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정부와의 차별성을 추구하며 팔레스타인 문제에 유보적 입장을 취해 온 미국 부시 행정부가 적극 개입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동안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중동평화라는 큰 틀 속에서 비교적 많은 성과를 이뤄왔다. 그러나 지난해 현재의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이 야당 시절 예루살렘 알아크사 사원(템플 마운트)을 방문한 시점에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들 간 폭력사태가 발생해 아랍인들이 이를 2000년 인티파다(민중봉기)로 명명한 이래 지금까지 사태가 악화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 부시 정부는 조지 미첼 전 상원의원이 이끄는 미첼 위원회(국제진상조사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를 승인하고 평화협상 재개를 위한 중동 특사를 임명했다.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폭력사태 종식을 요구하는 미첼 보고서는 아랍과 이스라엘 양측을 비롯하여 국제사회에서 매우 우호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양측의 상호 신뢰구축과 평화협상 진전을 다시 한번 기대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민족분쟁 또는 종교분쟁으로 등식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7세기 이슬람 시대 이전부터 아랍인과 유대인은 서로 공존해 왔으며, 이슬람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가진 소수집단으로 이슬람교도, 곧 무슬림들과 함께 복합사회를 이뤄왔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중동지역은 성서와 역사가 함께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이를 근거로 성서의 아담 이후 노아, 쉠(셈)의 후손이 아브라함(Abraham)임을 알 수 있다. 다시 아브라함은 이쉬마엘(이스마일)과 이삭이라는 형제를 두었으며, 각각 오늘날 아랍인과 유대인의 선조가 되었다. 기원 전 11∼10세기경 이삭의 후손 다윗(David)은 현 팔레스타인 지역의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Zion) 언덕에 왕궁을 세워 당대의 번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 전 604년에 바빌로니아왕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핍박받은 유대인들의 해외 이주와 본격적인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헝가리 유대인인 헤르츨(Theodor Herzl)을 중심으로 고대 왕국을 그리워하는 시온주의(Zionism) 운동이 태동하여, 유대인 국가(The Jewish State) 건설이라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 후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초대 총리를 지낸 벤 구리온은 오스만 통치 말기부터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시키려던 국가 건설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918년 당시 이 지역의 인구는 약 70여만 명으로, 이중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8% 정도인 5만6000명이었다. 이때만 해도 아랍인은 전체 인구의 92%를 점유했으나 1948년 국가 수립 당시에는 전체 인구가 22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중 유대인은 전체의 35%를 점유하는 약 76만 명으로 늘어났다. 결국 이러한 유대인 이주문제가 팔레스타인 주민, 즉 아랍인들의 거센 반발로 나타났다. 유대인은 아랍인들에게 기독교와 유럽문화를 대변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식민제국주의의 한 요소로 응어리진 민족감정의 저항의식을 가지게 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영국은 전략적 차원에서 대립관계에 있는 아랍민족과 시온주의자(유대인)들과 각각 공조체제를 유지하여 오스만제국의 붕괴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아랍측과는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유대인들과는 ‘발포어 선언문’을 통해 양측에 별도로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였으나, 실제로 영국은 전후에 이 지역을 위임 통치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의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유엔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1947년 11월29일 유엔 총회에서 독립 아랍국가와 유대인 국가로의 분할을 결정하였다. 유대인들은 유엔 분할결의를 받아들여 다음해인 1948년 5월14일 국가 수립을 선포해 이스라엘을 탄생시켰다. 반면 아랍인 거주자들은 이를 찬성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으며 이스라엘 독립은 자신들에게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주창한 단일 통일 대아랍국가 건설이라는 범아랍주의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한 국가건설의 기회를 상실케 하였으며,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비국가단체인 팔레스타인 간 관계로 고착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후 ‘아랍-이스라엘’이라는 의미는 퇴색하였으며, 그 대신 ‘팔레스타인 민족’이라는 의미가 정립되어 나갔다. 이러한 연장선상에 1964년 PLO를 창설하였으며, 1969년에는 군사조직인 ‘파타’(승리)의 지도자인 아라파트가 PLO 의장에 선출되어 사실상 팔레스타인의 리더가 되었다.
그러다 냉전시대의 종식과 함께 중동문제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74년 11월22일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치적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더욱 큰 변화는 1988년 PLO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자체 선포하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평화협상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 결과 1991년 10월31일 마드리드 중동 평화협상이 개시되었고, 2년 후인 1993년 8월29일 마침내 PLO와 이스라엘 간 점령지 내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평화안’에 도달하였다. 이로써 PLO와 이스라엘은 상호 존재와 대표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포괄적인 중동 평화협상을 중재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은 1996년에 자치정부를 수립해, 최초의 자치정부 수반으로 아라파트를 선출하였다. 1998년에는 ‘와이리버협정’(Wye River Memorandum)을 체결해 팔레스타인 자치를 더욱 확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협상 진전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매우 희망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해에 발생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폭력사태는 그동안 구축해 온 평화문화에 분명 위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미첼 보고서를 계기로 부시 정부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 개입을 선언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이끄는 아라파트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와 함께 현 상황에서 최소한의 결론을 도출하려는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더구나 현재 요르단-시리아 등 대부분의 주변 아랍국 지도자들은 세대가 교체되어 과거와 같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국제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미국으로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주변국 협조를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다는 환경적 변화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갖는 의구심은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착촌 건설 활동은 중동 평화회담이 급속히 진전되는 상황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과거 유대인들이 단계적 이주정책을 통해 국가를 수립했던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잊지 못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이 자신들의 독립국가 수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한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문명 간 대화의 해’다. 지난해 3월5일에는 교황청이 ‘회상과 화해-과거 교회의 범죄’라는 공식 문건을 공개하고 십자군 원정으로 많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이 희생했음을 참회하여 처음으로 가톨릭의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교황은 같은 달 22일 베들레헴을 방문하여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교황은 또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과 중동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며 “이제 가톨릭과 유대교 사이의 편견을 끝내자”고 촉구했다.
이러한 문명-종교 간 관용과 화해는 인류가 해결해야 할 21세기 주요 과제다.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은 중동 평화정착과 함께 인류의 비전에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중동평화라는 큰 틀 속에서 비교적 많은 성과를 이뤄왔다. 그러나 지난해 현재의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이 야당 시절 예루살렘 알아크사 사원(템플 마운트)을 방문한 시점에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들 간 폭력사태가 발생해 아랍인들이 이를 2000년 인티파다(민중봉기)로 명명한 이래 지금까지 사태가 악화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 부시 정부는 조지 미첼 전 상원의원이 이끄는 미첼 위원회(국제진상조사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를 승인하고 평화협상 재개를 위한 중동 특사를 임명했다.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폭력사태 종식을 요구하는 미첼 보고서는 아랍과 이스라엘 양측을 비롯하여 국제사회에서 매우 우호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양측의 상호 신뢰구축과 평화협상 진전을 다시 한번 기대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민족분쟁 또는 종교분쟁으로 등식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7세기 이슬람 시대 이전부터 아랍인과 유대인은 서로 공존해 왔으며, 이슬람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가진 소수집단으로 이슬람교도, 곧 무슬림들과 함께 복합사회를 이뤄왔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중동지역은 성서와 역사가 함께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이를 근거로 성서의 아담 이후 노아, 쉠(셈)의 후손이 아브라함(Abraham)임을 알 수 있다. 다시 아브라함은 이쉬마엘(이스마일)과 이삭이라는 형제를 두었으며, 각각 오늘날 아랍인과 유대인의 선조가 되었다. 기원 전 11∼10세기경 이삭의 후손 다윗(David)은 현 팔레스타인 지역의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Zion) 언덕에 왕궁을 세워 당대의 번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 전 604년에 바빌로니아왕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핍박받은 유대인들의 해외 이주와 본격적인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헝가리 유대인인 헤르츨(Theodor Herzl)을 중심으로 고대 왕국을 그리워하는 시온주의(Zionism) 운동이 태동하여, 유대인 국가(The Jewish State) 건설이라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 후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초대 총리를 지낸 벤 구리온은 오스만 통치 말기부터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시키려던 국가 건설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918년 당시 이 지역의 인구는 약 70여만 명으로, 이중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8% 정도인 5만6000명이었다. 이때만 해도 아랍인은 전체 인구의 92%를 점유했으나 1948년 국가 수립 당시에는 전체 인구가 22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중 유대인은 전체의 35%를 점유하는 약 76만 명으로 늘어났다. 결국 이러한 유대인 이주문제가 팔레스타인 주민, 즉 아랍인들의 거센 반발로 나타났다. 유대인은 아랍인들에게 기독교와 유럽문화를 대변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식민제국주의의 한 요소로 응어리진 민족감정의 저항의식을 가지게 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영국은 전략적 차원에서 대립관계에 있는 아랍민족과 시온주의자(유대인)들과 각각 공조체제를 유지하여 오스만제국의 붕괴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아랍측과는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유대인들과는 ‘발포어 선언문’을 통해 양측에 별도로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였으나, 실제로 영국은 전후에 이 지역을 위임 통치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의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유엔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1947년 11월29일 유엔 총회에서 독립 아랍국가와 유대인 국가로의 분할을 결정하였다. 유대인들은 유엔 분할결의를 받아들여 다음해인 1948년 5월14일 국가 수립을 선포해 이스라엘을 탄생시켰다. 반면 아랍인 거주자들은 이를 찬성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으며 이스라엘 독립은 자신들에게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주창한 단일 통일 대아랍국가 건설이라는 범아랍주의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한 국가건설의 기회를 상실케 하였으며,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비국가단체인 팔레스타인 간 관계로 고착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후 ‘아랍-이스라엘’이라는 의미는 퇴색하였으며, 그 대신 ‘팔레스타인 민족’이라는 의미가 정립되어 나갔다. 이러한 연장선상에 1964년 PLO를 창설하였으며, 1969년에는 군사조직인 ‘파타’(승리)의 지도자인 아라파트가 PLO 의장에 선출되어 사실상 팔레스타인의 리더가 되었다.
그러다 냉전시대의 종식과 함께 중동문제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74년 11월22일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치적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더욱 큰 변화는 1988년 PLO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자체 선포하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평화협상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 결과 1991년 10월31일 마드리드 중동 평화협상이 개시되었고, 2년 후인 1993년 8월29일 마침내 PLO와 이스라엘 간 점령지 내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평화안’에 도달하였다. 이로써 PLO와 이스라엘은 상호 존재와 대표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포괄적인 중동 평화협상을 중재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은 1996년에 자치정부를 수립해, 최초의 자치정부 수반으로 아라파트를 선출하였다. 1998년에는 ‘와이리버협정’(Wye River Memorandum)을 체결해 팔레스타인 자치를 더욱 확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협상 진전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매우 희망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해에 발생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폭력사태는 그동안 구축해 온 평화문화에 분명 위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미첼 보고서를 계기로 부시 정부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 개입을 선언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이끄는 아라파트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와 함께 현 상황에서 최소한의 결론을 도출하려는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더구나 현재 요르단-시리아 등 대부분의 주변 아랍국 지도자들은 세대가 교체되어 과거와 같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국제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미국으로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주변국 협조를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다는 환경적 변화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갖는 의구심은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착촌 건설 활동은 중동 평화회담이 급속히 진전되는 상황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과거 유대인들이 단계적 이주정책을 통해 국가를 수립했던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잊지 못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이 자신들의 독립국가 수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한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문명 간 대화의 해’다. 지난해 3월5일에는 교황청이 ‘회상과 화해-과거 교회의 범죄’라는 공식 문건을 공개하고 십자군 원정으로 많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이 희생했음을 참회하여 처음으로 가톨릭의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교황은 같은 달 22일 베들레헴을 방문하여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교황은 또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과 중동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며 “이제 가톨릭과 유대교 사이의 편견을 끝내자”고 촉구했다.
이러한 문명-종교 간 관용과 화해는 인류가 해결해야 할 21세기 주요 과제다.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은 중동 평화정착과 함께 인류의 비전에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