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지음/ 샘터사 펴냄/ 236쪽/ 1만1000원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갈 것이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축복’ ‘생일’ ‘내 생애 단 한 번’ 등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영문학자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지난 5월9일 세상을 떠났다. 위 글은 그가 마지막 남긴 저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일부다. ‘내 생애 단 한 번’ 이후 9년 만에 나온 책으로 장 교수가 2000년 이후 월간 ‘샘터’에 연재한 글 중 39편을 직접 골라 담았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그림 작가 선정에서부터 제목과 디자인까지 꼼꼼하게 점검하며 심혈을 기울이고, 병상에 누워서도 짬짬이 글을 손보고 교정지를 체크한 그는 그러나 인쇄된 책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희망의 힘을 전파하던 장 교수는 자전적 에세이의 제목처럼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살다 갔다.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목발에 의지했으며 40대 후반부터 유방암, 척수암에 이어 간암과 싸운 지치고 고단한 삶이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고통과 역경에 쉽게 손들고 좌절하고 말 순간에도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며 이겨냈다.
“지난번보다 훨씬 강도 높은 항암제를 처음 맞는 날, 난 무서웠다. …순간 나는 침대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악착같이 침대 난간을 꼭 붙잡았다. 마치 누군가 이 지구에서 나를 밀어내듯 어디 흔들어보라지, 내가 떨어지나, 난 완강하게 버텼다.”
비록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스러졌지만 삶에 대한 열정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남다른 자세는 삶의 고귀함을 진정 일깨운다.
암 투병 중이던 병실을 장 교수는 ‘싸움터’라고 표현했지만, 그곳에서 전하는 세상 사는 소박한 이야기, 정겨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위트 있고 긍정의 기운이 가득했다.
“병원에서 우리는 누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었는지, 누가 어떤 자리로 승진했는지, 정치권의 아무개는 왜 그런지, 누구 자식이 어느 대학을 갔는지 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한다. 예컨대 어떤 산이 더 좋고 어떤 책, 어떤 영화가 더 재미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한다. 무엇보다 오늘을 함께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운다.”
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옅은 미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 때문에 사람들은 장 교수가 조용하고 나직하기만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인연으로 장 교수를 서너 차례 만나뵐 기회가 있었다. 그의 글은 나지막했으나 목소리는 걸걸했고, 그의 글은 온화했으나 행동은 터프했다.
빠른 서울 말씨로 단칼에 푹 찌르는 촌철살인이 장 교수의 특기였다. 어느 해 가수 조영남 씨가 장 교수 생일잔치를 열어주자 “둘이 결혼하는 거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이때 장 교수는 말 한마디로 주변을 잠잠하게 했다. “난 처년데 아깝잖아!”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라는 제목의 에필로그에는 이런 말이 담겨 있다.
“언젠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느 학생이 내게 물었다.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느냐고. 그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를 것이고, 그럴 바엔 노래를 부르는 게 낫다고.
갑자기 물때가 바뀌어 물이 빠질 수도 있고 소녀 머리 위로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구해줄 수도 있다고. 그리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래서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책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장 교수가 남긴 마지막 글은 엄마에게 보낸 편지였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이 세상에서 나는 그다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삶을 살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평균수명은 채우고 가리라. 종족 보존의 의무도 못 지켜 닮은꼴 자식 하나도 남겨두지 못했는데, 악착같이 장영희의 흔적을 더 남기고 가리라….”
타계한 장영희 교수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평균수명을 채우지는 못했다. 대신 ‘악착같은’ 자신의 흔적을 오롯이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