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사실 최초의 호민관법은 만약 누군가 평민 의결을 통해 ‘신성한 자’로 공표된 사람을 죽여도 이는 살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 이로부터 나쁘거나 불량한 자를 신성한 자라 부르는 풍습이 유래한다.”
‘호모 사케르’란 말은 페스투스의 논집 ‘말의 의미에 대해서’에 나오는 ‘성산’(聖山·sacermons)이라는 항목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로마법의 ‘신성함’이 최초로 인간의 생명 자체와 결부됐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제는 모호성이다.
대상과 지시가 일대일로 조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해석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정치철학자인 베넷은 ‘용어 그 자체에 함의된 사태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는데, ‘어떤 자에게 신성함을 선언하는 동시에 그를 살해하는 것’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처벌받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자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모순은 한층 첨예해진다. 즉 누군가(제사장이나 지도자)가 신성함을 선언한 특별한 자는 (죄의 여부에 상관없이) 살해될 수 있지만, 모두가 살해할 수 있는 자는 (죄를 지은 자는) 희생물로 바쳐지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은 일종의 면책살해, 혹은 주권자의 의도에 따른 살해에 해당하는 것일 터. 그래도 모순은 여전하다. 과거 교회법과 형법이 혼돈하던 시절에는 신성한 제단에 올려지는 희생으로 살인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 경우라면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과는 모순이다.
이 모순은 ‘어차피 인간은 신의 소유물이므로 굳이 이중으로 제단에 바칠 이유가 없다’는 해석을 이끌어내지만, 그 역시 ‘그를 살해한 자에 대한 사면’과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의 금지’라는 말의 병치를 한꺼번에 설명할 수 없다.
근대에서는 이 문제가 명료하게 정리된다. 이를테면 인간은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는 사법적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의 관타나모에는 사법 시스템의 예외에 속하는 처벌과 처단이 존재한다. 또 다른 한편 ‘용산에서 희생된 철거민의 죽음은 어떤 예외 조항으로 처벌이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사법체계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목숨을 잃게 한 것은 반드시 처벌돼야 한다. 하지만 공무 중이라는 예외가 적용된다. 이 경우 주권의 성격에 문제가 생긴다. 민주주의 사회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시대다. 이 말은 민(民), 즉 백성에게 주권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외를 규정하는 주권은 통치자 혹은 통치권력에 있다. 주권은 투표권자의 투표로 위임되지만, 만약 주권자의 통치가 백성에게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고 고개를 숙이게 만들면(또 그에 익숙하게 만들면) 주권자의 예외규정은 훨씬 넓어진다. 이를테면 파시스트들이 그렇다. 히틀러는 투표에 의해 주권을 위임받았다. 그는 임의로 예외를 규정한다.
아우슈비츠에 들어간 생명들은 희생의 제의로 바쳐질 수도 없는, 그렇다고 사법적 절차로 처단이 필요한 것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 자리한다. 이때 그들을 가스실로 몰고 가도 좋다는 사법적 예외를 규정한 주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앞서 고대 로마에서 살인범과 사형수, 혹은 신의 제물에 대한 혼돈스러움과 다름이 없다.
민주주의는 허약한 구조를 가졌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민주적 의사결정이 가능할 때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통치자에게 위임된 주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 주권의 예외를 규정하는 데 있다. 따라서 주권자는 법의 바깥에 존재한다(예외를 규정하므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법의 안에 존재한다(법으로 규정된 존재이므로). 주권자의 이러한 양면성은 인간을 발가벗긴다. 그렇게 발가벗겨진 생명 그 자체로서의 인간이 바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새물결 펴냄)다. 이 책은 끝까지 인간의 ‘생명’에 천착한다. 발가벗겨진 인간, 혹은 생명에서 시작하는 담론인 셈이다. 이 책은 국내에서 많이 읽힌 책이 아니다.
‘수유 공간 너머’에서 강의되던 것이 암암리에 조금씩 흘러나왔고, 그것이 알음알음 읽히거나 논의됐다. 그러다 2008년 처음 번역물이 나왔다. 출판한 지 1년 반이 지났으나 지난주에 필자의 손에 다시 들어온 이 책이 여전히 ‘초판 1쇄’라는 점에서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솔직히 이 책이 초판 1쇄를 면치 못한 제1의 이유는 난해성이다.
아감벤은 그 난해함과 현학성, 염세성 때문에 독자와 소통이 어려운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4부작 (역자는 3부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4부작이다) 중 한 권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호모 사케르’란 말은 페스투스의 논집 ‘말의 의미에 대해서’에 나오는 ‘성산’(聖山·sacermons)이라는 항목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로마법의 ‘신성함’이 최초로 인간의 생명 자체와 결부됐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제는 모호성이다.
대상과 지시가 일대일로 조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해석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정치철학자인 베넷은 ‘용어 그 자체에 함의된 사태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는데, ‘어떤 자에게 신성함을 선언하는 동시에 그를 살해하는 것’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처벌받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자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모순은 한층 첨예해진다. 즉 누군가(제사장이나 지도자)가 신성함을 선언한 특별한 자는 (죄의 여부에 상관없이) 살해될 수 있지만, 모두가 살해할 수 있는 자는 (죄를 지은 자는) 희생물로 바쳐지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은 일종의 면책살해, 혹은 주권자의 의도에 따른 살해에 해당하는 것일 터. 그래도 모순은 여전하다. 과거 교회법과 형법이 혼돈하던 시절에는 신성한 제단에 올려지는 희생으로 살인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 경우라면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과는 모순이다.
이 모순은 ‘어차피 인간은 신의 소유물이므로 굳이 이중으로 제단에 바칠 이유가 없다’는 해석을 이끌어내지만, 그 역시 ‘그를 살해한 자에 대한 사면’과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의 금지’라는 말의 병치를 한꺼번에 설명할 수 없다.
근대에서는 이 문제가 명료하게 정리된다. 이를테면 인간은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는 사법적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의 관타나모에는 사법 시스템의 예외에 속하는 처벌과 처단이 존재한다. 또 다른 한편 ‘용산에서 희생된 철거민의 죽음은 어떤 예외 조항으로 처벌이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사법체계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목숨을 잃게 한 것은 반드시 처벌돼야 한다. 하지만 공무 중이라는 예외가 적용된다. 이 경우 주권의 성격에 문제가 생긴다. 민주주의 사회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시대다. 이 말은 민(民), 즉 백성에게 주권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외를 규정하는 주권은 통치자 혹은 통치권력에 있다. 주권은 투표권자의 투표로 위임되지만, 만약 주권자의 통치가 백성에게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고 고개를 숙이게 만들면(또 그에 익숙하게 만들면) 주권자의 예외규정은 훨씬 넓어진다. 이를테면 파시스트들이 그렇다. 히틀러는 투표에 의해 주권을 위임받았다. 그는 임의로 예외를 규정한다.
아우슈비츠에 들어간 생명들은 희생의 제의로 바쳐질 수도 없는, 그렇다고 사법적 절차로 처단이 필요한 것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 자리한다. 이때 그들을 가스실로 몰고 가도 좋다는 사법적 예외를 규정한 주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앞서 고대 로마에서 살인범과 사형수, 혹은 신의 제물에 대한 혼돈스러움과 다름이 없다.
민주주의는 허약한 구조를 가졌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민주적 의사결정이 가능할 때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통치자에게 위임된 주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 주권의 예외를 규정하는 데 있다. 따라서 주권자는 법의 바깥에 존재한다(예외를 규정하므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법의 안에 존재한다(법으로 규정된 존재이므로). 주권자의 이러한 양면성은 인간을 발가벗긴다. 그렇게 발가벗겨진 생명 그 자체로서의 인간이 바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새물결 펴냄)다. 이 책은 끝까지 인간의 ‘생명’에 천착한다. 발가벗겨진 인간, 혹은 생명에서 시작하는 담론인 셈이다. 이 책은 국내에서 많이 읽힌 책이 아니다.
<B>박경철</B><BR>의사
아감벤은 그 난해함과 현학성, 염세성 때문에 독자와 소통이 어려운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4부작 (역자는 3부작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4부작이다) 중 한 권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http://blog.naver.com/donodo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