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게 쓰라고 편집자는 당부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담담해지기가 정말 어렵다. 그동안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이 일주일만큼 생생하게 실감한 적이 없다. 그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를 사랑했다는 깨달음은 흡사 연애심리와 비슷하다.
정치인을 따르고 옹호한다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감성에 속하는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감성이란 이성이 없는 무책임하고 즉흥적인 판단이 아니라, 능력이니 사상이니 전력이니를 망라해서 가슴이 느끼는 것이다. 감성을 폄훼해선 안 된다.
영결식 날 아침 나온 통계로는 노 전 대통령에게 분향한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은 다들 영정 앞에서 운다. 눈물을 비치다가 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훔쳐가면서 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우는 경우를 최근 수십 년간 어디서도 본 적 없다. 아마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초상집에서 상주들이 울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 버느라 지쳐 눈물이 말라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아니었다. 저렇게 펑펑 우는 사람들을 가진 나라는 희망이 있다. 슬픔을 노란 리본으로, 공들여 쓴 편지로, 노래로, 영상으로, 국화꽃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을 가진 나라는 미래를 꿈꿔도 좋다.
펑펑 우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덕수궁 앞 분향소에 갔었다. 사람들이 서리서리 줄을 서 있었다. 죽은 대통령의 영정 앞에 국화꽃을 바치려는 줄이지만 그게 목적일 리는 없다. 그들은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허탈해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절망을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가장 큰 환희를 주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지금 죽어 검은 테를 두르고 소탈하게 웃는 영정 속 노 전 대통령이야말로 바로 그 ‘사람’의 ‘사람됨’을 가장 진지하게 구현하려 했고 그 노력 때문에 도리어 죽어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는 아니나 다를까 연가(戀歌)였다. 연인을 잃은 슬픔을 가장 애절하게 표현한다고 평소 감탄했던 김광석의 ‘그날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이었다. 화면에는 그의 쑥스럽게 웃는 모습, 포효하는 모습이 연신 비쳤다.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내 눈에서도, 내 앞사람 눈에서도!
이것은 ‘장엄’이다. 새로운 형태의 ‘품위’이고 ‘격조’다. ‘그’를 잃어버렸다는 통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회한,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행복을 수백만이 나누면서 다 함께 조용히 울 수 있다는 것은 2009년 대한민국 사람들이 보여주는 또 다른 ‘기적’이다.
노무현이 단순히 전직 대통령이어서 이럴 리는 없다. 예상치 않은 죽음이기에 이런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하늘의 마음이 있다. 한 사람의 마음 안에도 물론 들어 있겠지만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군중의 마음에 하늘의 마음이 더 뚜렷하게 투영됐다는 건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이걸 무작정 정치적 불순세력으로 몰아가는 것은 오독이다.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간결한 언설이 진작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몹시 놀랐다. 내가 깨닫는 것은 누군가 이미 깨달은 진리를 재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러나 그 재확인은 김이 새는 종류가 아니라 썩 기분 좋은 각성이 된다. 먼저 역사를 일궈온 윗대들에 대한 신뢰와 외경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을 향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올리는 발언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이다. 이미 ‘지못미’란 상징어로 쓰이는 말. 이외에 ‘사랑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도 있고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도 있다. 머지않아 ‘사해고’와 ‘당있행’도 유행어가 될지 모른다.
이렇게 사랑받는 노 전 대통령은, 그러면 재임 중 무슨 일을 했나. 무슨 일을 했기에 사람들의 슬픔이 이토록 깊은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민주주의, 두 번째는 화합, 세 번째는 평화통일. 그가 일생을 투쟁하고 분노한 대상도 그 어름에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화합’은 앞뒤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동시에 걸리는 내용이니 두 가지로 줄여놔도 상관없겠지만 그가 죽음 앞에서 남겨놓은 말이 민주도 통일도 아닌 화합이므로 굳이 따로 떼어본다.
민주주의란 추상개념이다. 한쪽에선 찬동하고 한쪽에선 반대하면 무엇이 옳은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판독하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권력이 민중을 억압하느냐, 않느냐만 살피면 금방 읽을 수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가 노무현 시대에 크게 늘어났다는 것을 저기 고개 숙이고 말없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확신하는 것이다. 연정 제안 같은 것도 우스갯소리로 묵살당했지만 같은 차원의 정치철학이었고, 좌파로 매도될 만큼 경제민주화를 지향했음을 저기 우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다.
울고 웃는 사람들 진지하게 소통할 것
노 전 대통령이 편을 갈라 싸움을 일삼고 언론, 강남부자, 한나라당에 대립각을 세우는 포용력이 부족한 대통령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재임 내내 ‘경박하다’ ‘무식하다’는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정치인 노무현의 행적은 그런 편견을 뒤엎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려 핵심이 동서화합이었다. 경박하고 무식하다기보다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진지하고 지적인 대통령이었음을 그가 남긴 연설에서, 글에서, 태도에서, 웃음에서 새삼 발견한 사람들이 제 발등을 찧듯 애통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언으로 말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 영예도 오욕도, 시비도 곡직도, 박수도 눈물도, 찬사도 비난도, 나아가 민주주의도 평화통일도 동서화합도 여야화합도 국민과 정부의 소통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갔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당대 역사는 동시대인이 함께 쓴다. 눈물을 그친 사람들, 아니 눈물을 내면화한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정신으로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정신에 원망은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쑥스러운 듯 씩 웃는 웃음이 일품인 사람이었다. 다시 그를 못 보겠지만 그의 웃음과 연설은 인터넷 공간 도처에 살아 움직인다. 과연 삶과 죽음이 한 가지다! 그걸 지켜보면서 울고 또 웃는 ‘사람들’은 비로소 진지하게 소통을 시작할 것이다. 저기 울고 있는 사람들의 슬픔이 힘이 되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것을 믿는다.
정치인을 따르고 옹호한다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감성에 속하는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감성이란 이성이 없는 무책임하고 즉흥적인 판단이 아니라, 능력이니 사상이니 전력이니를 망라해서 가슴이 느끼는 것이다. 감성을 폄훼해선 안 된다.
영결식 날 아침 나온 통계로는 노 전 대통령에게 분향한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은 다들 영정 앞에서 운다. 눈물을 비치다가 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훔쳐가면서 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우는 경우를 최근 수십 년간 어디서도 본 적 없다. 아마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초상집에서 상주들이 울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 버느라 지쳐 눈물이 말라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아니었다. 저렇게 펑펑 우는 사람들을 가진 나라는 희망이 있다. 슬픔을 노란 리본으로, 공들여 쓴 편지로, 노래로, 영상으로, 국화꽃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을 가진 나라는 미래를 꿈꿔도 좋다.
펑펑 우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덕수궁 앞 분향소에 갔었다. 사람들이 서리서리 줄을 서 있었다. 죽은 대통령의 영정 앞에 국화꽃을 바치려는 줄이지만 그게 목적일 리는 없다. 그들은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허탈해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절망을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가장 큰 환희를 주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지금 죽어 검은 테를 두르고 소탈하게 웃는 영정 속 노 전 대통령이야말로 바로 그 ‘사람’의 ‘사람됨’을 가장 진지하게 구현하려 했고 그 노력 때문에 도리어 죽어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는 아니나 다를까 연가(戀歌)였다. 연인을 잃은 슬픔을 가장 애절하게 표현한다고 평소 감탄했던 김광석의 ‘그날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이었다. 화면에는 그의 쑥스럽게 웃는 모습, 포효하는 모습이 연신 비쳤다.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내 눈에서도, 내 앞사람 눈에서도!
이것은 ‘장엄’이다. 새로운 형태의 ‘품위’이고 ‘격조’다. ‘그’를 잃어버렸다는 통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회한,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행복을 수백만이 나누면서 다 함께 조용히 울 수 있다는 것은 2009년 대한민국 사람들이 보여주는 또 다른 ‘기적’이다.
노무현이 단순히 전직 대통령이어서 이럴 리는 없다. 예상치 않은 죽음이기에 이런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하늘의 마음이 있다. 한 사람의 마음 안에도 물론 들어 있겠지만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군중의 마음에 하늘의 마음이 더 뚜렷하게 투영됐다는 건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이걸 무작정 정치적 불순세력으로 몰아가는 것은 오독이다.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간결한 언설이 진작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몹시 놀랐다. 내가 깨닫는 것은 누군가 이미 깨달은 진리를 재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러나 그 재확인은 김이 새는 종류가 아니라 썩 기분 좋은 각성이 된다. 먼저 역사를 일궈온 윗대들에 대한 신뢰와 외경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을 향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올리는 발언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이다. 이미 ‘지못미’란 상징어로 쓰이는 말. 이외에 ‘사랑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도 있고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도 있다. 머지않아 ‘사해고’와 ‘당있행’도 유행어가 될지 모른다.
이렇게 사랑받는 노 전 대통령은, 그러면 재임 중 무슨 일을 했나. 무슨 일을 했기에 사람들의 슬픔이 이토록 깊은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민주주의, 두 번째는 화합, 세 번째는 평화통일. 그가 일생을 투쟁하고 분노한 대상도 그 어름에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화합’은 앞뒤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동시에 걸리는 내용이니 두 가지로 줄여놔도 상관없겠지만 그가 죽음 앞에서 남겨놓은 말이 민주도 통일도 아닌 화합이므로 굳이 따로 떼어본다.
민주주의란 추상개념이다. 한쪽에선 찬동하고 한쪽에선 반대하면 무엇이 옳은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판독하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권력이 민중을 억압하느냐, 않느냐만 살피면 금방 읽을 수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가 노무현 시대에 크게 늘어났다는 것을 저기 고개 숙이고 말없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확신하는 것이다. 연정 제안 같은 것도 우스갯소리로 묵살당했지만 같은 차원의 정치철학이었고, 좌파로 매도될 만큼 경제민주화를 지향했음을 저기 우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다.
울고 웃는 사람들 진지하게 소통할 것
노 전 대통령이 편을 갈라 싸움을 일삼고 언론, 강남부자, 한나라당에 대립각을 세우는 포용력이 부족한 대통령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재임 내내 ‘경박하다’ ‘무식하다’는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정치인 노무현의 행적은 그런 편견을 뒤엎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려 핵심이 동서화합이었다. 경박하고 무식하다기보다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진지하고 지적인 대통령이었음을 그가 남긴 연설에서, 글에서, 태도에서, 웃음에서 새삼 발견한 사람들이 제 발등을 찧듯 애통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언으로 말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 영예도 오욕도, 시비도 곡직도, 박수도 눈물도, 찬사도 비난도, 나아가 민주주의도 평화통일도 동서화합도 여야화합도 국민과 정부의 소통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갔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당대 역사는 동시대인이 함께 쓴다. 눈물을 그친 사람들, 아니 눈물을 내면화한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정신으로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정신에 원망은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쑥스러운 듯 씩 웃는 웃음이 일품인 사람이었다. 다시 그를 못 보겠지만 그의 웃음과 연설은 인터넷 공간 도처에 살아 움직인다. 과연 삶과 죽음이 한 가지다! 그걸 지켜보면서 울고 또 웃는 ‘사람들’은 비로소 진지하게 소통을 시작할 것이다. 저기 울고 있는 사람들의 슬픔이 힘이 되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