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병대가 운용하는 현대로템 K808 장갑차. [뉴스1]
사우디 실권자 ‘패싱’한 바이든 대통령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뉴시스]
영국은 1985년, 2006년 전투기 거래의 리베이트 사건을 문제 삼아 당시 사우디 실세이자 ‘아랍의 키신저’로 불리던 반다르 빈 술탄 왕자와 사우디 왕가의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를 수사하기도 했다. 사우디 왕실이 소유한 석유회사에서 나온 예산으로 영국제 전투기를 구매하면서 가격을 부풀려 차액을 조성하고 이를 일부 왕족이 ‘리베이트’로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는 영국 중대비리조사청 수사를 무마해 사우디와 방산계약을 유지했다. ‘정의’와 ‘실리’ 사이에서 200억 파운드(약 31조7000억 원)가 달린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산유대국이면서 전통적으로 미국의 중동 최고 맹방이자 최대 무기 수입국이던 사우디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 때문에 미국에 등을 돌렸다. 지난해 1월 취임 직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의 실질적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의 도덕성을 문제 삼으면서 양국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3년 전 발생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에 빈 살만 왕세자가 개입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게 했고, 취임 후 각국 정상과 연쇄 전화통화에서도 빈 살만 왕세자를 ‘패싱’했다. 앞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허가한 1100억 달러(약 144조 원) 규모의 무기 판매도 취소해버렸다. 빈 살만 왕세자가 반인권적 범죄에 관여하고 불법으로 왕위 계승권을 찬탈했다는 이유에서다.
美-사우디 관계 악화 결정타 사드 철수
한화디펜스의 비호-II 차륜형 대공포(왼쪽) 개념도. [사진 제공 · 한화디펜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 악화 결과는 최근 에너지 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가 폭등하면서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하자 미국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하는 사우디에 석유 증산을 요청했다. 사우디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고, 미국 주도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참여하는 것도 거부했다. 미국에 대한 외교 보복에 나선 것이다.
결국 미국은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급히 사우디에 파견했다. 휴양도시에서 휴가 중이던 빈 살만 왕세자를 찾아가 사과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사우디로부터 석유 증산 수락은 받아냈지만, 이미 틀어진 양국 관계는 쉽사리 회복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정부가 사우디에 1년 동안 보인 적의는 이슬람 문화권의 ‘키사스(Qisas)’,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통에 따라 되갚아야 할 원한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번스 국장이 다녀가고 두 달 뒤인 7월 바이든 대통령을 직접 만나 면전에서 비꼬는 듯한 웃음으로 조롱했다. 카슈끄지 이슈를 꺼내 든 바이든 대통령에게 미군의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포로 학대 사건,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계 미국 언론인 시린 아부 아클레 기자 총격 사건 등을 거론하며 맞받아쳤다.
최근 사우디는 방산 분야에서도 미국과 관계를 전면 재설정하고 있다. 그간 넘쳐나는 오일머니로 미군 사양과 비슷한 최고급 ‘Made in USA’ 장비를 구입해 사용하던, 즉 미 방위산업의 최대 해외 고객이던 사우디가 무기체계 분야에서 ‘아메리카 디커플링’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한 포석으로 사우디는 2017년 빈 살만 왕세자 주도로 설립한 국영방산업체 ‘SAMI’(Saudi Arabian Military Industries) 육성 일정을 대폭 앞당기고 투자 규모도 크게 늘렸다. 2030년까지 전체 무기 구매 예산의 50%를 SAMI에 투자 및 지출한다는 전략이 특히 눈에 띈다. 사우디의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는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의 대사업이다. 당연히 해외 파트너 도움이 절실하다. 지금까지 오일머니로 먹고산 사우디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과 산업 인프라가 있어야 유지·발전할 수 있는 방위산업 기반이 사실상 없다.
“사우디는 독일 무기 필요 없다”
국방과학연구소가 개발한 천궁 지대공미사일 발사 모습. [사진 제공 · 방위사업청]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방산업체들에는 ‘그림의 떡’이 된 사우디 방산 시장이 한국엔 ‘K-방산 유럽 교두보’ 폴란드보다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당장 사우디 육군은 예멘 내전에서 생각보다 형편없는 성능으로 실망감을 안긴 600여 대의 M1A2S 에이브럼스 전차, 2선급 전력인 1300여 대의 M60A3 전차를 대체할 최대 2000여 대 규모의 차세대 전차 도입 계획을 갖고 있다. 노후화된 M2A2 브래들리 보병전투장갑차 400여 대와 M113 계열 3100여 대, AMX-10P 계열 300여 대 등 장갑차 3800대 이상은 물론, M109 계열 자주포 800여 문 등 폴란드에 견줄 만한 엄청난 잠재 수출 물량이 있다. 사우디의 방산 수요는 대공 무기체계나 해군 함정 분야에서도 적잖다. 면면을 살펴보면 M163 ‘발칸’ 자주대공포와 오리콘 GDF 대공포, 보포스 40㎜ 기관포, AMX-30SA 대공전차 등 300문 넘는 대공포와 호크·크로탈·패트리엇 PAC-2 계열을 대체할 수십 개 포대 규모의 방공 무기 소요가 존재한다. 사우디 해군은 미 제5함대 역할을 대신해 이란을 견제하고 페르시아만과 홍해 제해권을 확보하고자 대규모 구축함·잠수함 도입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차세대 무기체계 투자 유력 후보 사우디
한국은 사우디와 정치적으로 적대한 적이 없다. 사우디가 원하는 신뢰도 높은 첨단 무기체계 모델 라인업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사우디의 대규모 군사력 현대화·방산 육성 프로젝트의 가장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약 2000대의 미국제 전차는 한국제 K2 전차로 대체 가능하다. 4000대에 가까운 장갑차는 마찬가지로 한국이 개발한 AS21이나 K808 같은 훌륭한 대안이 준비돼 있다. 300문 이상의 노후 방공포는 이미 비호-II 현지 기술 도입 생산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궁 시리즈 방공 시스템과 한국형 구축함 기술에 대한 양국 간 협력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잘만 하면 사우디라는 부국(富國)을 차세대 무기체계 개발의 든든한 투자자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올가을 예정된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訪韓)은 사우디의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 ‘네옴시티’ 개발이나 원전 수출 같은 경제·산업 분야의 기회로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최근 한국 방산업계의 쾌거인 ‘폴란드 잭팟’의 몇 배 이상 규모가 될지 모르는 ‘사우디 잭팟’의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방산업체들이 자국의 정치적 실책으로 스스로 놓쳐버린 기회를 한국은 잡아야 한다. 정부와 방산업계가 혼연일체로 힘을 모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