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7

2008.10.21

독도 포퓰리즘의 전형, 복원하고 부수고 복원하고…

경북도, 최초의 독도 한글 영토 표석 부수고 한국산악회에 “철거하겠다” 공문 보내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08-10-15 1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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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포퓰리즘의 전형, 복원하고 부수고 복원하고…
    ‘주간동아’ 651호(2008년 9월2일자)는 리앙쿠르(LIANCOURT)라는 영문이 표시됐다는 이유만으로 독도에 복원해놓은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을 철거해버린 경상북도의 독도 역사 지우기에 대해 보도했다. 그런데 추가 취재에서 더욱 한심한 사실들이 드러났다.

    경북도는 한국산악회에 정식으로 이 표석 철거에 대한 동의를 요청하기도 전에 무단으로 표석을 철거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경북도가 한국산악회에 보낸 공문과 경북도 측의 설명을 통해 확인됐다.

    경북도가 독도에 있던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을 철거한 것은 7월30일. 그런데 경북도는 다음 날인 31일 한국산악회에 ‘이 표석을 변경 설치(철거한다는 뜻)하고자 하오니 귀 산악회의 의견을 회신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이미 변경(철거)을 해놓고 변경(철거)에 대한 산악회의 의견을 물은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경북도 실무자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이사회 의결사항엔 표석 거론 없어

    “일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돼 그렇게 됐다. 공문을 작성해 도지사의 결재를 받는 데 시간이 걸리는데, 그사이 영토 표석이 철거된 것이다. 그래서 산악회에는 표석을 철거한 뒤 공문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공문을 보내기 전 산악회 측에 전화를 걸어 구두로 독도 영토 표석 철거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 실무자의 말도 한국산악회 주장과 대비해보면 앞뒤가 어긋난다. 한국산악회는 회장이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사회를 열어 결정한다. 한국산악회는 매달 상임이사회를 열고, 필요 시 정기이사회를 개최한다. 7월30일 직전 열린 한국산악회의 이사회는 7월24일 열린 제8차 상임이사회와 같은 날 열린 제3차 정기이사회였다.

    그러나 두 이사회 의결사항에는 독도 영토 표석 철거 이야기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경북도 측이 주장하는 사전 구두 동의는 한국산악회 최홍건 회장이나 실무자가 임의로 동의해준 것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자 최 회장은 바쁘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국산악회가 이사회 의결을 통해 사전 동의를 하지 않았는데 경북도가 구두 동의를 받았다며 일방적으로 표석을 철거한 데 대해, 한국산악회에서는 최 회장과 경북도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하다.

    한국산악회의 독도 영토 표석은 독도 영유권 다툼과 관련해 상당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 1952년은 지금보다 훨씬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다툼이 치열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여름 일본은 해상보안청(한국의 해양경찰청에 해당)과 수산청 공무원 등을 독도에 상륙시켜 여러 차례 ‘시마네(島根)현 오치(隱地)군 고가무라(五個村) 다케시마(竹島)’라고 쓴 푯말을 박아넣고 독도에서 조업하던 울릉도 어민들을 쫓아냈다.

    그로 인해 울릉도에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원성이 쏟아져나왔으나, 정부는 북한과의 전쟁 때문에 대처할 수 없었다. 독도는 1945년 광복 당시부터 일본과 영유권 대립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없던 1947년(미 군정기), 조선산악회는 대한민국을 대신해 독도에 들어가 한자로 ‘조선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라고 쓴 푯말을 세웠다.

    1952년 정부는 이러한 조선산악회의 후신인 한국산악회에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는 일을 맡겼다. 그로 인해 한국산악회는 광복절인 8월15일 독도에 영토 표석을 설치하기로 하고 표석을 마련해 출항했으나,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한 미군의 방해와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독도에 상륙하지 못했다.

    1953년 여름이 되자 다시 일본 공무원들은 독도에 상륙해 다케시마 말뚝을 박아놓고 우리 어민을 쫓아내는 일을 반복했다. 그로 인해 말썽이 일자 정부는 한국산악회에 다시 독도 영유권을 확고히 하는 일을 맡겼다.

    그리하여 1953년 10월14일 독도에 상륙한 한국산악회는 그 전해 설치하지 못한 영토 표석을 세웠다. 당시 독도는 국제사회에서 ‘리앙쿠르’로 불렸다. 그래서 한국산악회는 표석 전면에 가장 크게 한글 ‘독도’를 새기고, 이어 작게 한자 ‘獨島’와 영문 ‘LIANCOURT’를 새겼다.

    독도 포퓰리즘의 전형, 복원하고 부수고 복원하고…

    2005년 8월15일 경북도가 복원한 최초의 독도 한글 영토 표석(가운데)과 지난 7월30일 경북도가 부순 이 표석의 빈자리(아래). 맨 왼쪽은 651호 주간동아 기사.

    내년 700만원 들여 조작된 표석 설치

    이 표석은 독도에 세워진 표석 가운데 최초로 한글을 새긴 영토 표석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 이전과 직후에 세워진 한두 개 표석과 비석은 한자 일색이었다. 한국산악회는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글 ‘독도’를 가장 크게 새겨넣었었다.

    그러나 이 표석은 한국산악회가 독도를 떠난 후 그곳에 상륙한 일본 해상보안청 측이 제거해 버렸다. 이로 인해 완전히 잊힌 표석은 2003년,‘주간동아’가 이 표석을 설치할 당시 찍은 사진을 찾아내 공개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그 결과 2005년 8월15일 경북도가 이 표석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올해 미국 의회도서관이 독도 장서 분류 기준을 독도에서 리앙쿠르로 변경하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경북도는 LIANCOURT 대신 ‘DOKDO, KOREA’가 새겨진 표석을 세우기로 하고 복원한 표석 철거를 결정했다.

    그런데 경북도는 한국산악회의 정식 동의도 받지 않고 덜컥 철거부터 했다. ‘포퓰리즘’적 역사 부수기의 전형을 보인 것이다. 경북도는 내년에 700만원을 들여 LIANCOURT 대신 DOKDO, KOREA를 새긴 표석을 세우겠다고 한다.

    역사를 복원하느라 돈 쓰고, 역사를 부수느라 돈 쓰고, 역사를 조작하느라 혈세를 낭비하는 경북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에 장단을 맞춘 한국산악회 수뇌부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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