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급 퍼팅 실력을 갖고 있었던 故 김종필 국무총리. [사진 제공 · 김맹녕]
그는 팔순 때 뇌경색에 따른 하반신 마비 상태에서도 휠체어에 의지해 경기 고양시 뉴코리아컨트리클럽에서 1홀을 돌았다. 1시간 10분이 걸렸지만 풀냄새 짙은 필드에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19년 전 김 전 총리와 경기 여주시 한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했다. 그와 18홀을 돌며 느낀 점은 권위의식이 전혀 없고, 동반자를 편하게 해주며, 복장에서부터 그린 매너까지 영국 신사 스타일의 골퍼라는 것이었다. 가끔 재미있는 유머와 위트 넘치는 해설로 모두를 즐겁게 해 근엄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당시 핸디캡 16이던 김 전 총리는 레슨 없이 독학으로 골프를 배워서인지 독특한 스윙을 갖고 있었다. 팔을 영어 알파벳 U처럼 머리 위로 높이 올렸다 체중을 실어 과감하게 내려쳤다. 공을 치고 나서는 검도 타법처럼 하늘 높이 피니시를 했다. 공은 늘 높은 포물선을 그렸고 그린에 공이 온(on)되면 그 자리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퍼팅은 수준급으로 대부분 투 퍼팅으로 끝냈다. 그의 최고 스코어는 1980년대 중반 경기 파주시 서서울컨트리클럽에서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라운드하며 2언더파를 친 것이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
함께 라운드를 한 날, 날씨가 더워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 먹으면서 파전과 두부김치를 안주 삼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주 마시던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날 김 전 총리로부터 골프에 대한 많은 덕담과 교훈을 얻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故 김종필 국무총리의 친필휘호 ‘白球百想.
골프는 인격 수양에 큰 도움을 준다. ‘골프 스코어가 잘 나오려면 몸에 힘을 빼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능력이나 분수를 넘어서는 과욕은 결국 실패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골프에서도 자주 느끼고 배운다. 골프는 인내력을 키워준다. 사소한 일에 참지 못하고 분노하면 스코어가 금방 나빠진다. 후배 정치인에게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충고를 하는데, 욕심 없이 양보하고 앞자리를 비워주면 결국 이기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런 오묘한 이치가 증명되는 것이 바로 골프다.
김 전 총리의 친필휘호 ‘白球百想’(작고 흰 골프공에 수많은 상념이 담겨 있다)을 볼 때마다 그의 골프 사랑과 철학을 생각해본다. 경기 고양시 한양컨트리클럽 9번과 10번 홀 사이에 문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소복문(笑福門)’이라는 그의 휘호가 붙어 있다. 전반 9홀에서 공이 잘 안 맞았다고 화내지 말고, 후반 9홀을 웃으면서 즐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