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6

2007.12.25

[대기업개혁] IMF 주범 오명 10년 눈총 글로벌 기준으로 규제 옷 수선하자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7-12-19 11:4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대기업개혁] IMF 주범 오명 10년 눈총 글로벌 기준으로 규제 옷 수선하자

    제임스 피터 소버린자산운용 대표. 소버린의 SK그룹 공격은 기업의 경영권 방어장치 요구를 불러오는 계기가 됐다.

    “외환위기 10년이 지났다. 재벌개혁 정책을 재정비할 때가 됐다.”

    대선을 앞두고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는 개혁 분야 가운데 하나가 금산(金産)분리, 출자총액제한제도(24쪽 참조), 경영권 방어수단 등으로 요약되는 재벌개혁 정책이다. 1997년 당시 재벌이 외환위기 초래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이들을 견제할 여러 개혁 정책이 도입되거나 강화됐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지금, 현실과 동떨어진 재벌개혁 정책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금산분리는 1982년 은행 민영화 과정에서 국내 산업자본이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의 4% 이상을 갖지 못하게 보유 한도를 설정한 제도. 그러나 현재 형태로 확립된 것은 97년 외환위기 이후다. 재벌들이 시중은행을 사금고화해 은행 돈을 마음대로 쓰면서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바람에 부실이 커졌다는 반성에서 현재의 금산분리 정책이 확립됐다.

    올 9월 HSBC가 론스타와 외환은행 조건부 인수 계약을 했다고 발표하면서 금산분리는 뜨거운 이슈로 다시 부각됐다.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완화’를, 김용덕 현 금감위원장은 ‘유지’를 주장해 눈길을 끈 가운데 6월 이필상 교수(고려대 경영학과)를 비롯한 학자들로 구성된 민간금융위원회는 ‘4% 룰 완화’를 제안했다. 금융시장 환경이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해 많이 바뀐 데다, 금융감독도 예전보다 훨씬 강화됐다는 점이 이유다.

    금산분리 완화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의 금산분리 규제 강도가 가장 심하다고 지적한다. 또 국내 산업자본이 은행 주식을 외면하다 보니 시중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이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문제점도 거론한다.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의 외국인 지분은 80%를 상회하며, 신한금융지주는 60%대(재일동포 지분 제외), 하나금융지주는 70%대에 이른다.



    이에 유지론자들은 세계 100대 은행 지분을 소유한 산업자본들이 대부분 지분을 4% 미만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금산분리 원칙은 전 세계적으로 관행화돼 있다”고 반박한다. 한편 박병원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최근 “삼성 현대 등 자금이 넘쳐나는 대기업은 은행을 소유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기업의 은행 소유에 대해 국민 정서상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금산분리 폐지 논의는 실익 없는 논쟁에 불과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소버린의 SK그룹 공격(2003), 아이칸의 KT·G ‘먹튀’ 논란(2006) 등을 계기로 재계의 ‘경영권 방어장치’ 요구가 거세다. 현재 법률 체계에서는 경영권 방어장치를 마련할 수 없어,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 앞에 국내 기업들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주장이다. 도입이 거론되는 대표적인 방어장치로는 포이즌 필(적대적 M·A 공격을 받게 된 기업이 기존 주주들에게 싼값으로 신주를 대량 발행해 경영권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것), 차등의결권(대주주에게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주는 것) 등이다. 기간산업만이라도 외국자본의 적대적 M·A를 규제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나오고 있다.

    금산분리정책 완화 vs 폐지 의견 팽팽

    외환위기 이전에는 이러한 경영권 방어장치는 국내 기업들의 ‘관심 밖’이었다. 상장을 유도하는 차원에서 증권거래법이 특정 기업의 주식을 10% 이상 사지 못하도록 제한했고, 외국인투자촉진법에 의해 외국자본의 대규모 주식 취득도 정부 승인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이 두 가지 법적 ‘보호막’이 모두 철거되고 외국자본의 한국 진출이 가시화되면서 경영권 방어장치 마련이 재계의 시급한 과제가 됐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이나 일본 기업들은 각기 경영권 방어장치를 구축해놓고 있지만, 우리나라 현행 법 아래에서는 불가한 일”이라며 “공격의 길을 열어줬으면 방어도 허용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경영권 방어와 관련해 선진국 수준으로 균형을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개혁] IMF 주범 오명 10년 눈총 글로벌 기준으로 규제 옷 수선하자

    7월5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방문을 위해 과테말라시티를 찾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가운데)과 이재용 상무(맨 왼쪽).

    “개선돼야 할 재벌 폐해는 지배구조 문제”김방희 김방희생활경제연구소장

    대통령 당선자가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될 의제는 재벌개혁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원하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삼성 특검 결과가 나온다. 당선자는 한 달여의 특검 결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대선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금산분리 문제에 대해 견해를 밝힐 수밖에 없다.

    삼성 특검 결과는 어느 모로 보나 당선자에게 부담스러운 사안이다. 수사 결과 삼성이 비리 의혹에서 벗어난다고 가정해보자. 이를 납득하지 못한 국민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반(反)삼성, 반(反)재벌 여론이 비등해질 것이다. 한편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내용 모두 또는 일부가 사실로 밝혀져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삼성그룹 임원들 일부가 기소되거나 이건희 회장이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고 치자. 당장 재계가 들끓을 것이다. 세계적 금융 불안에 더해 우리 기업의 투자 축소로 인한 경제위기론이 확산될 것이다. 당선자는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모르는 어정쩡한 처지가 될 수 있다.

    이때 대통령 당선자가 해야 할 일은 역설적이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모든 사안을 법과 현직 대통령에게 맡겨야 한다. 대신 장기적으로 재벌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궁리해야 한다. 특히 과거 정권들이 왜 재벌개혁에 실패했는지 유심히 들여다봐야 한다.

    이는 두 가지 이유가 가장 크다. 첫째, 역대 정부는 언제나 ‘경제위기론’에 휘둘렸다. 경제위기론은 늘 재벌이 주도하고 언론과 민간 싱크탱크, 경제학자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새 정부 역시 위기론에 휘둘린다면 재벌개혁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대기업개혁] IMF 주범 오명 10년 눈총 글로벌 기준으로 규제 옷 수선하자

    11월26일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과거 정권 왜 재벌개혁 실패했는지 반면교사 삼아야

    둘째, 재벌그룹과 재벌총수 일가를 혼돈해선 안 된다. 이 둘을 분리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총수 일가가 곤경에 놓이면 재벌그룹이 어려워지고, 그럼 우리 경제가 위태로워진다는 고정관념을 깰 수 있다.

    총수 일가와 재벌그룹, 그리고 우리 경제는 분명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만큼 죽고 못 살 정도는 아니다.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은 몰락했지만 대우 계열사들은 보란 듯이 더 경쟁력 있는 회사들로 거듭났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보복 폭행’으로 구속됐다고 우리 경제가 더 어려워지지도 않았다.

    재벌 문제에 대한 재정의도 필요하다. 재벌체제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폐해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막연히 재벌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역대 정권은 출범 당시 재벌을 옥죔으로써 권력을 과시하려 했다. 그 결과 얻은 것은 천문학적인 통치자금이거나 사재(私財)의 사회환원 약속뿐이었다.

    과거 재벌의 폐해라고 했던 것 가운데 상당 부분은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가 없다. 재벌 규모가 너무 크다거나 지나치게 많은 업종을 영위한다고 재벌을 비난할 수는 없다.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규모나 다각화 정도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한 계열사의 문제가 그룹 전체로 비화되고, 나아가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현상도 외환위기 이후 많이 개선됐다. 이제 남은 재벌의 폐해는, 총수와 그 일가가 보유 지분에 비해 터무니없이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잘못된 지배구조다. 관행이란 이유로 묵인된 불법 로비와 여론조성 행위다. 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하고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다.

    뒤의 두 가지는 ‘법대로’ 하면 된다. 경제가 어렵다고 원칙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첫 번째 문제는 기술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단기적으로 완화하더라도 순환 출자를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금산분리도 섣불리 허용할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견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그동안 외국자본에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소버린의 SK그룹 공격 이후 정부에 노골적으로 경영권 방어장치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특검 이후 삼성그룹이 수세에 몰린 틈을 타 외국자본이 인수합병 시도를 한다고 치자. 이들의 경영권 확보 명분도 그럴싸하다. 주주들에 대한 총수 일가의 이익 침해를 더 두고 볼 수 없어 유능한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론은 SK-소버린 공방 당시처럼 국내 재벌 편을 들 것인가? 무엇보다 정부는 국내 자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총수와 기존 경영진의 기득권을 지켜야 할 것인가? 무조건 삼성 편을 든다면 대통령 당선자와 새 정부의 재벌개혁은 과거 정부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