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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위용 특파원의 모스크바 광장에서

시대 바뀌어도 변함없는 ‘줄서기’

  •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시대 바뀌어도 변함없는 ‘줄서기’

“누가 맨 마지막입니까?” 러시아의 극장, 은행, 법률사무소, 등기소, 대형 유통업체, 세차장, 공항 등에서는 이렇게 묻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10월6일 오후, 모스크바 남부 바빌로바 거리의 러시아 국영은행인 스베르방크 공과금 납부창구 앞에서도 그랬다. 영수증과 돈을 손에 쥔 시민들은 은행 직원들의 점심시간이 끝나자 이런 질문을 쏟아내며 긴 줄을 섰다. 비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기 순서를 확인한 다음에야 의자에 앉거나 은행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이들보다 나중에 들어온 시민들의 관심은 역시 긴 줄의 끝을 찾는 일. 수많은 대기자 가운데 자기 바로 앞에서 돈 낼 사람을 찾아야 하기에 한결같이 “누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대기자 순서를 모르고 은행창구 앞으로 직행했다가는 온갖 비난과 욕설을 들을 수 있다. 사회주의 시절 유행했던 줄서기 문화가 자본주의 러시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甲의 처지에서 줄서고, 乙의 입장에서 떵떵거리는 이색 풍경

그런데 요즘의 줄은 사회주의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주로 빵이나 감자를 배급받기 위해 새벽부터 쿠폰을 들고 줄을 섰다. 모스크바 시내에서 만난 타치야나 씨는 “당시의 줄은 국가가 베푸는 복지혜택을 받기 위한 것으로, 힘들어도 사회주의 시민으로서 자부심과 추억을 공유했다”고 떠올렸다.



지금 줄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돈을 지불하는 소비자들이다. 그럼에도 창구 직원들은 사회주의 때와 다름없이 거만한 자세를 보일 때가 많다. 이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기자가 2006년까지 러시아 식당에 가면 직원에게 “당신들이 바쁜데 손님 한 명이 더 와서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정도였다.

모스크바 시내 법률사무소에는 부동산 서류를 들고 공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이들에게 돈을 받는 변호사들은 고객에게 서류의 오류를 지적하며 되돌려 보내기 일쑤다.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공증받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절박한 처지가 금방 이해가 간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갑자기 변한 러시아에는 문서나 등기 없이 부동산을 거래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가짜 문서와 사기 거래가 성행했다.

이 같은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변호사들의 ‘큰소리’가 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사인한 공증문서도 허위인 경우가 많지만, 줄선 사람들은 “문서 없이 거래하는 경우보다는 안전하다”고 믿는다.

러시아 주간지 ‘논증과 사실’은 지난주 모스크바에서 아파트를 갖고 있지만 상속과 유언 없이 사망한 노인이 16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의 아파트는 사기꾼들의 먹잇감이다. 사기꾼들은 이들 아파트의 문서를 허위로 꾸며 팔아치운 뒤 도망가기도 한다.

갑의 처지에서도 줄을 서야 하는 현실이 모스크바 생활의 한 단면인 것이다. 러시아가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인다.



주간동아 2008.10.21 657호 (p73~73)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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