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4

2007.02.27

시간 멈춘 골목길 사람들 추억 간직

  • 글·사진 민병규

    입력2007-02-16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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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멈춘 골목길 사람들 추억 간직

    계단으로 오르는 골목길마다 예쁜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언덕마을 지우펀의 전경.

    대만 하면 생각나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101층 빌딩이나 야시장 등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 한쪽에 뭉클하게 간직한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를 떠올린다.

    시간 멈춘 골목길 사람들 추억 간직

    대만 지우펀을 무대로 한 영화 ‘비정성시’의 한 장면.

    대만의 ‘지우펀’이라는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한 이 영화는 1940년대 말 격변의 세월을 보내는 한 가족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영화는 1945년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대만이 해방되는 것을 시작으로 해 48년 장제스(蔣介石)가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끝난다.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한 가족에게 미친 영향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밝은 내용이 아니어서 그런지 ‘비정성시’의 화면은 어둡고 우울하다. 여기에 지우펀의 어두컴컴한 골목길의 느낌이 더해져 암울한 역사적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감독은 주인공 문청(양조위 분)의 결혼 장면은 밝은 화면에 담아 비극과 행복의 순간을 극명하게 대비했다.

    직접 찾아가 본 지우펀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올지 궁금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큰 바위가 쿵 하고 가슴에 내려앉는 느낌일까? 아니면 시끌벅적하고 정신없는 여느 관광지와 다름없을까? 부푼 기대를 안고 대만 지우펀으로 향했다.

    시간 멈춘 골목길 사람들 추억 간직

    언덕 위의 전망대 거띵에서 바라본 지우펀의 전경(좌).<br>단체 야외활동을 나온 초등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대만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2시간 남짓 비행기에서 영화를 보고 있자니 벌써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토록 가까운 곳인데 지금까지 대만을 멀게만 생각한 이유는 아무래도 이곳이 여행지로서 큰 인기가 없었던 탓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깝다면 언젠가 여행지로 주목받는 날이 올 듯싶었다.



    대만 국제공항 밖으로 나가자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서울에서는 추위에 떨었는데 2시간 만에 계절이 바뀐 셈이다.

    지우펀을 가기 위해선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북쪽에 있는 지륭(基隆)에 먼저 가야 한다. 공항에서 기차를 탈까 버스를 탈까 고민하다가 갈 때는 기차를, 올 때는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기차를 타고 50분 정도 달리자 바다냄새가 풍기는 듯하더니 국제항구가 있는 지륭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멋진 크루즈선이 정박해 있었다. 이곳은 16세기 일본 해적들의 본거지였다고 한다. 떠들썩할 줄 알았던 항구는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지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지우펀으로 가려면 언덕을 굽이굽이 올라야 한다. 지우펀은 과거 광석도시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다. 하지만 채광산업이 시들해지고 사람들이 떠나면서 황량한 바람만 부는 폐광촌이 됐다. 그러나 천혜의 자연환경과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수려한 경관 덕분에 지우펀은 다시 손꼽히는 관광지로 떠올랐다. 요즘은 타이베이와 지륭 주민들의 주말 나들이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지우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자꾸만 고개를 들어 언덕 위를 쳐다보곤 했다. ‘영화 속 정취와 거리가 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드디어 영화 속 공간에 발을 내딛는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막상 지우펀에 도착하자 걱정과 기대 같은 것은 모두 사라졌다. 오밀조밀한 골목길에 즐비하게 들어선 음식점들, 예쁜 기념품집과 찻집들이 두 팔 벌려 나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인파에 묻혀 나는 골목길 안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지우펀의 골목길에는 중국 특유의 붉은 등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현실세계와는 다른 시간대에 속한 세계가 펼쳐졌다. 상점에는 흙이 묻은 골동품이 진열돼 있고, 막걸리가 어울릴 듯한 오래된 선술집도 눈에 띄었다. 거리 곳곳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곤 했다.

    시간 멈춘 골목길 사람들 추억 간직

    골목마다 각종 기념품가게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골목은 단체여행을 온 학생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화려한 골목 뒤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어느덧 눈앞에 고즈넉한 분위기의 공간이 펼쳐졌다. 언덕마을답게 계단이 있는 골목이 나오고, 잿빛 담벼락 옆에는 연탄재가 쌓여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을 연상시키는 이곳에서 ‘비정성시’의 주인공 문청이 미소지으며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시원한 공기도 마실 겸 경치가 좋다는 언덕 위의 전망대 거띵(隔頂)에 올랐다. 지우펀의 아기자기한 전경은 물론 저 멀리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풍성한 나무들과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그 위로 옅은 안개가 깔린 지우펀은 신비한 매력을 풍겼다. 언덕마을 밑으로는 잔잔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평화롭게 이어졌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취해 돌아다니다 식사시간도 잊어버렸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나는 영화 ‘비정성시’에서 등장인물들이 술을 마시며 해방의 기쁨을 노래했던 한 음식점에 들렀다. 창 아래로 펼쳐진 바다 경관이 특히 일품인 곳이었다.

    영화 ‘비정성시’ 주무대 … 대만 특유의 신비한 매력

    영화 속 등장인물은 물론 실제 대만 사람들도 이곳에서 해방 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며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들은 얽히고설킨 정치세력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고 기쁨의 노래는 통곡으로 변해버렸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수많은 사연들은 단지 흩날리는 먼지에 불과했다. 대만의 해방과 그 후의 혼돈은 한국의 상황과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밥과 튀김요리, 야채볶음, 계란부침이 큰 접시에 담겨 나왔다. 맛있게 허겁지겁 밥을 먹으니 예쁜 여직원이 중국어로 뭐라 이야기하며 물잔에 차를 따라줬다.

    식사를 마치자 나이 지긋한 한 직원이 차제구를 갖고 왔다. 그는 우롱차 우려내는 방법을 설명하며 유리병에 우롱차를 담아 치켜들더니 “황금색이 나지요?” 하고 물었다. 그러고는 “예전엔 지우펀에서 금이 많이 났다”고 덧붙였다.

    황금색으로 아름답게 우러난 우롱차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차가 아주 맛있다”고 하니 직원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배운 대로 차를 우려 마시면서 불현듯 ‘모든 것들의 역사는 파도타기와 같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파도를 타며 질주할 때도 있고, 거친 파도 속으로 곤두박질칠 때도 있으며, 하염없이 때를 기다리는 경우도 생기니 말이다.

    찻집에서 영화 속 인물들이 오르내리던 계단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겨 있자니 곧 주변이 웅성웅성 시끄러워졌다. 영화 속 어두컴컴한 계단에 이제는 따스한 햇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단체 야외활동 나온 초등학생들이 까르르 웃고 장난치며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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