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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Book

낙원 外

휴가지에서 읽으면 좋은 책

낙원 外

낙원 外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휴가지용 책을 고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미뤄두었던 책을 들고 떠났다가 그냥 돌아오거나, 베스트셀러 목록을 참고했다가 취향에 맞지 않아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돌아오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휴가지에서 읽을 책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그간의 스트레스를 날려 보낼 수 있고 휴가지 풍경에 눈길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만족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책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장편 추리소설 ‘낙원’을 추천한다. 또 추리소설이냐 되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책을 읽어보면 역시 추리소설일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 생각한다.

전작 ‘모방범’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 추리소설계의 대모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책은 ‘모방범’ 사건 9년 후를 다룬다. 9년 전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마에하타 시게코에게 한 중년 여성이 찾아오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중년 여성은 르포라이터인 시게코에게 자신의 죽은 아들이 그렸다는 의문의 그림을 보여주며 그 그림이 최근 일어난 살인사건을 예지했다고 말한다. 호기심을 느낀 시게코는 곧 이에 대한 추적에 나선다. 그림 속 살인은 부모에게 살해된 한 소녀가 16년간 집의 마루 밑에 묻혀 있다 화재로 인해 부모가 자수함으로써 전말이 드러난 사건으로, 범인은 이미 드러난 상태. 범인을 추적하고 범죄 트릭을 맞히는 것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다소 김이 빠지는 전개일 것이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고 어떤 트릭을 썼는지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관심에서 멀다.

그보다 작가는 딸의 죽음을 고백한 부모의 석연치 않은 태도, 즉 자기 손으로 딸을 죽여야 했던 부부의 비극과 이 부부가 비밀을 간직한 채 지낸 16년 동안의 심리를 추적하는 데 주력한다. 이러한 심리 추적과정에서 작가가 관심을 둔 것은 가족관계 속에서 오는 상처와 치유 문제다.



주변의 평범한 가족 애증과 욕망 심리추적

낙원 外

왕상한
‘TV 책을 말하다’ 진행자·서강대 법학과 교수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결국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여성의 이야기와 딸을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부부의 심리, 부모를 두고 벌어지는 자매간의 갈등을 통해 소설은 우리 주변 평범한 이들의 애증과 욕망을 드러낸다. 인간의 이면과 현대사회의 모순을 심도 있게 파헤침으로써 사건이 야기하는 공포를 넘어서는 또 다른 두려움을 생산하는 것이다.

‘낙원’은 가족제도에 대한 의문과 사춘기 시절의 심리, 나아가 교육 및 사회제도 문제까지 폭넓은 소재를 추리소설에 녹여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미야베 미유키 소설이 갖는 힘이자 미덕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 앞에서 지나치게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작가가 묘사하는 인물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혹자는 예지 능력이나, 밝혀진 범인이 시시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그 인물들에게 다가간다면 한순간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휴가지에서 미야베 미유키를 만나야 하는 이유다.

불안

낙원 外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이레 펴냄

언젠가 스페인 친구들이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었다. 유럽의 한 경제 잡지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평균 노동시간을 비교했는데 한국인의 1년 평균 노동시간이 스페인 사람보다 무려 1000시간이 많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환경에서 내가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염려됐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1년에 최소 한 달에서 길게는 석 달까지 휴가가 주어지는 유럽과 우리의 실정은 큰 차이가 있고 그들이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었다.

1년에 보통 일주일, 경우에 따라서는 사나흘 주어지는 우리의 휴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 고생스런 배낭여행을 하든, 쇼핑을 목적으로 뉴욕 파리 같은 대도시를 누비든, 또는 남도의 외딴섬에서 시간이 멈춘 듯 지내든 우리는 모두 그 휴식을 통해 일상에서 빼앗긴 에너지를 충전하고 한층 나아진 자신을 찾고 싶어한다. 내 경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디에서 어떻게 휴가를 보내든 늘 한 손에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책을 한 권 들고 떠난다.

성공과 행복 달성 불안감 실체 들여다보기

낙원 外

손미나
방송인·‘스페인 너는 자유다’ 저자

혹시나 휴가지에서 심오한 이론이 담긴 경제서나 역사책을 읽겠다고 한들 비난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볼 때 그런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가벼운 책을 읽을 경우 일에 얽매여 지내는 동안 느꼈던 이유 모를 허전함을 채우긴 어렵다.

도대체 어떤 책을 여행가방에 담아 가야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누군가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뻔하다. 알랭 드 보통을 만나라! 가벼운 소설을 가장한 철학서 혹은 역사서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그야말로 알이 꽉 찬 그의 책은 읽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게 할 만큼 정신을 집중시킬 뿐 아니라, 책을 덮는 순간 허무함 대신 감당 못할 충만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알랭 드 보통다운’ 책을 꼽으라면 ‘불안’이 아닐까 싶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사회적인 성공에 대한 욕망과 그에 따른 불안, 그 이유를 분석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이 책은 정신의 재충전에 완벽히 들어맞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을 얼마나 버는가, 또 어떤 사회적 지위를 얻는가에 따라 행복이 정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사회, 이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을 느끼지만 과연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 지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안감을 없애주는가? 알랭 드 보통은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신약성서에서 20세기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꼽히는 철학과 문학 거장들의 작품을 아우르며 가볍지 않은 해석을 펼쳐낸다.

해박한 지식, 남다른 위트,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에 대한 맛보기와 저자의 독특한 개성, 게다가 풍부한 시각자료까지 담긴 이 책보다 완벽한 휴가 파트너가 또 있을까.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낙원 外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문학동네 펴냄

비행기에서 읽기 좋은 책은 내겐 늘 하루키의 책이었다. 골치 아픈 형용사도 없고 긴 문장도 없어, 건조하고 답답한 비행기 안에 조금의 여유를 준다. 그런데 하루키는 앤티크 같아서 새로운 느낌이 들진 않는다. 그러던 중 읽고 나면 머릿속에 차가운 바람을 불게 할 연애소설 한 권을 발견했다. 제목에도 ‘바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바람둥이’ ‘바람피운다’와도 일맥상통하는 이른바 ‘불륜소설’ 되시겠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재미있는 건, 그럼에도 이 소설은 유쾌 상쾌 통쾌하게 읽힌다는 사실이다. 불륜을 말하되 ‘섹스’가 제거된 ‘플라토닉’한 사이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천만에. 유쾌한 느낌을 주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특히 소설의 형식이 한몫했다. 이 소설은 두 남녀가 주고받는 e메일이 전체 줄거리를 이룬다.

남자와 여자가 착오로 우연히 e메일을 주고받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여자는 유부녀, 남자는 총각.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여자와 막 실연의 아픔을 겪은 남자에게 e메일 친구는 일상성이 제거된 판타지 영역이다.

하지만 어느덧 상대에게 빠져들기 시작한 이들은 서로의 외모를 상상하고, 실제로 얼굴을 보기 위해 블라인드 데이트를 시도하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의 친한 친구를 데이트 상대로 소개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책을 읽다 보면 언뜻 1990년대 후반, 광풍처럼 몰아쳤던 PC통신의 ‘채팅 커플’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보다 훨씬 고풍스럽다. ‘채팅’이 실시간이라면, ‘e메일’에는 메일을 쓰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긴장감은 바로 이 기다림의 ‘시간’에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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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
작가·‘스타일’ 저자

우연히 찾아온 유쾌 상쾌한 e메일 불륜

휴가지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발리의 리조트 체어에서 책을 읽는 내 앞으로 다섯 살짜리 꼬마가 비치볼을 든 채 미끄러질 수도 있고, 잘생긴 남자가 갑자기 데이트를 신청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복잡한 스토리보다 이처럼 짤막한 대화체 소설을 읽는 게 어떨까.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도 있고, 무엇보다 머릿속에 차가운 바람을 몰고 올 소설이니, 더위에 찌든 ‘뇌’가 쉴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사실 휴가지에서 연애소설을 읽는 것보다 낭만적인 일이 또 있을까. 더구나 이 소설에 반전이 숨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지 추리하다 보면 책 읽는 재미는 더 쏠쏠할 터.

곱게 늙은 절집

낙원 外

심인보 지음/ 지안 펴냄

치유.

휴가의 의미를 ‘충전’에 한정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 책이야말로 ‘휴가지에서 읽을 책’에 걸맞다고 감히 말한다.

제목 그대로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문명을 거스르는 절, ‘불편함의 미학’으로 잘 늙어가는 절, 스님네 일상, 풍경에 관한 스물다섯 꼭지 이야기다.

전남 해남군 달마산의 미황사, 전북 고창군 선운산의 선운사, 충남 서산시 상왕산의 개심사와 같이 알려진 절도 있고 산골짜기 깊은 암자처럼 잘 모르는 곳도 있다. 외견상 그간 적지 않았던 사찰 기행류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알 수 없는 선문답으로 채우거나 건축미를 추상적으로 풀어놓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자가 절에서 되찾은 몸과 마음의 평온을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 좋다.

지난해 저자를 만났다. 몇 해 전 그는 서울시와 삼성 등 수많은 기관과 기업 로고를 디자인한 ‘잘나가는’ 기업 이미지(CI) 디자이너였다. 최고라는 생각에 무서울 것 없던 절정기, 그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베체트병, 면역시스템이 자기 몸을 공격하는 무서운 면역계 질환. ‘인생 스승’인 불교화가 브라이언 배리 씨는 그에게 전북 부안군 개암사로 가라 했다. 그곳에서 그는 서양 디자인만 좋고 한국 것은 뒤진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했다. 그 뒤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조화된 절집을 찾아다녔고 몸도 마음도 서서히 치유됐다.

이 책은 그 과정의 부산물이다. 책 속 가득한 저자의 서정적 문체에서 삶을 되찾게 해준 절집에 대한 경탄이 묻어난다.

자연과 건축 경계 허문 한국의 사찰 매력

낙원 外

윤완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무엇이 건축이고 무엇이 자연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게 절집의 백미. “아! 모과나무 기둥! 아니, 모과나무!” 전남 구례군 지리산 화엄사의 암자인 구층암을 봤을 때 저자의 첫마디다. 모과나무를 그대로 옮겨 기둥으로 만들었다. 모과나무 밑동이 주춧돌에 뿌리를 내렸는데 연결 부분에 홈을 판 것 외에는 나무 그대로다. 저자는 ‘산 것과 죽은 것이 다르지 않은 자연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충남 서산시 개심사의 심검당(승방) 기둥과 보는 ‘휘면 휜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기둥이 되고 보가 됐으며, 어떤 놈은 비틀린 대로 위로 치솟고 어떤 놈은 굽은 대로 옆으로 뻗었다.’ 전북 완주군 화암사에서는 ‘마당은 마당이 아니라 집이 되고,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지붕이 된’ 모습에 감탄한다.

시끌벅적 단체관광으로는 절집의 진정한 맛을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저자는 특유의 솔직함과 잔잔한 문체로 많은 이를 곱게 늙은 절집으로 향하게 한다.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허문 절집. 해외여행이 아니라면, 전국 어디를 가든 책 속 절집 하나 들러보면 어떨까.

예술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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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지음/ 서해문집 펴냄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지만 떠난 그곳에서 타인의 방을 한가로이 들여다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 같다. 게다가 그 방이 일상적이지 않다면 여행지에서 또 다른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기발하고 특별하고 유쾌하게 꾸며진 공간이라면 그 방을 엿보는 일은 더욱 즐겁다. 아나운서 김지은이 찾아간 현대미술 작가 10명의 방이 그렇다.

지난 봄 ‘예술가의 방’이라는 책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여름에 들어설 때까지 책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진통이었을까. 누구에게도 책을 쓰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글에 대한 결벽증이 있는 어떤 이에게는 더욱 지난한 과정이었나 보다.

한줄 한줄 아름다운 문장으로 연마해가면서도 김지은은 자기가 쓰는 글을 잡문이라 했다. ‘작가 김지은’이란 호칭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그의 전작 ‘서늘한 미인’은, 김지은이란 이름보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늘한 미인’을 읽고 나면 글쓰기에 대한 그의 태도가 ‘경외’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나운서와 예술가의 대화 …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

낙원 外

박준
여행작가·‘On The Road’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저자

반면 뉴욕에서 공부하며 틈틈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마드리드를 여행하는 동안 마무리했다는 ‘예술가의 방’에서 그는 좀 편안해진 느낌이다. 격의 없는 인터뷰 형식은 눈앞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예술가의 방은 곧 ‘작업실’이지만, 그 방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근사하지 않다. 김지은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폐허 같던 마음과 실패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그가 만난 작가들은 골방에서 ‘오랜 세월 동안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꾸준함을 선택했다.’ 어떤 방은 러브호텔이 밀집한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았고, 어떤 방은 카센터와 피아노 학원 사이, 아래층에는 아마추어밴드 합주실이 있는 건물에 자리했다. 바닥이 더러워지면 변상해야 한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경고에 잔뜩 종이를 깔아놓은 방, 남의 사무실 구석에서 더부살이하는 방, 이름 없는 ‘상가아파트’ 방도 있다. 지금은 좋은 곳으로 이사했다지만 화려하고 달콤해 보이는 작품과 달리 얼마 전까지 일했던 방은 ‘어둡고 좁고 눅눅한’ 곳도 있다. 이천의 가마터 부근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작업했다는 어떤 작가는 화장실 갈 때가 가장 무서웠다고 한다. 문이 안 닫혀 문고리를 잡고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고. 드물게는 뉴욕 소호의 스튜디오에 온 것처럼 화려하고 근사한 방도 있지만, 이들 중 누구 하나 힘든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일러스트레이터 김수자가 그린 방의 평면도는 각자의 방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 밖의 다양한 그림도 보통 사람들과 상관없을 것 같은 ‘예술가의 방’을 정겹게 느끼도록 만든다. 방은 그 사람의 존재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문득 내 방을 둘러보게 된다.

그늘에 대하여 (음예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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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눌와 펴냄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여름 휴가지에서 책을 읽는 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피서지에서는 실컷 놀면서 뇌에게도 쉴 틈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나도 여행길에 책 한두 권은 챙긴다. 최근의 여행에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선택됐는데, 이유는 ‘읽다가 잠들기 딱 좋아서’다.

자, 그렇다면 이번 여름엔 뭘 들고 갈까. 몇 권의 책을 놓고 고민하는데 갑자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수필 ‘그늘에 대하여’(음예예찬)가 눈에 들어왔다. 휴가지에서 읽을 책은 내용으로나 무게로나 가벼운 게 좋고, 읽던 페이지를 다시 읽어도 무방해야 하며, 여행길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주면 좋은 선물이 돼야 하겠기에 ‘그늘에 대하여’를 골랐다. 가벼운 내용이라고는 하지만 생각할 바를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특별하다.

오늘날 서구인들에게 ‘그늘에 대하여’는 “일본의 절제된 미 체계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하고 설득력 있는 글”로 널리 읽힌다. 이 책에서 다니자키는 서구화에 의해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일본식 생활을 담담히 묘사한다. ‘왜 일본식 전통과 서구식 현대는 쉬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일일이 예를 들어 분석하는 데는 크게 공감한다. 조선식 전통과 서구식 현대를 조화롭게 구성하는 데 실패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왜 한국에는 이런 책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봄 직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기여한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1968년에 살아 있었더라면 다니자키가 상을 받았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와바타보다 탄탄한 작가였고, 따라서 번역했을 때의 결과도 더 나았다.”

서구화에 밀려나는 일본의 전통 담담하게 그려

낙원 外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이렇게 출중한 다니자키였지만 흠이 없지 않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생일날 과식한 탓’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고, 또 실제 그의 집은 무척 서양식이어서 ‘그늘’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양절충의 생활양식, 즉 서양 것과 일본 것을 절충하는 검약한 삶에 대한 그의 지론은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종이 위의 문자로 그쳤다는 말이다.

하지만 독설가인 사이덴스티커는 이렇게 상찬한다.

“다니자키의 글이 겉모습에 불과하다 해도 그것은 훌륭한 배우의 포즈다. (중략) 다니자키의 취향을 넘어서, 인상적인 언어와 강렬한 이미지를 사용해서 세계를 향해 알아야 할 것을 알려주는 글이다.”

‘그늘에 대하여’는 다니자키가 1930년대 말에 쓰고 40년대 초 개작한 오래된 수필이지만, 행간에는 여전히 유효한 당대성-한국에서는 발화되지 않은-이 살아 있다.

작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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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 아쓰시 지음/ 서혜영 옮김/ 동아일보사 펴냄

6명만 거치면 세상 누구와도 연결된다고 한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오무라 아쓰시의 옴니버스 소설 ‘작은 인연’에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만들어낸 여섯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첫 번째 ‘사슴벌레와 소년’에서 소년은 백화점 곤충매장에서 다리가 6개인 사슴벌레를 두고 굳이 다리가 5개밖에 없는 사슴벌레를 고른다. 기왕이면 제대로 된 사슴벌레를 사라는 가게 주인의 권유에 소년은 의족을 한 자신의 다리를 보여주며 말한다.

“아저씨, 나는 다리가 두 개 중 하나밖에 없는데 이 사슴벌레는 여섯 개 중에 다섯 개나 남아 있으니까…. 난 2분의 1, 그러니까 6분의 3이고 사슴벌레는 6분의 5잖아요.”

두 번째 이야기 ‘런치 박스’의 주인공은 똑똑하지만 가난이 뭔지 아는, 게다가 3년 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중학교 3학년 여학생 나나미다. 여름방학 보충수업 기간에 나나미가 싸온 편의점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본 담임선생님 준야는 종이 위에 검은색 펜으로 원을 하나 그려서 나나미에게 주며 말한다.

여섯 개의 이야기 그리고 얽히고설킨 등장인물들의 인연

낙원 外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국 출판팀장

“검은 원이 있는 이유, 그건 주위가 검은 원이 아니기 때문이야. 주위가 하야니까 검은 원이 여기에 존재하는 거야.”

그러나 주위를 검정으로 칠하면 더는 검은 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나미는 준야 선생님의 그림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세 번째 ‘애프터 더 프롬’은 고교 마지막 여름방학 댄스파티 이후 가까워지는 기요아키와 교카의 이야기다. 기요아키는 2학년 때까지 후보 신세를 면치 못한 고교 야구부원이었고, 교카는 교실에서 ‘평범녀’로 통하는 눈에 띄지 않는 여학생이다.

네 번째 ‘그녀는 늘 하티에’는 ‘Hearty’라는 이름의 와인 · 칵테일 바에서 일하는 레이나가 주인공이다. 대학 4학년, 작가 지망생인 레이나는 멋진 러브스토리를 쓰려 하지만 슬럼프에 빠졌다. 그때 단골손님 신스케가 바의 다른 웨이트리스를 짝사랑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레이나는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다섯 번째 ‘비즈니스 카드’에서는 뛰어난 영업실적을 올리고도 남자 동료 미치즈카에게 승진을 양보해야 했던 호시노가 등장한다. 그녀가 승진 경쟁에서 밀린 이유도 놀랍지만, 이후 미치즈카가 보여준 태도는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다. 마지막 이야기 ‘나는 약지’는 둘째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는 준야와 유코 부부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스포일러라고 비난받을까봐 더 이상의 줄거리는 소개하지 않겠다. 다만 ‘작은 인연’을 읽을 때는 이야기마다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6개의 인연을 이어주는 단서가 바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줄거리를 따라가다가 무심코 흘려버릴지 모를 소중한 말에 밑줄 그을 연필을 준비하라. ‘인생은 지금이 가장 젊다’와 같은 말이 숨은 그림처럼 흩어져 있다.

낙원 外




주간동아 2008.07.29 646호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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