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1

2006.11.21

중국 지식인들과 세상을 논하다

사신단에 끼여 베이징행 … 문학·철학·역사 등 주제로 이야기꽃 피우고 담화 내용 책으로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11-20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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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지식인들과 세상을 논하다

    중국 사신단에 자원한 홍대용은 베이징 유리창에서 많은 중국 지식인들을 만나 친분을 맺었다.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행렬을 그린 `‘항해조천도’`의 일부.

    영조 41년 을유년 겨울, 곧 1765년이다. 이해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베이징에 간다. 홍대용 이전에도 사신단(使臣團)은 수없이 많았고, 또 홍대용처럼 공식 사신이 아니라 사신의 자제로서 오로지 중국 유관(遊觀)을 위해 사신단에 끼여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홍대용의 베이징행만이 돌출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베이징행이야말로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학문과 예술, 문학에 거대한 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서른다섯의 젊은 홍대용은 왜 그 멀고 고단한 여로를 마다 않고 베이징으로 가고자 했던가. 아시다시피 그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없었다. 여느 사신의 자제처럼 이국의 산천과 풍물을 즐기고자 하는 관광이었던가. 물론 그렇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베이징에 가서 조선에서 보지 못했던 문물을 즐기려 하는 호기심, 곧 기이한 구경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30대 중반의 조선 지식인 홍대용에게는 기이한 구경을 넘어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중국의 지식인을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심회를 시원하게 토로해보는 것이었다.

    중국 관료들에게 대화 상대 소개 청탁

    1766년 1월1일 홍대용은 조선 사신단의 조회(朝會), 곧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조회가 끝난 뒤 우연히 중국인 관료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눈 홍대용은 중국 관리의 명부인 진신안(縉紳案)까지 구입해 두 사람의 이름이 오상(吳湘), 팽관(彭冠)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열흘을 수소문한 끝에 그는 팽관의 집으로 찾아간다. 팽관의 집에서 오상도 함께 만나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홍대용은 만족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학문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언변과 취미도 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갈증을 느낀 홍대용은 다른 사람을 소개해줄 것을 청한다.

    “귀인들께서는 사례(事例)에 구애되시므로 감히 다시 만나뵈올 기회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아름다운 선비 한 분을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오상, 팽관 두 사람은 한참 상의한 끝에 이런 제안을 한다. 팽관의 말이다.



    중국 지식인들과 세상을 논하다

    청나라 선비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

    “좋은 선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면 유리창(琉璃廠)에 사는 한 벗을 소개해줄 터이니, 찾아가 만나보심이 어떨지요?”

    “그렇게 일러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벗은 누구이며, 또 언제 찾아가야 하는지요?”

    “유리창길 남쪽 미경당(味經堂) 서점에서 26일에 장감생(蔣監生)과 주감생(周監生)을 만날 수 있도록 약속해놓을 것이니, 거기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시는 게 어떨지요?”

    “정말 좋습니다. 장감생과 주감생은 모두 족하(足下)의 친척인지요?”

    “장감생은 친구이고, 주감생은 학도(學徒)입니다.”

    약속대로 홍대용은 1월26일 유리창의 미경당 책방을 찾아간다. 거기서 과연 장본(蔣本), 주응문(周應文), 팽광려(彭光盧) 세 사람을 만난다. 이 세 사람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 ‘담헌서(湛軒書)’의 ‘장주문답(蔣周問答)’이다. 하지만 홍대용은 이들과의 만남에서도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 높은 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

    인연은 이상한 곳에서 맺어지게 마련이다. 2월1일 홍대용과 같이 베이징에 갔던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원시경(遠視鏡), 곧 돋보기를 사기 위해 유리창에 갔다가 중국 선비 둘을 만난다. 그중 한 사람은 근시안경을 낀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문인의 기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기성이 말을 붙였다.

    “나의 친지 중에 안경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장에서 진품 안경을 사기란 참 어렵군요. 족하께서 끼고 있는 안경이 그 사람의 나쁜 눈에 꼭 맞을 것 같으니, 나에게 팔면 어떻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여벌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새로 구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성의 말에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냉큼 안경을 벗어준다.

    “그대에게 안경을 사오라 부탁한 분도 나처럼 눈이 나쁜 모양이구려. 내 어찌 안경 하나를 아까워하겠소. 팔 것까지도 없겠소이다.”

    말을 마치자, 홀홀히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뜬다. 이기성은 남의 물건을 탐내 대가 없이 차지한 꼴이 됐다. 쫓아가 안경을 돌려주며 “농으로 건넨 말입니다. 원래 안경을 원한 사람이 없으니 이 안경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그 사람은 약간 언짢아하면서 “이 물건은 보잘것없는 것이고, 또 동병상련의 뜻이 있는데 그대는 어찌 이처럼 좀스럽게 구는가?” 하며 완강히 거절한다. 이기성이 부끄러워 안경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못하고 그들의 내력을 물으니, 저장성(浙江省)의 거인(擧人)으로 과거를 보려고 막 베이징에 도착해 정양문(正陽門) 밖 건정동(乾淨)에 숙소를 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맺은 인맥과 많은 실학자들 교류

    이기성은 돌아와 홍대용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준다. 홍대용은 두 사람의 거동과 언론에 감탄하고 이기성을 재촉해 건정동으로 그 둘을 찾아간다. 한 사람의 이름은 엄성(嚴誠),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반정균(潘庭均)이었다. 해를 넘겨 서른여섯이 된 홍대용과 서른다섯의 엄성, 스물다섯의 반정균은 그날로 국경을 초월한 벗이 되어 문학과 철학, 역사, 서책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들과의 담화를 기록한 것이 ‘담헌서’의 ‘건정동필담(乾淨筆談)’이다.

    중국 지식인들과 세상을 논하다

    충남 천안시 수신면에 있는 홍대용의 묘.

    건정동에서 홍대용과 엄성, 반정균이 만난 사건은 조선 후기 지성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조선 건국 이후 수많은 조선의 인물이 압록강을 건너 베이징 땅을 밟았지만, 조선의 지식인 개인이 중국의 지식인 개인을 만나 담화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20세기 이후 수많은 한국인, 그리고 한국 지식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밟았지만, 한 사람도 미국 지식인을 만나 담화한 적이 없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이상한 관계가 홍대용 이전의 조선과 중국의 관계였던 것이다. 홍대용은 아마도 중국 지식인을 개인적으로 만난 최초의 경우일 것이다. 1766년 건정동에서 홍대용이 맺은 인맥을 통해 훗날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박지원(朴趾源) 그리고 김정희(金正喜)가 중국의 학자, 문인들과 만나 우정을 쌓고 학문과 문학, 예술을 논할 수 있었다. 이런 접촉이 궁극적으로 조선 후기 학계와 예술계의 변화를 가져왔으니 홍대용과 엄성, 반정균의 만남이야말로 조선 후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홍대용이 장본·주응문 그리고 엄성·반정균을 만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공간이 다름 아닌 유리창이다. 왜 다루(茶樓)와 주점(酒店)이 아니고 유리창이었던가. 홍대용 이전의 사신단은 유리창에 드나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는데 어떤 이유로 홍대용만 유리창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가.

    ‘유리창’은 서적과 골동품 백화점 같은 곳

    지난번 이의현(李宜顯) 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명나라 때부터 조선 사신단은 일단 베이징에 들어가면 사신의 공식 숙소, 곧 회동관(會同館)을 벗어날 수 없었다.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이후로는 조선에 대한 의심이 짙어 조선 사신들의 출입에 대한 감시가 더욱 엄중했다. 그러던 것이 강희제(康熙帝) 말년에 천하가 안정되고 또 조선이 달리 소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금령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약 회동관을 벗어나 유람을 갈 경우 회동관에 사용할 물을 길러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베이징 시내로 나갔다. 물론 공공연하게 회동관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사신단을 따라온 사신의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의 위세를 믿고 실무를 담당하는 역관에게 압력을 넣어 베이징 시내 곳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사고를 일으키면, 역관들이 나서서 회동관에 뇌물을 바치고 묵인해줄 것을 부탁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역관들은 한사코 사신 자제들의 베이징 시내 출입을 막았다. 이것을 아는 홍대용은 미리 뇌물을 준비하고 역관을 설득해 자신이 직접 회동관 아문(衙門)과 교섭해 베이징 시내 출입을 허락받는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뇌물은 통하는 법이 아니던가. 홍대용의 유리창 출입도 뇌물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홍대용의 말을 빌려 유리창의 역사와 모습을 떠올려보자.

    유리창은 유리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다. 무릇 푸르거나 누런 잡색(雜色) 기와와 벽돌이 모두 유리처럼 빛과 윤을 내므로, 궁정에서 쓰는 각색 기와와 벽돌은 유리라는 이름을 붙여 부른다. 그리고 공장 건물을 창(廠)이라 부른다. 유리창은 정양문(正陽門) 밖 서남쪽 5리쯤에 있다. 유리창 가까운 길 양쪽에는 점포가 늘어서 있다. 동쪽과 서쪽에 여문(閭門)을 세우고 ‘유리창(琉璃廠)’이란 편액을 달았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시장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라 한다.

    유리창의 ‘창(廠)’은 원래 공장이란 뜻이다. 위의 공역(工役)이란 수공업을 말하는 것이고, 곧 공장이란 뜻이 된다. 하지만 유리창이 유리벽돌 공장으로 유명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곳은 현재 알려져 있다시피 서적과 서화 골동품 시장이었다.

    유리창의 시장에는 서적과 비판(碑版), 정이(鼎彛)·골동품 등 일체의 기완(器玩)과 잡물(雜物)이 많이 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남방에서 온 수재(秀才)로서 과거를 보고 벼슬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때문에 유리창에서 노니는 사람들 중에 왕왕 명사(名士)도 있다.

    유리창 시장의 길이는 5리 가량이다. 누각과 난간의 호사스러움은 다른 시장에 떨어지지만, 진귀하고 괴이하며 교묘한 물건들이 가득 차 흘러넘칠 정도로 쌓여 있고, 시장의 위치 역시 예스럽고 아름답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마치 페르시아의 보물시장에 들어간 것처럼 단지 황홀하고 찬란한 것만 보일 뿐, 종일 다녀도 한 물건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을 정도다.

    서점은 일곱 곳이 있다. 3면의 벽마다 십몇 층의 시렁을 매었는데, 상아로 만든 책 표찰이 질서정연하고, 모든 책은 책마다 표지가 붙어 있다. 서점 한 곳의 책은 대충 헤아려보아도 수만 권을 넘는다. 얼굴을 들고 한참 보고 있노라면, 책의 제목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어질어질해진다.

    작은 나라 조선에서 온 젊은 선비 홍대용은 유리창의 서화 골동과 서적, 곧 문화상품의 규모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페르시아의 보물시장을 떠올리게 하는 서화와 골동품, 현기증을 일으키는 수만 권의 서적은 그에게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홍대용이 베이징에 갔을 당시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중종과 명종 때 조정에서 서점을 설치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서점은 끝내 출현하지 않았다. 서적에 관한 수요가 적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수요는 있었다. 그 수요를 충족시키고 더 자극할 만한 의지와 정책이 없었던 것이다. 서점 대신 서적 유통을 맡았던 것은 개인적으로 서적 매매를 중개하는, 서적 거간꾼인 서쾌(書)였다. 이 서쾌가 18세기 말까지 서적 유통을 장악했던 것이니, 조선에는 18세기 말까지 특정 공간을 점유한 서점은 없었다.

    이런 판국에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고 판매하는 거대한 서점을 보았으니 홍대용이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음 호에서 홍대용과 유리창에 대해 좀더 언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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