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인들에게 묻는다면 두말없이 카피톨리눔 언덕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실제 높이가 가장 높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다 우러러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으뜸신 유피테르를 비롯해 유노와 미네르바까지 주신 삼총사의 신전을 다 모신 데다,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 같은 막강한 정치 실세들이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사는 동네니 눈이 부셔서라도 감히 올려다보기 힘든 언덕이었을 것이다. 12세기의 여행 가이드북 ‘로마의 기적’에도 이곳이 세상의 머리(caput mundi)여서 ‘카피톨리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유래를 밝히고 있다.
카피톨리눔에 유피테르 신전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509년. 기록으로 남아 있는 로마 최초의 공공건축이다. 소박한 목조 신전이긴 했지만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보다 60년이나 먼저 지어졌다. 그 후 로마 군대가 원정을 떠날 때면 가장 먼저 이곳에서 서원을 올렸고, 전쟁이 끝난 후 개선 행렬이 마지막으로 제사를 올린 곳도 이곳이었다. 유피테르는 웃어른 대접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아울러 카피톨리눔 언덕도 대모신 마그나 마테르 신전을 모신 팔라티노 언덕을 제치고 차츰 정치·종교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그때 로마인들은 언덕 위에서 발치 아래 로마 공회장(forum romanum)을 내려보며 “저기 저 아래에서 우리 창건 시조 로물루스 할아버지가 이웃 사비니 여인들을 업어다가 부하들 숫총각 딱지를 떼주었다지, 아마…” 운운하며 아는 척들을 했을 것이다.
카피톨리눔은 원래 쌍봉 언덕이다. 고대 신전들이 들어섰던 남쪽 언덕에는 지금 콘세르바토리 궁이 널찍하게 자리잡았고, 북쪽 언덕에는 산타마리아 아라코엘리 교회의 위용이 빛난다. 두 언덕을 잇는 허리께가 르네상스 시대에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조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산타마리아 아라코엘리(ara coeli)는 ‘천상의 제단 성모’라는 뜻이다. 일찍이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무녀로부터 “장차 처녀에게서 아기가 하나 태어날 텐데 그가 모든 신들의 제단을 다 허물 것이다”는 예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황제가 그 아기를 위해 천상의 제단을 짓게 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광장 설계를 맡았던 미켈란젤로에게 출처가 아리송한 전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뾰족하게 하늘을 찌르는 교회의 실루엣이 눈엣가시 같았던지 교회의 경관을 꽁꽁 감추는 데만 신경 썼다. 덕분에 지금은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교회가 치맛자락도 안 보인다.
153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한사코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찾았던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다. 네 해 전, 투니스에서 승리를 거두고 한껏 기가 살았던 카를 5세는 내친김에 고대의 개선장군을 흉내내려 했던 모양이다. 또 고대 로마 황제의 권위를 계승해 신성제국의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덕 비탈이 너무 가파르고 뻘밭투성이여서 그는 결국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고 한다.
이 일을 전해들은 교황 바오로 3세는 뒤늦게 카피톨리눔 재건 계획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긴다. 기독 세계의 수장이자 대제사장 교황이 바야흐로 고대 성지의 수복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세상의 배꼽’ 카피톨리눔의 상징적 효용가치에 눈을 떴다는 의미도 된다. 마침 알프스 북쪽에서는 루터가 붙인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불길이 거세던 터라 가톨릭의 존위를 확고히 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우선 라테라노 광장에 서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을 가져와 캄피돌리오 광장 복판에 세웠다. 청동이 귀했던 중세에 불가마에 안 들어가고 살아남은 유일한 로마의 기마 조각이다. 고대 이교 문화라면 사뭇 극악스러웠던 교회에서도 기마상 주인공이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인 줄 알고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광장 복판에 황제 기마상을 세우고 삼면을 바람벽처럼 에워싸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광장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제자인 델라 포르타가 마무리를 맡았다. 1569년 뒤페라크가 미켈란젤로의 설계도면을 보고 베낀 동판화를 살펴보면, 델라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의 시안을 따르지 않고 군데군데 손을 댄 듯하다. 현재의 광장 동쪽 시청사의 중앙 입구와 이층 창문 전체, 그리고 종탑은 완전히 모양이 달라졌고, 남쪽과 북쪽 쌍둥이 건축 정면부의 2층 중앙 개구부도 미켈란젤로의 의도와 어긋나게 시공되어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원안을 무난히 소화해 캄피돌리오 광장을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먼저 서쪽의 완만하게 경사진 계단을 통해 언덕에 오르면 들머리에서 제우스의 쌍둥이 형제인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반겨준다. 이들은 로마인이 역경에 처했을 때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어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영웅들이다.
그리고 동쪽을 바라보면 정면에 로마네스크식 종탑을 얹은 반듯한 시청사가 반갑게 마중 나오고, 왼쪽 카피톨리노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팔라초 누오보와 오른쪽 콘세르바토리 궁이 두 팔을 벌리면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좌우 두 건축물의 종축은 정면 시청사의 정면과 80도 각도로 안쪽을 보고 접혀 있다. 그러니까 광장 공간을 빨래집게처럼 은근히 조이면서 광장 복판에 서 있는 황제 기마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기다란 화살표를 그리는 형국이다.
이처럼 멀쩡한 공간을 가지고 늘였다 조였다 못살게 구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특기다. 이럴 때는 아무리 예술의 거장이라지만 고무풍선을 손에 들고 쥐락펴락 장난치는 개구쟁이 같다. 바람이 빠지는 풍선 주둥이는 서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심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장 전체를 얌전히 두지 않고 들쑤셔 놓았다. 황제 기마상이 서 있는 곳을 정점으로 해서 광장의 바닥면이 불룩하게 들떴다. 정확히 표현하면 달걀 모양의 타원 구체가 지표 위로 살짝 솟아올랐다. 기마상은 흡사 거대한 거북이 등짝 위에 올라선 모양새다. 거북이 등짝은 가장자리로 가면서 조금씩 땅 밑으로 잦아들다가 주위 건축물의 발치에서야 자취를 감춘다. 가장자리 경계는 다시 솟아오르는 계단 세 칸을 크게 둘러 마무리했다. 이러니 광장 어느 곳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다.
미켈란젤로는 왜 언덕 꼭대기 광장 바닥을 새삼스레 불룩하게 돋우어 놓았을까? 1930년 체코의 미술사학자 톨노이는 대우주 자연과 소우주 인간이 서로 만나는 형태라고 이를 설명했다.
“광장의 형태를 결정한 것은 건축이나 예술의 이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의적인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카피톨리눔의 내적 의미를 체험하게 한다. 다름 아닌 ‘세상의 머리’라는 이념이다. 볼록하게 솟은 광장 바닥면은 둥근 지구의 어느 일부가 아니라 스스로 원만한 지구 구형 자체를 나타낸다. 대지는 둥근 제 모습을 감추게 마련이지만 미켈란젤로는 무심히 잊고 살던 인간과 대지의 관계를 불쑥 드러내 보여준다.”
1977년 독일 미술사학자 제들마이어는 둥글게 솟은 광장 바닥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카피톨리눔이 단순한 성지가 아니라 삼라만상이 탄생하는 둥지이자 요람인 ‘세상의 배꼽’(umbilicus mundi)이라는 것이다.
세상 복판에 커다란 배꼽이 있다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가지고 있었다. 아폴론 유적지가 있는 델피에는 지금도 배꼽이 남아 있다. 옛날 올림포스의 맏형 제우스가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아보려고 독수리 두 마리를 반대 방향으로 날려보냈는데, 둘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을 보고 우주의 중심이 여기로구나 하고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델피가 그곳이라고 믿고 솔방울처럼 생긴 큼직한 배꼽(omphallos)을 깎아 숭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테베레 강변의 카피톨리눔 언덕이 로마의 배꼽이 되고,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위용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다시 세상의 배꼽으로 지위가 격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일을 맡기면서 기독 세계의 배꼽이 북쪽 ‘못돼먹은’ 개신교도의 나라 어디쯤이 아니라 바로 이곳 로마 테베레 강변의 카피톨리눔 언덕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달라고 귀띔하지 않았을까?
카피톨리눔에 유피테르 신전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509년. 기록으로 남아 있는 로마 최초의 공공건축이다. 소박한 목조 신전이긴 했지만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보다 60년이나 먼저 지어졌다. 그 후 로마 군대가 원정을 떠날 때면 가장 먼저 이곳에서 서원을 올렸고, 전쟁이 끝난 후 개선 행렬이 마지막으로 제사를 올린 곳도 이곳이었다. 유피테르는 웃어른 대접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아울러 카피톨리눔 언덕도 대모신 마그나 마테르 신전을 모신 팔라티노 언덕을 제치고 차츰 정치·종교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그때 로마인들은 언덕 위에서 발치 아래 로마 공회장(forum romanum)을 내려보며 “저기 저 아래에서 우리 창건 시조 로물루스 할아버지가 이웃 사비니 여인들을 업어다가 부하들 숫총각 딱지를 떼주었다지, 아마…” 운운하며 아는 척들을 했을 것이다.
카피톨리눔은 원래 쌍봉 언덕이다. 고대 신전들이 들어섰던 남쪽 언덕에는 지금 콘세르바토리 궁이 널찍하게 자리잡았고, 북쪽 언덕에는 산타마리아 아라코엘리 교회의 위용이 빛난다. 두 언덕을 잇는 허리께가 르네상스 시대에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조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산타마리아 아라코엘리(ara coeli)는 ‘천상의 제단 성모’라는 뜻이다. 일찍이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무녀로부터 “장차 처녀에게서 아기가 하나 태어날 텐데 그가 모든 신들의 제단을 다 허물 것이다”는 예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황제가 그 아기를 위해 천상의 제단을 짓게 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광장 설계를 맡았던 미켈란젤로에게 출처가 아리송한 전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뾰족하게 하늘을 찌르는 교회의 실루엣이 눈엣가시 같았던지 교회의 경관을 꽁꽁 감추는 데만 신경 썼다. 덕분에 지금은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교회가 치맛자락도 안 보인다.
153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한사코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찾았던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다. 네 해 전, 투니스에서 승리를 거두고 한껏 기가 살았던 카를 5세는 내친김에 고대의 개선장군을 흉내내려 했던 모양이다. 또 고대 로마 황제의 권위를 계승해 신성제국의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덕 비탈이 너무 가파르고 뻘밭투성이여서 그는 결국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고 한다.
이 일을 전해들은 교황 바오로 3세는 뒤늦게 카피톨리눔 재건 계획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긴다. 기독 세계의 수장이자 대제사장 교황이 바야흐로 고대 성지의 수복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세상의 배꼽’ 카피톨리눔의 상징적 효용가치에 눈을 떴다는 의미도 된다. 마침 알프스 북쪽에서는 루터가 붙인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불길이 거세던 터라 가톨릭의 존위를 확고히 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우선 라테라노 광장에 서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을 가져와 캄피돌리오 광장 복판에 세웠다. 청동이 귀했던 중세에 불가마에 안 들어가고 살아남은 유일한 로마의 기마 조각이다. 고대 이교 문화라면 사뭇 극악스러웠던 교회에서도 기마상 주인공이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인 줄 알고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광장 복판에 황제 기마상을 세우고 삼면을 바람벽처럼 에워싸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광장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제자인 델라 포르타가 마무리를 맡았다. 1569년 뒤페라크가 미켈란젤로의 설계도면을 보고 베낀 동판화를 살펴보면, 델라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의 시안을 따르지 않고 군데군데 손을 댄 듯하다. 현재의 광장 동쪽 시청사의 중앙 입구와 이층 창문 전체, 그리고 종탑은 완전히 모양이 달라졌고, 남쪽과 북쪽 쌍둥이 건축 정면부의 2층 중앙 개구부도 미켈란젤로의 의도와 어긋나게 시공되어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원안을 무난히 소화해 캄피돌리오 광장을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먼저 서쪽의 완만하게 경사진 계단을 통해 언덕에 오르면 들머리에서 제우스의 쌍둥이 형제인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반겨준다. 이들은 로마인이 역경에 처했을 때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어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영웅들이다.
그리고 동쪽을 바라보면 정면에 로마네스크식 종탑을 얹은 반듯한 시청사가 반갑게 마중 나오고, 왼쪽 카피톨리노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팔라초 누오보와 오른쪽 콘세르바토리 궁이 두 팔을 벌리면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좌우 두 건축물의 종축은 정면 시청사의 정면과 80도 각도로 안쪽을 보고 접혀 있다. 그러니까 광장 공간을 빨래집게처럼 은근히 조이면서 광장 복판에 서 있는 황제 기마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기다란 화살표를 그리는 형국이다.
이처럼 멀쩡한 공간을 가지고 늘였다 조였다 못살게 구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특기다. 이럴 때는 아무리 예술의 거장이라지만 고무풍선을 손에 들고 쥐락펴락 장난치는 개구쟁이 같다. 바람이 빠지는 풍선 주둥이는 서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심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장 전체를 얌전히 두지 않고 들쑤셔 놓았다. 황제 기마상이 서 있는 곳을 정점으로 해서 광장의 바닥면이 불룩하게 들떴다. 정확히 표현하면 달걀 모양의 타원 구체가 지표 위로 살짝 솟아올랐다. 기마상은 흡사 거대한 거북이 등짝 위에 올라선 모양새다. 거북이 등짝은 가장자리로 가면서 조금씩 땅 밑으로 잦아들다가 주위 건축물의 발치에서야 자취를 감춘다. 가장자리 경계는 다시 솟아오르는 계단 세 칸을 크게 둘러 마무리했다. 이러니 광장 어느 곳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다.
미켈란젤로는 왜 언덕 꼭대기 광장 바닥을 새삼스레 불룩하게 돋우어 놓았을까? 1930년 체코의 미술사학자 톨노이는 대우주 자연과 소우주 인간이 서로 만나는 형태라고 이를 설명했다.
“광장의 형태를 결정한 것은 건축이나 예술의 이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의적인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카피톨리눔의 내적 의미를 체험하게 한다. 다름 아닌 ‘세상의 머리’라는 이념이다. 볼록하게 솟은 광장 바닥면은 둥근 지구의 어느 일부가 아니라 스스로 원만한 지구 구형 자체를 나타낸다. 대지는 둥근 제 모습을 감추게 마련이지만 미켈란젤로는 무심히 잊고 살던 인간과 대지의 관계를 불쑥 드러내 보여준다.”
1977년 독일 미술사학자 제들마이어는 둥글게 솟은 광장 바닥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카피톨리눔이 단순한 성지가 아니라 삼라만상이 탄생하는 둥지이자 요람인 ‘세상의 배꼽’(umbilicus mundi)이라는 것이다.
세상 복판에 커다란 배꼽이 있다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가지고 있었다. 아폴론 유적지가 있는 델피에는 지금도 배꼽이 남아 있다. 옛날 올림포스의 맏형 제우스가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아보려고 독수리 두 마리를 반대 방향으로 날려보냈는데, 둘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을 보고 우주의 중심이 여기로구나 하고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델피가 그곳이라고 믿고 솔방울처럼 생긴 큼직한 배꼽(omphallos)을 깎아 숭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테베레 강변의 카피톨리눔 언덕이 로마의 배꼽이 되고,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위용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다시 세상의 배꼽으로 지위가 격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일을 맡기면서 기독 세계의 배꼽이 북쪽 ‘못돼먹은’ 개신교도의 나라 어디쯤이 아니라 바로 이곳 로마 테베레 강변의 카피톨리눔 언덕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달라고 귀띔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