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4

2007.02.27

기술표준시장 ‘황사 바람’

중국, 부쩍 큰 몸집으로 대대적 공략 … 자체 개발 EVD로 차세대 DVD 시장 밀어붙이기

  • 정상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peking@seri.org

    입력2007-02-16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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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표준시장 ‘황사 바람’

    베이징 거리에 진열된 중국산 TV 매장.

    2006년 6월7일 체코 프라하에서 개최된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의에서는 적잖은 해프닝이 있었다. 무선랜(LAN) 기술 국제표준을 논의하던 도중 중국 측이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회의가 미국의 뜻대로만 움직인다”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것. 중국이 밀고 있는 독자표준 WAPI(무선랜 암호화 표준)가 그해 3월 실시된 ISO 가맹국 투표에서 미국이 개발한 802.11i에 밀려 국제표준이 되지 못한 데 대한 항의였다. 지금도 중국은 미국의 국제표준을 무시하고 WAPI를 고집하고 있다.

    기술표준을 둘러싼 국가 간 ‘총성 없는 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갈등양상은 과거와 판이하다. 선진국들의 전유물이던 기술표준시장에서 중국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기술표준은 서로 다른 지역 및 기기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필수 요소다. 그 역사도 길어서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기술표준은 기원전 7000년경 이집트에서 등장했으며,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가장 먼저 시행한 일 중 하나도 마차바퀴 등의 기술표준이었다.

    5년 내 전자 등 10개 국제표준 목표

    최근 글로벌화, 디지털화, 네트워크화가 진전되면서 기술표준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추정에 따르면 세계시장에서 기술표준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제품의 교역량은 전체 교역량의 80%에 이른다고 한다. 기술표준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은 독점적 이윤을 거두는 반면 패배한 기업은 퇴출되거나 군소기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이는 중진국들의 선진국 진입장벽이 더욱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 역시 오랜 기간 기술표준으로 인한 불이익을 당해왔다. 중국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중국에서 생산된 휴대전화 총액의 20%, PC 총액의 30% 가까이를 특허료로 지급했다. 중국이 이미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PC 생산국가임을 고려하면 그 금액은 실로 막대한 수준. 한마디로 재주는 ‘중국’이 넘고 돈은 ‘선진국’이 챙기는 구조인 것.



    주요 산업기술의 국제표준과 중국표준
    기술 분야 국제표준 중국표준
    3세대 이동통신 WCDMA, CDMA2000 TD-SCDMA
    차세대 DVD 블루레이, HD-DVD EVD
    무선랜 802.11i WAPI
    영상압축기술 MPEG AVS
    RFID EPC NPC


    기술표준시장 ‘황사 바람’

    국제 모바일폰 기술표준 무대에서 홀대받고 있는 ‘대한민국’ DMB.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중국은 급성장한 국력을 앞세워 선진국들의 놀이터이던 기술표준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특히 경제의 양적 성장에서 질적 도약을 외치고 있는 후진타오 지도부는 기술표준 분야를 중국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분야로 인식하고 적극 후원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계 3위의 무역대국,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국력이 뒷받침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다국적기업들은 사활을 걸고 거대 중국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중국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기술표준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것. 중국의 기술표준이 과연 세계표준이 될 만한 수준인지에 대한 논란은 중요한 대목이 아닌 셈이다.

    중국은 향후 5년 내에 전자·정보기술(IT)·기계 등 중점 산업분야에서 10개의 중국 기술표준을 국제표준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최근 3세대 이동통신, 차세대 DVD 등 유망 산업에서 독자적인 기술표준을 추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EVD(Enhanced Versatile Disc)는 차세대 DVD 기술로 중국이 자체 개발한 표준기술이다. 현재 차세대 DVD 시장을 놓고 블루레이와 HD-DVD 방식이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EVD의 등장으로 시장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졌다.

    1999년 정보산업부 주도로 씬커(新科), 샤신(夏新) 등이 합작해 ‘베이징 후궈(阜國)디지털기술’을 설립하고 EVD 기술 개발을 추진해왔다. 2003년 11월에는 쌍광디엔(上廣電), 촹웨이(創維) 등 9개 업체가 EVD연맹을 구성했다. EVD는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에도 디스크의 저장용량이 양면 기준 8.5G로 블루레이(50G)보다 현격히 떨어지는 등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총 21개 회원사 가운데 19개 사가 2008년까지 호환 기능을 장착한 EVD 플레이어를 생산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산 DVD 제조업체들의 수익성 악화와 관련이 있다. 이들 업체는 30~40달러에 판매되는 DVD 플레이어 한 대당 약 7달러를 외국에 특허료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이 높지 않다. 반면 EVD 플레이어는 평균 판매가가 약 90달러로 고가인 데다 특허료를 한 푼도 낼 필요가 없는 중국 기술표준이다. 기술수준이 떨어지더라도 자체 표준을 고집할 만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협과 기회 능동적 참여 목소리

    TD-SCDMA는 1998년부터 ‘따탕(大唐)전신’이 중심이 돼 지멘스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중국 독자의 3세대 이동통신 기술표준이다. TD-SCDMA의 핵심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따탕전신은 중국 정보산업부 산하 전신연구원이 대주주인 국영기업이다. 중국정부는 TD-SCDMA의 기술표준 채택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연구개발비 지원은 물론 TD-SCDMA의 기술 테스트 및 보완을 위한 시간을 확보해주기 위해 3세대 이동통신사업의 허가증 발급 자체를 지연시켰다.

    심지어 2006년 초에는 차이나모바일, 차이나텔레콤 등 중국의 거대 통신사업자들이 유럽 방식인 WCDMA 네트워크를 구축하려고 하자 정부가 직접 나서 저지하기도 했다. 결국 TD-SCDMA는 중국 정부로부터 WCDMA나 CDMA2000보다 앞서 3세대 이동통신 방식으로 공식 인증을 받았으며 최근 막바지 테스트 중이다. 업계에서는 TD-SCDMA가 중국 3세대 이동통신시장의 30% 정도를 점유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상용화 단계까지 들어선 국제표준의 존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기술표준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이런 시도는 세계 기술표준 업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임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다. 중국이 독자 규격을 밀어붙이면 시장의 거대성 때문에 ‘사실상 국제표준’이 될 수 있는 무한 잠재성 때문이다.

    냉정하게 평가해도 국력이나 시장을 고려할 때 우리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승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기술표준 전략은 우리에게 위협요인이 될 수도 있지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중국의 기술표준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중국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 세계 주요 기업들이 중국의 기술표준을 인정하는 것은 중국기술이 우수해서가 아니다. 단지 중국시장 진출을 위한 우회로로 받아들일 뿐이다. TD-SCDMA 개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하나가 중국 통신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독일의 지멘스라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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