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4

2006.09.26

아프리카 이민자는 시한폭탄?

프랑스 정부, 분산·추방 강경 정책 … 국민도 보수 회귀 ‘박애주의’ 설 땅 잃어

  • 파리=홍용진 통신원 hadrianus@hanmail.net

    입력2006-09-21 15: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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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이민자는 시한폭탄?

    카샹 추방민들은 한 달 넘도록 공공체육관에서 지내고 있다.

    8월17일 아침, 프랑스 파리 외곽 남부의 조그만 도시인 카샹(Cachan)에서 엄청난 규모의 이삿짐 행렬이 시작됐다. 이사를 하는 사람들은 무려 650여 명, 이삿짐 차량이 경찰차라는 점이 색다른 이사 행렬이었다. 다름 아니라 프랑스 내무부와 경찰청이 아파트 불법점거자들을 강제추방하는 장면이다.

    저항이 없진 않았지만 이들은 곧 아파트 인근 공터에 설치된 임시 캠프로 옮겨졌고, 다음 날 공공 실내체육관에 수용됐다. 가을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프랑스 사회와 정계를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는 카샹 불법점거자 강제추방의 시작이다.

    강제추방을 당한 이들은 모두 아프리카 말리와 코트디부아르에서 이민 온 빈민층이다. 까다로운 이민정책을 펼치고 있는 현 프랑스 정부에서 이들을 강제추방한 일은 정부의 단호함을 천명하는 본보기 같은 구실을 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불법점거자 중 몇몇에게는 며칠 후 고국으로의 강제추방령이 내려졌다.

    불법점거자 추방 카샹 사태로 ‘시끌’

    프랑스 정부는 강제추방의 명분으로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의 안전 보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정부는 아파트에서 불법점거자를 강제추방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에게 임시숙소 마련 같은 조치를 취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650여 명의 추방민들은 갈 곳도, 살 곳도 없어 공공체육관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의 기본 생계를 보장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장이브 르 부이요넥 카샹 시장의 노력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는 사회질서의 골칫거리인 이들을 분산시키거나 추방하는 일이야말로 프랑스 안전 보장의 첩경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이민자들의 폭동이 여전히 정부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리 외곽 빈민가에 가보면 이민자 출신 빈민들의 불만이 특정 정책에 대한 불만이기보다는 프랑스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에서 비롯된 무의식적 불만임을 금세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외곽 지역에서는 밤중에 특정한 목적이 없는 차량 방화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언제든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정치적 라이벌 관계인 시라크 대통령, 빌팽 총리, 사르코지 내무부 장관도 이민자 관련 정책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풀어내기보다는 끊어 없애버리자는 것. 대규모의 난민 아닌 난민을 만들어놓은 비인도적인 처사 앞에서 사르코지 장관은 “이들의 추방은 경찰의 당연한 임무”라고 말했고, 빌팽 총리 또한 “법치에 따른 조처였다”고 밝혔다. 더구나 극우파들은 정부에 더욱 강경한 추방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사회당 등 야당 진보세력 정부 규탄

    하지만 카샹 사태는 9월 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8월 말까지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던 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과 사회단체, 정당들이 적극적으로 정부를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먼저 제1야당인 사회당(PS)이 9월

    아프리카 이민자는 시한폭탄?

    카샹 추방민들의 항의 시위.

    1일 정부에 “사회당 소속의 카샹 시장과 추방민들에게 속임수로 일관한 점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이번 사태의 책임자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또한 조속하고도 실질적인 대책 마련도 촉구했다. 이로써 카샹 사태는 현 보수 집권세력과 사회당을 필두로 하는 야당 진보세력들 간의 정치적이고도 이념적인 성격을 표출하는 사례가 됐다.

    이러한 와중에 8월30일과 9월9일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강제추방민들을 지지하는 시위가 조직됐다. 수천 명이 참석한 이 대규모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장관들에게는 800㎡이면서 빈민에게는 8㎡라니!” “사르코지는 자신의 부모도 이민자였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모두에게 체류증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카샹 시에서는 사회당 소속 시장과 강제추방을 지휘한 발드마른 주의 경찰청장 베르나르 토마지니 간의 공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고, 추방민들은 강제추방 당시 행해진 경찰의 폭력적인 처사를 고발했다.

    나아가 프랑스 곳곳에서는 8월 말부터 카샹 추방민들을 지지하는 서명운동이 각계각층의 유명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 학문, 종교, 연극·영화, 스포츠, 정치, 법조계 등 13여 명의 유명 인사들과 수십 개의 사회단체들이 카샹 추방민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 명단에서는 영화감독 마티유 카소비츠나 축구선수 파트리크 비에이라처럼 우리에게도 낯익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빈민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받는 신부 아베 피에르는 9월5일 시라크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추방 당시 여성과 아동들에게 가해진 폭력행위, 경찰의 집요하고도 거친 심문, 부모와 아이들을 강제 분리시켜놓은 일 등을 지적하며 이번 사태의 비인도적 성격을 질타했다.

    그렇다면 일반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9월 초 ‘르 피가로’지에서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2%가 강제추방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들 중 84%가 현 집권세력인 중도 우파를, 그리고 무려 65%가 극우파를 지지한다고 밝혔다(중복응답 허용). 아울러 60%는 이번 추방민들이 다른 합법적인 주거 요구자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세계화의 물결’이라는 경제적 위협 앞에서, 또 ‘이민자의 물결’이라는 사회적 위협 앞에서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프랑스인들은 정부와 함께 보수화되어 가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주거지를 마련해줄 것을 요구하는 과거 프랑스의 박애주의적 구호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에게는 출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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