의 사실 ‘발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신병 결정이 왜 이렇게 늦어지냐. 총장이 너무 좌고우면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빗발칠 무렵인 5월12일의 일이다. 이날 홍 수사기획관의 신병 결정이 미뤄진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 신병 결정과 관련해) 검찰이 장고(長考)를 한다고들 하는데, 박 전 회장에게서 수십만 달러의 추가 금품수수 혐의가 포착됐다. 박 전 회장의 홍콩 APC계좌에서 자금 세탁을 거쳐 미국의 어떤 계좌에 송금된 수십만 달러가 확인됐다. 어제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노정연 씨와 사위인 곽모 변호사를 소환조사했다. 이 부분을 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수사기간 장기화, 수사내용 공표 도마에
수사가 왜 장기전으로 가는지에 대한 해명이었지만, 노 전 대통령에게는 새롭게 딸이 사건에 연루되는 치명적인 ‘장외 공격’일 수 있었다. 특히 검찰이 ‘빨대(은밀한 취재원) 찾기’를 공언한 고가 시계 얘기가 항간에선 검찰이 의도적으로 흘렸다는 말도 나온다. 수사팀 한 관계자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수사팀에서 ‘빨대 찾기’는 없었으며, 검찰에서 의도적으로 흘린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수사팀의 욕심이 과도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4월30일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할 때 여론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불구속 수사’로 굳어지고 있었다. 임 총장의 속내도 불구속 수사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 중수부장 이하 수사팀 주변에선 ‘전직 대통령 구속’에 비중을 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노 전 대통령의 추가 혐의를 찾고, 그동안 노 전 대통령 주장의 신빙성을 깰 수 있는 증거를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이 수사팀 내에서 확산됐다는 전언이다.
검찰 안팎서 “정당성과 신뢰성 상실”
그래서 수사팀은 임 총장에게 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보고를 계속했고, 임 총장이 수사기간이 늘어나는 데 대해 화를 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23일’ 동안 수사팀은 ‘100만 달러’의 용처를 상당 부분 밝혀내 노 전 대통령 주장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허물어뜨렸으며, 노정연 씨에게 흘러들어간 40만 달러를 추가로 파악했다. 또 국세청 압수수색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의 추가 혐의도 포착해 의욕적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오히려 화를 몰고 왔다.
수사팀에선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증거 관계가 진술을 충분히 확보한 상황이었지만,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단계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되거나 재판에서 무죄가 나지 않도록 수사 내용을 다시 검증하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는 것.
검찰은 5월29일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끝난 뒤 박연차 게이트의 나머지 수사를 진행할 방침이다. 검찰은 돈을 받은 액수와 그 대가성 등을 엄밀히 따져 나머지 수사 대상을 10명 정도로 선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10여 명 가운데 지방자치단체장 등 기관장 3, 4명에 대해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을 검토 중이며, 아직 소환되지 않은 의원을 포함해 현역 의원들과 전 국회의장 등은 불구속 기소할 방침이다. 미뤄졌던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절차도 진행된다. 수사는 2주간 진행돼 6월 중순에 끝마칠 전망이다.
검찰은 나머지 수사를 ‘격랑’ 속에서 할 가능성이 높다. 검찰 안팎에선 나머지 수사조차도 불법성 여부를 떠나 국민 앞에 정당성과 신뢰성을 잃어 만신창이 된 이인규 중수부장 체제에서 할 수 있느냐는 비판론이 높아지고 있다. 장례 절차가 끝난 다음 주부터 여론이 검찰을 어떻게 공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수사팀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마무리할 수도 있다.
검찰 수사로 사상 초유의 전직 대통령 서거 사태가 발생했다. 한 검찰 간부는 “검찰 조직의 상처가 심하다. 누가 새 총장이 되든 이것을 추스르는 데만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