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공격수 손흥민이 6월 27일 독일과 경기에서 두 번째 골을 넣고 기뻐하고 있다. [동아DB]
“우리의 월드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독일이 한국보다 매우 강하다. 하지만 공은 둥글다. 후회 없는 경기만 한다면 우리도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믿음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는 기적. 한국이 6월 27일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독일을 2-0으로 제압했다.
러시아월드컵에서 대표팀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신태용 감독은 공공연히 “첫 경기 스웨덴전에 모든 걸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스웨덴을 잡지 못하면 그 뒤 일정도 의미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공들인 스웨덴을 허망하게 놓쳤다. 경기 내내 경직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마침 멕시코가 유력 조 1위 후보인 독일을 꺾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꼬여버렸다. 이어 2차전 멕시코와 경기. 경기력은 한결 나아졌다. 다만 수비수 실수 등이 겹치면서 연속 실점했다. 분위기가 살 만하면 꺾여버리는 안타까운 그림이 반복됐다.
마지막 독일전은 이판사판이었다. 사실 신 감독은 독일전을 뒤로 제쳐놨다. 러시아 현지에서 상황을 살피며 뒤늦게 분석할 심산이었다. 그렇게 선택과 집중에서 제외했던 독일을 잡아버렸다. 4년 전 브라질월드컵 우승국이자 FIFA 랭킹 1위인 최강팀을 말이다. 신태용호를 맞을 귀국장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었다. ‘청문회’가 ‘환영식’으로 바뀌는 건 90분이면 족했다.
01. 스웨덴전에서는 대체 왜 그랬을까
‘진작 이렇게 싸울 것이지.’이번 월드컵 조별리그를 지켜본 대다수 국민의 반응이었을 터다. 스웨덴전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국내 최종 평가전 때부터 줄곧 답답했던 경기력. 그래도 한 건 해주길 바란 지지자들에게 대못을 박은 경기였다. 어설프게 물러나면서 이도저도 아닌 흐릿한 축구가 나왔다. 수비를 충실히 해 선제 실점을 막겠다는 의도야 백번 이해하나, 이 색깔을 그렇게 미련스럽게 끌고 갈 줄이야. 경기 흐름이란 게 90분 내내 일방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좀 더 유연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상대가 그리 강하지 않다면 슬그머니 올라가 맞불을 놓을 법도 했다. 하지만 도리어 엉덩이를 빼며 맥 풀리는 경기를 했다. 월드컵을 뛰어보지 못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많아 경험 부족을 드러낸 건 아닌지 등 온갖 추측까지 하게 했다.
멕시코전, 독일전은 훨씬 개선됐다. 맞춤형으로 준비한 노림수가 적중했다. 공 점유율은 포기하고 물러선다. 독일전도 대부분 시간대를 30~40% 안팎의 점유율로 보냈다. 그 대신 언제든 받아칠 준비가 돼 있어야 했다. 스웨덴전처럼 압박을 시작하는 지점이 뒤로 밀려버리면 모두가 고생이다. 펀치를 날릴 생각은 안 하고 가드만 올리는 격. 그래도 간간이 공격하면서 상대를 움찔하게 해야 주도권이 오가는 시소 싸움이라도 할 수 있다. 이게 독일전에서야 먹혀들었다.
수비진에 변화를 준 신태용호는 악착같이 버텼다. 이후 상대 골대까지 나아가 슈팅으로 마침표를 찍곤 했다. 전설적인 인물들도 호평했다. 영국 BBC에서 실시간으로 경기를 전하던 앨런 시어러는 “한국이 점유율은 낮지만 좋은 기회를 만들고 있다. 매우 잘했다. 날카로워졌다”고 평했다. 그는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한 전설적인 선수다. 독일전을 이렇게 잘해내고 나니 스웨덴전이 더욱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만약’이란 건 없지만 말이다.
02. 궁여지책이 베스트 조합이 된 아이러니
손흥민과 구자철이 스웨덴 선수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다. [동아DB]
반면 독일전에서 신태용호가 무실점으로 버틸 수 있었던 데는 김영권-윤영선 등 중앙 수비 조합의 공이 매우 컸다. 경기 초반부터 쏟아진 상대 공세를 적절히 제어했다. 슈팅 각도를 제때 통제하지 못했을 때는 몸을 날리는 투지로 맞섰다. ‘인생 수비’의 비결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이 경기까지 패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간절함이었다.
이 두 선수 모두 제1옵션이 아니었다는 점이 더 흥미롭다. 신태용호는 중앙 수비진 수술이 불가피했다. 믿었던 김민재가 5월 초 K리그1 경기 중 복사뼈 골절상을 입었다. 회복 속도를 높였으나 끝내 힘들다는 소견을 받았다. 김민재가 쓰러진 지 열흘가량 되던 날 신 감독은 당장 러시아로 날아갈 명단을 발표해야 했다. 현장에서 호명한 중앙 수비수 이름이 김영권, 윤영선, 오반석, 정승현 등이었다.
김영권은 지난해 여름 이후 대표팀과 멀어졌다. 8월 말 신태용호의 월드컵 본선행마저 간당간당하던 때였다. 홈에서 이란을 꺾지 않고선 앞날이 불투명했다. 이날 경기력은 기대치를 밑돌았다. 안방 응원에 나선 대규모 팬도 김이 빠졌다. 0-0으로 비기며 최악은 면했으나 경기 직후 문제가 터졌다. 주장 완장을 찼던 김영권이 선수 간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짚으며 “관중 소리가 커서”란 말을 무의식중에 흘렸다. 방송을 탄 인터뷰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난리가 났다. 눈물까지 흘린 속죄에도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김영권은 몇 차례 더 부름을 받았으나, 무너진 멘탈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신 감독은 “정신적인 보호가 필요하다”면서 발탁 제외 배경을 알린 바 있다.
윤영선은 신 감독과 성남일화(현 성남FC) 시절 궁합을 자랑한 선수다. K리그 무대에서는 일찌감치 인정받았으나 대표팀과는 연이 없었다. 런던올림픽에서 성공 시대를 연 김영권, 홍정호, 장현수 등이 그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했기 때문이다. 기회조차 쉬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물며 신태용호에서 경쟁력을 입증해야 할 때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렇게 굴곡을 겪은 둘이 일을 냈다. 최종 명단까지 버텨 막강한 독일을 틀어막았다. 부상자가 없었다면, 혹은 특정 선수가 부진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조합이다. 영국 ‘스카이 스포츠’가 날린 ‘독일은 끝이다. 김영권이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멘트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극한의 상황이 만든 역전 스토리였다.
03. 애물단지 장현수의 수비형 미드필더 점수는?
6월 23일 멕시코와 일전에서 핸드볼 반칙을 범한 장현수. [동아DB]
신 감독의 선택은 또 예상을 벗어났다. 오히려 기존 4-4-2를 그대로 제시했다. 장현수를 한 칸 전진 배치한 그림이 신선하면서도 무모해 보였다. ‘멕시코전 2번의 실점 빌미를 모두 제공한 이 선수를 또 쓰느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실제로 독일과 경기가 시작되기 전 각종 축구 커뮤니티에는 장현수가 대한축구협회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게시물까지 심심찮게 올라왔다.
대한축구협회 측은 멕시코전 직후 장현수를 믹스트존이 아닌 다른 통로로 나가게 했다. 취재진과 만나 심정을 밝히는 대신 침묵으로써 선수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장현수 카드로 또다시 경기를 망친다면 신 감독도 자칫 곤란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또 썼다. 장현수에게 정우영과 짝 맞춰 중원을 지키라는 임무를 내렸다. 수비 시에는 중앙 수비 둘 사이로 내려와 진영을 촘촘히 하라는 추가 지시도 있었다.
장현수의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일반 팬들에게는 대표팀에 계속 뽑히기는 하는데 뚜렷한 색깔이 없는 듯한 선수, 하지만 역대 감독들이 꼭 데려가 중용한 선수, 중앙 수비를 주로 보면서 측면 수비도 맡는 선수 정도로 비칠 수 있다.
경희고에 재학 중이던 장현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성장할 뻔했다. 신재흠 연세대 감독은 이 선수의 패스 줄기와 경기를 읽는 능력에 높은 점수를 줘 스카우트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중앙 수비 앞 포지션을 맡겼다. 하지만 상대 공격에 반응하는 속도가 자꾸 늦더란다. 공격 방향에 맞춰 몸을 돌리는 동작이 굼떠 오히려 당하기 일쑤였다. 하는 수 없이 장현수를 후방으로 내렸다. 그래도 공 다루는 발밑 기술은 괜찮으니 차라리 뒤에서 지켜보며 대응하라는 계산이었다. 장현수는 그렇게 청소년대표팀, 올림픽대표팀, 국가대표팀을 모두 지냈다. 이만하면 성공적인 변신이었다.
하지만 믿었던 발밑에 발등을 찍혔다. 수비수로서 갖춰야 할 안정감이 바닥을 드러낼 때가 종종 있었다.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기존 기술도 잘 나오지 않았다. 월드컵 같은 큰 무대에서는 더욱 심하게 티가 났다. 스웨덴전이 대표 사례다. 장현수는 목적이 불분명한 패스를 남발하면서 상대 공격진의 먹잇감이 됐다.
신 감독은 그런 장현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중앙 수비가 아닌 중앙 미드필더로 놨다. 장현수가 독일전을 완벽히 해낸 건 아니다. 전반 막판 공 터치 실수 등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래도 공격으로 나가는 작업 등에서 몇 차례 부응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 포기했던 포지션이 장현수에게는 생존 루트로 통한 날이다.
04. 3경기 모두 뛴 조현우는 또 칭찬 세례
독일이 6번이나 유효 슈팅을 기록했지만 골키퍼 조현우의 선방을 넘지 못했다. [유튜브 캡처]
어쩌면 조현우의 깜짝 등장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보통 수비가 강한 팀은 상대 슈팅을 미리 차단한다. 공격수가 1차 압박에 나서고, 미드필더진이 그 뒤를 받친다. 이 방어막이 다 뚫린 다음에야 수비진 전후로 슈팅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스웨덴, 멕시코, 독일 모두 대표팀의 압박을 곧잘 통과했다. 이어 골대 쪽으로 수차례 슈팅을 날렸다.
조현우는 이를 착실히 쳐냈다. 결과를 바꾸는 선방을 제법 해냈다. 선수들이 말하는 ‘골이다 싶은 슈팅을 막아내는 게 진짜 잘하는 골키퍼’란 이상에 부합했다. FIFA 선정 독일전 최우수선수로 꼽힌 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지컬 면에서 상대 공격수와 잘 싸울 수 있는 몸은 아닐지라도, 긴 팔과 빠른 반사신경으로 선방 쇼를 벌였다. 이날 경기를 관전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출신 명수비수 리오 퍼디낸드는 본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엄청난 센스다. 한국 골키퍼여, 끝까지 가자’라는 응원 메시지까지 남겼다.
어디서 이런 복덩이 골키퍼가 나타났을까. 이운재 이후 전적으로 믿을 골키퍼가 많지 않았음을 떠올리면 더욱 반갑다. 조현우는 청소년대표팀을 지내며 그 연령대에서 인정받아온 선수다. 실제로 2015~2017년 3번의 시즌에서 모두 K리그 베스트 11, 골키퍼로 꼽혔다. 하지만 그러다 사라진 천재가 한둘이 아니듯,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딱 1명에게만 주어지는 특수 포지션이란 점에서 행운을 포함해 모든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했다. 그럼에도 조현우는 순식간에 빛을 잃는 영재들과는 달랐다. 조현우 소속팀인 대구FC의 조광래 단장이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한 말이 있다.
“조현우, 더 지켜보이소. 틀림없이 더 큽니더.”
이청용, 고요한 등을 키우며 ‘조광래 유치원’이란 말까지 만들어낸 그가 또 하나의 꿈나무를 지목한 것이다. 숱한 프로선수들을 거쳐왔으면서도 “조현우처럼 매 훈련 진지하게 땀 흘린 선수를 본 적이 없다”고 치켜세웠을 정도다. 성실하고 겸손하니 꺼져가는 듯하던 불도 다시 살아났다.
2015년 11월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조현우는 정확히 2년이 지난 2017년 11월 세르비아를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갖는 감격을 누렸다. 그랬던 그가 반년 만에 국가대표팀 주전 수문장으로 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를 모두 소화했다. 페널티킥 2골을 포함해 총 3실점이란 준수한 성적표를 내면서 또 다른 목표에 도전한다. 조현우가 직접 언급한 다음 페이지는 유럽이다. 세계적 선수들이 즐비한, 박진감 넘치기로 소문난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다.
05. 잇몸으로 싸운 공격진에도 박수를
독일 골문은 열릴 듯 말 듯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군 골문은 잘 지켰으나 적군 골문을 좀처럼 열지 못했다. 믿었던 손흥민마저 속 시원히 풀어내지 못했다. 신태용호가 부상자 속출에 치인 건 익히 알려진 사실. 특히 타격이 컸던 부분이 공격이다. 이근호, 권창훈, 염기훈 등 공격수로 쓸 수 있는 옵션이 연달아 무너졌다.경험 부족한 선수들이 감내할 짐이 보통이 아니었다. 황희찬은 졸지에 선발로 한 나라의 최전선을 책임지게 됐다. 문선민과 이승우는 월드컵 직전 처음 대표팀에 발탁돼 러시아까지 날아갔다. 대표팀 분위기가 익숙지도 않은 마당에 A매치를 치르고 꿈의 무대까지 누벼야 했다. 이를 지켜보는 여론의 평가는 박했으니 심적 부담도 상당했다.
신데렐라 탄생까지는 없었다. 순전히 결과만 놓고 보면 손흥민 정도가 위협적인 슈팅을 날리며 골을 만들어냈다. 다만 문선민이 보여줬듯, 여타 공격수들은 잇몸으로 싸웠다. 기술이나 감각은 조금 부족할지라도 한 발 더 뛰면서 상대를 곤혹스럽게 했다. 한 골쯤 넣어줬으면 본인에게나 팀에게나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 자체로도 고생스러운 여정이었다.
놀라웠다. 독일전 한 방에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잘 싸우면서 승리까지 거머쥐었으니 더는 바랄 게 없었다. 1승 2패.
“3전 전패란 예측이 많다. 하지만 통쾌한 반란을 일으키고 오겠다”던 신 감독은 약속을 지켰다. 착실한 준비에 간절함을 더해 색다른 묘미를 자아냈다. 근 몇 년간 한국 축구를 지켜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 몇 안 되는 날 가운데 하나다.
찬물을 끼얹을까 조심스럽지만 승리도 한순간이다. 대표팀이 이번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받은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축구인 사이에선 “신 감독이 폭삭 늙었더라”는 말이 돌았다. 그 바탕에는 멀리 보지 못하고 불 끄기에만 급급하던 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승리’라는 나무가 아닌, ‘더 나은 축구’라는 숲을 살피는 것에 실패한 대가였다. 한국 축구 영웅 박지성과 이영표도 독일전 감격을 잠시 접은 뒤 역설했다. “한국 축구가 정신 차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시스템과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