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종로 거리를 걷다가 한 무리의 대학생이 일렬횡대로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혹시 공짜표를 나눠주는 것은 아닐까. 괜스레 줄 끝에 서서 기웃기웃 앞의 상황을 살펴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줄이 어느 유명 학원강사의 토익 강좌 접수 대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는 재빠르게 가던 길을 갔다. 제한된 수강 인원 안에 들기 위해 그 많은 대학생이 새벽부터 나와 졸린 눈을 비비고 마음을 졸이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단 그날 본 학생들뿐 아니라, 요즘 대학생들은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만큼이나 불쌍하다. 입시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아 이제 마음 편히 쉴까 하면, 주변 사람들은 “무슨 나약한 소리? 네 앞엔 더 큰 취업 전쟁이 있지 않느냐?”며 ‘윽박’지른다. 교수들도 그렇고 선배들도, 언론에서도 그런다. 어쩌겠는가. 남들 다 하는 거, 자기만 배짱부릴 수도 없는 일. 그러니 꽃다운 스무 살 청춘을 허스키 보이스 토익 강사에게 얌전히 헌납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나, 마냥 부끄러워
헌납의 대열에서 전공은 불문이다. 국문학이든 불문학이든 아랍어학이든 치기공학이든 유아교육이든 커뮤니케이션디자인이든 동물산업이든 모두 토익 아래 하나 되고, 영어 아래 한 학문으로 합치된다. 암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또 각자의 개성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렇지 않은가. 취업 면접장에 들어가서 “자넨 왜 영어 성적을 제출하지 않았나?” 하는 질문에 “아 네, 저는 영어가 적성에 안 맞아서요”라고 답할 순 없지 않은가. 어쩌겠는가. 스무 살이 아무리 꽃다워도 존과 스미스의 “밥 먹었느냐”는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여기 한 친구가 있다. 그는 내가 잠시 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내게서 문학을 배운 몇 명 되지 않는 제자 중 하나다. 올해 수도권 소재 모 대학 국문과에 들어간 그는 그야말로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닮았다. 그 친구가 얼마 전 전화를 걸어왔다. 인도행 티켓을 끊었노라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출발하겠노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행 기간은 무려 한 달하고도 보름 남짓. 그 친구는 여행을 위해 학기 내내 평일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했고, 주말엔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기특했지만, 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남들은 1학년 때부터 토익 공부하느라 정신없는데…. 그 정도 경비면 단기 어학연수도 갈 수 있고….”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속내를 드러냈다. 어쨌든 제자가 잘 살아나가길 바라는 것은 모든 스승의 공통된 심정이니까.
“거기 가서 네가 산스크리트어 배울 것도 아니고….”
“에이, 선생님도 저 잘 알면서.”
제자는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저, 거기 나무 보러 가는 거예요.”
아, 그제야 나는 그 친구가 고3 여름방학 시절, 모든 보충수업을 작파하고 보름 남짓 무전으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닌 사실을 떠올렸다. 그 시절에도 그 친구는 나무를 보러 여행을 떠났다. “나무? 생뚱맞게 나무는 왜?”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를 붙들고 그렇게 물었다.
“나무에 가만히 한 손을 대고, 그냥 눈을 감고 오래 있는 게 좋거든요. 그러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나무에게 다 하게 돼요.”
“나무에게 말을 한다고?”
“나무가 사람보다 말이 잘 통할 때가 많거든요. 나무마다 각기 다른 말을 해주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더 많은 나무를 만나고 싶고, 뭐 그래서 떠난 거죠.”
나무를 만나, 나무에게 말을 건네려 인도로 간다는 제자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친구에게는 그 일이 토익 성적보다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일이 그 친구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정직하고 거대한 용기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용기.
원래 속물이란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아무런 자의식이나 고민 없이 무작정 따라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린 모두 속물적 존재다. 타인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은 대부분 자발적인 게 아니다.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고 따라가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일 뿐. 그러니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본래 모습을 하나둘 잃어갈 수밖에 없다. 그저 사회에 존재하는, 몇몇 신화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닮으려고 노력할 뿐.
이제 6월이 되면, 그 친구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인도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인도 어느 이름 모를 지방을 걸어다니며, 이름 모를 나무들에게 한 손을 대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쓸모없어 보이고, 무모하고 감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떠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던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내가 마냥 부끄럽기만 했다.
비단 그날 본 학생들뿐 아니라, 요즘 대학생들은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만큼이나 불쌍하다. 입시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아 이제 마음 편히 쉴까 하면, 주변 사람들은 “무슨 나약한 소리? 네 앞엔 더 큰 취업 전쟁이 있지 않느냐?”며 ‘윽박’지른다. 교수들도 그렇고 선배들도, 언론에서도 그런다. 어쩌겠는가. 남들 다 하는 거, 자기만 배짱부릴 수도 없는 일. 그러니 꽃다운 스무 살 청춘을 허스키 보이스 토익 강사에게 얌전히 헌납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나, 마냥 부끄러워
헌납의 대열에서 전공은 불문이다. 국문학이든 불문학이든 아랍어학이든 치기공학이든 유아교육이든 커뮤니케이션디자인이든 동물산업이든 모두 토익 아래 하나 되고, 영어 아래 한 학문으로 합치된다. 암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또 각자의 개성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렇지 않은가. 취업 면접장에 들어가서 “자넨 왜 영어 성적을 제출하지 않았나?” 하는 질문에 “아 네, 저는 영어가 적성에 안 맞아서요”라고 답할 순 없지 않은가. 어쩌겠는가. 스무 살이 아무리 꽃다워도 존과 스미스의 “밥 먹었느냐”는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여기 한 친구가 있다. 그는 내가 잠시 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내게서 문학을 배운 몇 명 되지 않는 제자 중 하나다. 올해 수도권 소재 모 대학 국문과에 들어간 그는 그야말로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닮았다. 그 친구가 얼마 전 전화를 걸어왔다. 인도행 티켓을 끊었노라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출발하겠노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행 기간은 무려 한 달하고도 보름 남짓. 그 친구는 여행을 위해 학기 내내 평일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했고, 주말엔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기특했지만, 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남들은 1학년 때부터 토익 공부하느라 정신없는데…. 그 정도 경비면 단기 어학연수도 갈 수 있고….”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속내를 드러냈다. 어쨌든 제자가 잘 살아나가길 바라는 것은 모든 스승의 공통된 심정이니까.
“거기 가서 네가 산스크리트어 배울 것도 아니고….”
“에이, 선생님도 저 잘 알면서.”
제자는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저, 거기 나무 보러 가는 거예요.”
아, 그제야 나는 그 친구가 고3 여름방학 시절, 모든 보충수업을 작파하고 보름 남짓 무전으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닌 사실을 떠올렸다. 그 시절에도 그 친구는 나무를 보러 여행을 떠났다. “나무? 생뚱맞게 나무는 왜?”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를 붙들고 그렇게 물었다.
“나무에 가만히 한 손을 대고, 그냥 눈을 감고 오래 있는 게 좋거든요. 그러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나무에게 다 하게 돼요.”
“나무에게 말을 한다고?”
“나무가 사람보다 말이 잘 통할 때가 많거든요. 나무마다 각기 다른 말을 해주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더 많은 나무를 만나고 싶고, 뭐 그래서 떠난 거죠.”
나무를 만나, 나무에게 말을 건네려 인도로 간다는 제자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친구에게는 그 일이 토익 성적보다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일이 그 친구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정직하고 거대한 용기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용기.
원래 속물이란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아무런 자의식이나 고민 없이 무작정 따라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린 모두 속물적 존재다. 타인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은 대부분 자발적인 게 아니다.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고 따라가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일 뿐. 그러니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본래 모습을 하나둘 잃어갈 수밖에 없다. 그저 사회에 존재하는, 몇몇 신화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닮으려고 노력할 뿐.
이제 6월이 되면, 그 친구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인도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인도 어느 이름 모를 지방을 걸어다니며, 이름 모를 나무들에게 한 손을 대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쓸모없어 보이고, 무모하고 감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떠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던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내가 마냥 부끄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