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출구(exit)가 없다.” 좁은 회랑(回廊)에 갇혀 사는 가자(Gaza) 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통행의 자유를 빼앗겼다. 최근 몇 달 새 유혈충돌에서 비롯한 높은 실업률과 불경기로 가자 사람들의 좌절감은 더욱 심해지는 양상이다. 이런 까닭에 하마스(Hamas), 회교성전(Islamic Jihad) 같은 과격단체 요원들의 자살폭탄 테러는 ‘영웅적인 순교 행위’로 여기는 분위기다. 하마스 지도자 아메드 야신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테러의 균형’이란 논리를 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국가 테러’에 대한 징벌이 폭탄 테러라는 것이다.
지중해의 잔잔한 파도, 맑은 물, 30℃의 습기 없는 날씨. 길게 펼쳐진 5, 6월에 가자의 해변은 나무랄 데 없는 휴양지다. 유혈충돌이 벌어지기 전인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이곳 해변은 피서객들로 붐볐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한가로이 햇볕과 수영을 즐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들만이 조개껍질을 갖고 놀 뿐이다.
‘거대한 집단 수용소’. 바로 가자 지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해 9월 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충돌이 벌어진 이래 가자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철저히 봉쇄당한 채 지내왔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그의 몇몇 고위관료들 빼고는 말 그대로 ‘이동의 자유’를 잃었다. 가자와 외부세계를 잇는 관문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지난해 10월 초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에레즈 관문이, 12월에는 이집트로 이어지는 라파 관문이 닫혔다. 가자 국제공항도 지난 1월1일자로 문을 닫았다. 아라파트 수반이 아랍정상회담 등 외국 나들이를 하려면 자동차로 이집트령인 시나이 반도로 건너가, 다시 헬기를 타고 카이로 공항으로 옮겨가야 하는 처지다. 그나마 아라파트 일행에겐 이스라엘이 예외로 대우(?)를 해주는 셈이다.
예루살렘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쯤 달리면 가자의 관문인 에레즈 검문소가 나온다. 유럽지역 국경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검문소다.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이곳은 예루살렘-텔아비브-하이파 등의 이스라엘 쪽으로 일하러 가는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유엔 등 국제기관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나 출입이 가능하다. 필자가 이곳 에레즈에 닿았을 때도 검문소에서 일하는 이스라엘 병사들말고는 인적이 드물어 썰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자 지구는 지중해를 따라 길게 직사각형으로 뻗은 360km2의 좁은 회랑이다. 지난 67년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이집트 관할이었다. 아마도 지금 지구상에서 가자 지구만큼 생활공간의 배분이 불평등하게 이뤄진 곳은 없을 듯하다. 12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가자 지구의 3분의 2에 몰려 사는 반면, 불과 6000명의 유대인 정착민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점유면적은 너무나 차이가 난다. “바로 이 6000명의 정착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2만 명의 이스라엘 병력이 이곳에 주둔하며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리누르고 있다.” 가자 시내 이슬람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무하마드 타예브(23·영문학)의 말이다.
지난 93년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출범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도인 가자 시내에서 난민을 만나기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자 지구 120만 주민 가운데 80만이 난민이다. 이 가운데 44만 명이 8개의 난민 수용소에서 살고 있다. 흔히 ‘난민 수용소’ 하면 임시 주거용 천막을 떠올리지만 이들은 난민이 된 지 50년이 넘은 만큼 일반주택에서 살고 있다. 유엔의 팔레스타인난민구호자활기구(UNRWA)는 ‘1946년 6월~ 1948년 5월에 집과 생활수단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을 난민으로 본다. 이들은 이른바 ‘이스라엘 독립전쟁’의 희생자다. 많은 경우 이들은 당시 살던 집의 문서와 열쇠를 지금껏 갖고 있으면서 언젠가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문제는 중동 평화협상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다. UNRWA의 집계로는 가자 지구 80만, 서안 지구 57만을 합쳐 137만 명의 난민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웃 국가들로 피신한 난민 숫자를 합하면 크게 불어난다. 요르단에 151만, 레바논 37만, 시리아 37만을 합하면 팔레스타인 난민은 360만 명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당국도 UNRWA에 등록하지 않은 난민이 150만 명쯤 된다고 밝힌다. 그럴 경우 51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중동 지역에 퍼져 있는 셈이다. 50년 당시 유엔은 팔레스타인 난민 숫자를 96만 명으로 발표했다.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증가한 셈이다.
팔레스타인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지금껏 가자 지구에서만 모두 195명이 숨졌다. 이스라엘인을 뺀 팔레스타인인 전체 희생자는 지난 5월25일 현재 496명이다. 최근 발표한 ‘미첼 보고서’는 이스라엘군이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대에 지나치게 대응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여기에다 F-16 전폭기 공습은 국제적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지난 5월22일 아리엘 샤론 총리의 ‘제한된 범위 내 일방적 휴전’ 선언은 위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자 지구에서는 샤론이 휴전 선언을 한 지 몇 시간도 채 안 되어 이스라엘군이 마구잡이 총격을 가해 다수의 부상자가 생겼다. 가자 지구 남단 라파에 자리한 야브나 난민 수용소에선 이스라엘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23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4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군의 발표와 관련한 필자의 체험담 하나. 가자시에서 40km쯤 떨어진 칸 유니스 난민 수용소에 갔을 때다. 이곳은 8만5000여 명의 난민이 모여 사는데, 최근 몇 달 동안 이스라엘군과의 충돌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난 곳이다. 집을 잃은 난민은 오스트리아 국제구호기관이 보내준 천막에서 지내고 있었다. 50년 전 막 난민이 되었을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마유다(65) 부인은 남편인 술라만 아부 알바이다(70·농부)를 2개월 전에 떠나보내고 텐트 안에서 시름겨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형체는 간 곳 없고 그냥 시멘트 덩어리뿐인 집을 배경으로 그녀의 사진을 몇 장 찍는 순간 총 소리가 들렸다. 바로 100m 떨어진 곳에 전진 배치한 이스라엘 초소에서 우리를 향해 쏜 것이었다. 소리로 보아 최소한 5발이었다.
이스라엘 병사는 그들이 가진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필자가 뭘 하는지를 훤히 보았던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 한 함부로 총을 쏘지 못하도록 규정한 샤론의 휴전선언 지침이 일선현장에서 어겨지는 순간이었다. 필자와 함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씽긋 웃었을 이스라엘 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곳 난민 수용소의 장로 격인 유세프 모우사(72)는 “저들은 툭하면 우리 쪽으로 총을 쏴댄다. 우리가 덤불 속에 숨은 토끼로 보이는가”라며 분개한다. 이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충돌 과정에서 이스라엘 병사가 마구잡이로 실탄을 사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또 국제적인 비난의 표적이 되어 왔다. ‘미첼 보고서’도 이스라엘 젊은 병사들에 대해 상부의 통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렇게 꼬집고 있다. “상관의 지도력(senior leadership)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틀 동안의 가자 지구 취재를 마치고 다시 에레즈 검문소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곳 검문소의 한 하사관에게 필자의 칸 유니스 체험담을 항의를 섞어 전했다. 그는 “솔직히 말해 우리 병사들의 신경이 날카로운 게 사실”이라며 사과했다. 지난 9월 말 이후 휴가라곤 가보지 못하고 날마다 긴장 속에 지내다 보니,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얘기다. 휴가를 못 받는 것은 군인뿐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만난 한 이스라엘 경찰은 “지난 96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고 밝힌다.
가자 지구 사람들은 “우리야말로 이스라엘이 가하는 집단적 징벌의 희생자들”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가자 지구 안에서조차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가자 지구를 3등분해 곳곳에 설치한 이스라엘 검문소들 때문이다. 이웃 마을로 가려 해도 길에서 온통 시간을 보내야 한다. “가자 시내로 날마다 통학하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은 적어도 하루 3시간, 많게는 4시간을 합승버스 속에서 그냥 앉아 보낸다.” 칸 유니스 난민 수용소에서 가자 시내로 통학하는 가자 대학 학생 이나야 히키마트(여)의 볼멘소리다. 교차로에서 유대인 정착민이 탄 차량이 한 대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에게 우선권을 주느라 다른 많은 차량들은 길에 세워놓는다는 것이다(가지 지구 도로는 2중으로 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쓰는 전용도로는 팔레스타인 일반도로와 구별되어 있다).
필자도 이런 ‘집단적 징벌’의 쓴맛을 체험했다. 칸 유니스 난민 수용소로 갈 때였다. 지중해를 따라 시원스레 뻗은 길은 가자시 남쪽 유대인 정착촌 파루다롬에 가까이 가서, 병목현상에 걸리고 말았다. 1km 전진하는 데 정확히 1시간이 걸렸다. 난생 겪어보지 못한 지독한 체증이었다. 칸 유니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로변 이스라엘 정착촌과 맞닿은 곳의 감귤밭들은 불도저로 밀려 가로 세로 각 1km쯤의 넓은 광장이 되었다. 다른 한쪽 편 이스라엘 정착촌 주변은 콘크리트 장벽이 늘어서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주장으론, 감귤밭을 불도저로 밀고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한 것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의 총격에서 유대인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팔레스타인 경찰 초소 건물은 이스라엘 탱크의 공격을 받고 완파된 상태였다. 인상적인 것은 콘크리트 잔해 옆에 팔레스타인 깃발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었다. 문득 백기완님이 노래말을 지은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라는 80년대 운동가가 뇌리를 스쳤다.
1993년 오슬로 평화회담 이후 한때 가자시는‘중동의 싱가포르’라는 꿈에 젖은 적이 있다. 부동산 가격도 올라 시내 중심가는 1도놈(1000m2)에 40만∼60만달러까지 치솟았다”고 한 부동산업자는 전한다. 그러나 지금 싱가포르 신화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가자 시내에는 짓다 만 건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지어봐야 분양이 안 될 뿐더러 이스라엘군의 봉쇄로 시멘트 등 원자재를 제대로 댈 수 없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각료 가운데는 ‘물자 장관’(minister of supplies)이란 직함을 달고 일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아부 알리 샤힌(67)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들에 대한 정책 입안과 시행이 그의 임무다. 설탕, 쌀, 식용유, 밀가루, 고기 등의 품목을 다루는 샤힌 장관은 “이스라엘이 엄청난 세금을 매기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보안을 이유로 한 보안 검역세를 포함해 우리는 모두 7가지 세금을 무는 반면, 이스라엘 수입업자는 단 한 가지 세금을 문다”는 얘기다. 샤힌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목줄을 죌 뿐 아니라, 경제적 목줄마저 죄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때문에 가자 지구의 물가가 많이 올랐다. 구매력은 전보다 줄었는데 물가는 올랐으니 서민생활은 이중고다. 샤힌 장관에 따르면 유혈충돌이 있기 전인 지난해 9월의 구매력을 100으로 할 때, 10월 하반기에는 50, 그리고 지금은 20 수준이다. 이스라엘의 봉쇄로 가자 지구 5만 명, 서안 지구 7만 명의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50%로 추산되는 높은 실업률과 불경기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만 갈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일부 젊은이들은 하마스, 회교 성전과 같은 과격단체에 가입함으로써 좌절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봉기) 이래 하마스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는 상당히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가자 지구뿐 아니라 라말라-나블러스-헤브론 등 서안 지구 주요 도시들에서 하마스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갖춘 무장조직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겐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이 글을 쓰는 시각에도 하마스와 회교 성전 쪽에서 각각 조직적인 자살 폭탄공격으로 3명이 죽었다는 뉴스가 들린다.
지중해의 잔잔한 파도, 맑은 물, 30℃의 습기 없는 날씨. 길게 펼쳐진 5, 6월에 가자의 해변은 나무랄 데 없는 휴양지다. 유혈충돌이 벌어지기 전인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이곳 해변은 피서객들로 붐볐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한가로이 햇볕과 수영을 즐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들만이 조개껍질을 갖고 놀 뿐이다.
‘거대한 집단 수용소’. 바로 가자 지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해 9월 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충돌이 벌어진 이래 가자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철저히 봉쇄당한 채 지내왔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그의 몇몇 고위관료들 빼고는 말 그대로 ‘이동의 자유’를 잃었다. 가자와 외부세계를 잇는 관문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지난해 10월 초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에레즈 관문이, 12월에는 이집트로 이어지는 라파 관문이 닫혔다. 가자 국제공항도 지난 1월1일자로 문을 닫았다. 아라파트 수반이 아랍정상회담 등 외국 나들이를 하려면 자동차로 이집트령인 시나이 반도로 건너가, 다시 헬기를 타고 카이로 공항으로 옮겨가야 하는 처지다. 그나마 아라파트 일행에겐 이스라엘이 예외로 대우(?)를 해주는 셈이다.
예루살렘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쯤 달리면 가자의 관문인 에레즈 검문소가 나온다. 유럽지역 국경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검문소다.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이곳은 예루살렘-텔아비브-하이파 등의 이스라엘 쪽으로 일하러 가는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유엔 등 국제기관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나 출입이 가능하다. 필자가 이곳 에레즈에 닿았을 때도 검문소에서 일하는 이스라엘 병사들말고는 인적이 드물어 썰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자 지구는 지중해를 따라 길게 직사각형으로 뻗은 360km2의 좁은 회랑이다. 지난 67년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이집트 관할이었다. 아마도 지금 지구상에서 가자 지구만큼 생활공간의 배분이 불평등하게 이뤄진 곳은 없을 듯하다. 12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가자 지구의 3분의 2에 몰려 사는 반면, 불과 6000명의 유대인 정착민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점유면적은 너무나 차이가 난다. “바로 이 6000명의 정착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2만 명의 이스라엘 병력이 이곳에 주둔하며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리누르고 있다.” 가자 시내 이슬람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무하마드 타예브(23·영문학)의 말이다.
지난 93년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출범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도인 가자 시내에서 난민을 만나기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자 지구 120만 주민 가운데 80만이 난민이다. 이 가운데 44만 명이 8개의 난민 수용소에서 살고 있다. 흔히 ‘난민 수용소’ 하면 임시 주거용 천막을 떠올리지만 이들은 난민이 된 지 50년이 넘은 만큼 일반주택에서 살고 있다. 유엔의 팔레스타인난민구호자활기구(UNRWA)는 ‘1946년 6월~ 1948년 5월에 집과 생활수단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을 난민으로 본다. 이들은 이른바 ‘이스라엘 독립전쟁’의 희생자다. 많은 경우 이들은 당시 살던 집의 문서와 열쇠를 지금껏 갖고 있으면서 언젠가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문제는 중동 평화협상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다. UNRWA의 집계로는 가자 지구 80만, 서안 지구 57만을 합쳐 137만 명의 난민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웃 국가들로 피신한 난민 숫자를 합하면 크게 불어난다. 요르단에 151만, 레바논 37만, 시리아 37만을 합하면 팔레스타인 난민은 360만 명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당국도 UNRWA에 등록하지 않은 난민이 150만 명쯤 된다고 밝힌다. 그럴 경우 51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중동 지역에 퍼져 있는 셈이다. 50년 당시 유엔은 팔레스타인 난민 숫자를 96만 명으로 발표했다.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증가한 셈이다.
팔레스타인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지금껏 가자 지구에서만 모두 195명이 숨졌다. 이스라엘인을 뺀 팔레스타인인 전체 희생자는 지난 5월25일 현재 496명이다. 최근 발표한 ‘미첼 보고서’는 이스라엘군이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대에 지나치게 대응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여기에다 F-16 전폭기 공습은 국제적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지난 5월22일 아리엘 샤론 총리의 ‘제한된 범위 내 일방적 휴전’ 선언은 위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자 지구에서는 샤론이 휴전 선언을 한 지 몇 시간도 채 안 되어 이스라엘군이 마구잡이 총격을 가해 다수의 부상자가 생겼다. 가자 지구 남단 라파에 자리한 야브나 난민 수용소에선 이스라엘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23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4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군의 발표와 관련한 필자의 체험담 하나. 가자시에서 40km쯤 떨어진 칸 유니스 난민 수용소에 갔을 때다. 이곳은 8만5000여 명의 난민이 모여 사는데, 최근 몇 달 동안 이스라엘군과의 충돌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난 곳이다. 집을 잃은 난민은 오스트리아 국제구호기관이 보내준 천막에서 지내고 있었다. 50년 전 막 난민이 되었을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마유다(65) 부인은 남편인 술라만 아부 알바이다(70·농부)를 2개월 전에 떠나보내고 텐트 안에서 시름겨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형체는 간 곳 없고 그냥 시멘트 덩어리뿐인 집을 배경으로 그녀의 사진을 몇 장 찍는 순간 총 소리가 들렸다. 바로 100m 떨어진 곳에 전진 배치한 이스라엘 초소에서 우리를 향해 쏜 것이었다. 소리로 보아 최소한 5발이었다.
이스라엘 병사는 그들이 가진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필자가 뭘 하는지를 훤히 보았던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 한 함부로 총을 쏘지 못하도록 규정한 샤론의 휴전선언 지침이 일선현장에서 어겨지는 순간이었다. 필자와 함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씽긋 웃었을 이스라엘 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곳 난민 수용소의 장로 격인 유세프 모우사(72)는 “저들은 툭하면 우리 쪽으로 총을 쏴댄다. 우리가 덤불 속에 숨은 토끼로 보이는가”라며 분개한다. 이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충돌 과정에서 이스라엘 병사가 마구잡이로 실탄을 사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또 국제적인 비난의 표적이 되어 왔다. ‘미첼 보고서’도 이스라엘 젊은 병사들에 대해 상부의 통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렇게 꼬집고 있다. “상관의 지도력(senior leadership)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틀 동안의 가자 지구 취재를 마치고 다시 에레즈 검문소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곳 검문소의 한 하사관에게 필자의 칸 유니스 체험담을 항의를 섞어 전했다. 그는 “솔직히 말해 우리 병사들의 신경이 날카로운 게 사실”이라며 사과했다. 지난 9월 말 이후 휴가라곤 가보지 못하고 날마다 긴장 속에 지내다 보니,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얘기다. 휴가를 못 받는 것은 군인뿐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만난 한 이스라엘 경찰은 “지난 96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고 밝힌다.
가자 지구 사람들은 “우리야말로 이스라엘이 가하는 집단적 징벌의 희생자들”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가자 지구 안에서조차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가자 지구를 3등분해 곳곳에 설치한 이스라엘 검문소들 때문이다. 이웃 마을로 가려 해도 길에서 온통 시간을 보내야 한다. “가자 시내로 날마다 통학하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은 적어도 하루 3시간, 많게는 4시간을 합승버스 속에서 그냥 앉아 보낸다.” 칸 유니스 난민 수용소에서 가자 시내로 통학하는 가자 대학 학생 이나야 히키마트(여)의 볼멘소리다. 교차로에서 유대인 정착민이 탄 차량이 한 대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에게 우선권을 주느라 다른 많은 차량들은 길에 세워놓는다는 것이다(가지 지구 도로는 2중으로 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쓰는 전용도로는 팔레스타인 일반도로와 구별되어 있다).
필자도 이런 ‘집단적 징벌’의 쓴맛을 체험했다. 칸 유니스 난민 수용소로 갈 때였다. 지중해를 따라 시원스레 뻗은 길은 가자시 남쪽 유대인 정착촌 파루다롬에 가까이 가서, 병목현상에 걸리고 말았다. 1km 전진하는 데 정확히 1시간이 걸렸다. 난생 겪어보지 못한 지독한 체증이었다. 칸 유니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로변 이스라엘 정착촌과 맞닿은 곳의 감귤밭들은 불도저로 밀려 가로 세로 각 1km쯤의 넓은 광장이 되었다. 다른 한쪽 편 이스라엘 정착촌 주변은 콘크리트 장벽이 늘어서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주장으론, 감귤밭을 불도저로 밀고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한 것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의 총격에서 유대인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팔레스타인 경찰 초소 건물은 이스라엘 탱크의 공격을 받고 완파된 상태였다. 인상적인 것은 콘크리트 잔해 옆에 팔레스타인 깃발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었다. 문득 백기완님이 노래말을 지은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라는 80년대 운동가가 뇌리를 스쳤다.
1993년 오슬로 평화회담 이후 한때 가자시는‘중동의 싱가포르’라는 꿈에 젖은 적이 있다. 부동산 가격도 올라 시내 중심가는 1도놈(1000m2)에 40만∼60만달러까지 치솟았다”고 한 부동산업자는 전한다. 그러나 지금 싱가포르 신화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가자 시내에는 짓다 만 건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지어봐야 분양이 안 될 뿐더러 이스라엘군의 봉쇄로 시멘트 등 원자재를 제대로 댈 수 없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각료 가운데는 ‘물자 장관’(minister of supplies)이란 직함을 달고 일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아부 알리 샤힌(67)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들에 대한 정책 입안과 시행이 그의 임무다. 설탕, 쌀, 식용유, 밀가루, 고기 등의 품목을 다루는 샤힌 장관은 “이스라엘이 엄청난 세금을 매기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보안을 이유로 한 보안 검역세를 포함해 우리는 모두 7가지 세금을 무는 반면, 이스라엘 수입업자는 단 한 가지 세금을 문다”는 얘기다. 샤힌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목줄을 죌 뿐 아니라, 경제적 목줄마저 죄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때문에 가자 지구의 물가가 많이 올랐다. 구매력은 전보다 줄었는데 물가는 올랐으니 서민생활은 이중고다. 샤힌 장관에 따르면 유혈충돌이 있기 전인 지난해 9월의 구매력을 100으로 할 때, 10월 하반기에는 50, 그리고 지금은 20 수준이다. 이스라엘의 봉쇄로 가자 지구 5만 명, 서안 지구 7만 명의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50%로 추산되는 높은 실업률과 불경기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만 갈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일부 젊은이들은 하마스, 회교 성전과 같은 과격단체에 가입함으로써 좌절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봉기) 이래 하마스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는 상당히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가자 지구뿐 아니라 라말라-나블러스-헤브론 등 서안 지구 주요 도시들에서 하마스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갖춘 무장조직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겐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이 글을 쓰는 시각에도 하마스와 회교 성전 쪽에서 각각 조직적인 자살 폭탄공격으로 3명이 죽었다는 뉴스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