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4

2006.09.26

‘동식물 寶庫’ 둔촌洞 습지에 살어리랏다

도심 한복판 황조롱이 등 천연기념물 서식 … 최경희 할머니 등 습지 지킴이들 남다른 노력

  • 사진 김형우 기자 free217@donga.com 글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6-09-21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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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식물 寶庫’ 둔촌洞 습지에 살어리랏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 습지 전경.

    하늘은 높고,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은 상쾌하다. 숲의 물빛과 바람결은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자갈색 몸통의 오리나무가 이 숲의 주인. 서늘한 바람에 조바심이 난 걸까? 오리목 열매가 철 이르게 바람결에 올라타 흩날린다.

    습지를 내려다보던 최경희(70) 할머니의 시선이 어느 틈엔가 목을 축이는 어치에게로 향한다. 분홍빛 가슴패기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면서 쀼우~ 쀼우~ 휘파람 소리를 내던 어치는 날갯짓을 하면서 아파트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저 새가 어치라고요? 어머나, 곱기도 해라. 이제껏 몰랐어요.”

    최 할머니는 녹색으로 무표정하던 숲이 하루가 다르게 생김새를 바꿔가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좀체 변할 것 같지 않은 자연은 어느 틈엔가 옷을 갈아입는다. 쪽빛 하늘을 담은 물빛은 가을을 알리는 전령이다.

    “돼지감자(뚱딴지)로 김치 담가 먹을 때가 머지않았어. 겨울에 왔으면 맛을 뵈줄 수 있었을 텐데….”



    지난겨울, 최 할머니는 습지에서 자란 뚱딴지에 갓을 버무려 김장을 했다. “돼지감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기자에게 뚱단지김치 담그는 법을 설명하는 표정이 꼭 어린아이 같다. 뚱딴지김치의 쌉싸래한 맛을 떠올리니 겨울이 절로 기다려진다.

    산자락서 물 용출 … 서울시 두 번째 생태보존지역

    서울 강동구 둔촌동 둔촌주공아파트 뒤편의 습지(2만4696㎡)는 최 할머니에게 손자 같은 곳이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들어서자 청아한 새소리가 귓가를 가득 맴돈다. 최 할머니는 “철마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다르다”며 웃었다.

    이웃한 아파트 주민 가운데도 그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둔촌동 습지는 서울시가 지정한 생태계보존지역이다. 한강의 밤섬이 가장 먼저 지정됐고, 이곳은 두 번째로 생태계보존지역이 됐다.

    ‘동식물 寶庫’ 둔촌洞 습지에 살어리랏다

    최경희 할머니가 습지의 생태 환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습지는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산자락에서 물이 용출돼 이뤄진 습지로는 이곳이 서울에서 거의 유일해요. 아파트 숲 속에 이런 공간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축복할 만한 일이죠.”(이경재 서울시립대 교수)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최 할머니가 둔촌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튼 때는 1993년,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10년, 프랑스 파리에서 10년을 보낸 최 할머니에게 서울은 숨 쉬는 것도 거북한 회색도시였다.

    “집을 보러 왔을 때 개구리가 쩌렁쩌렁 울더라고. 살 만한 곳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그날로 그냥 계약해버렸어.”

    습지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최 할머니의 산책로였다(습지와 최 할머니의 아파트는 20m가량 떨어져 있다). 오리나무를 벗삼아 걷노라면 머릿속이 절로 맑아졌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최 할머니를 분노케 하는 일이 벌어진다. 강동구청이 이곳에 폭 12m의 도로를 낸다고 발표한 것이다.

    “방향을 아주 잘못 잡은 몹쓸 계획을 세웠더라고. 혼자 힘으로라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최 할머니는 혼자가 아니었다. 최 할머니를 좌장으로 마을 주민 수십 명이 도로 건설을 막겠다며 모였다. 이후 이 모임은 ‘습지를 가꾸는 사람들’로 발전한다.

    수년간 이어진 습지 지킴이 노릇은 고됐다. 호주머닛돈을 갹출해 복원 사업에 나선 ‘습지를 가꾸는 사람들’은 조를 짜 퇴적물을 걷어내고 쓰레기를 치웠다. “신작로가 생겨야 집값이 오른다”는 이웃들의 눈흘김엔 마음 깊이 상처를 입기도 했다. ‘독불장군’ ‘미친 사람들’이라는 거북스런 말도 들어야 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던가? 정부에 탄원서를 내고 대학 교수에게 식생조사를 맡긴 지킴이들의 노력은 2000년 결실을 맺는다. 서울시가 주민과 학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일대를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한 것.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관리 소홀로 습지는 다시 황폐해져 갔다. 최 할머니와 ‘습지를 가꾸는 사람들’은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주민들이 흘린 땀방울 덕분에 2003년엔 곤충, 양서류, 맹금류로 이뤄진 생태계가 꾸려진다. 2004년엔 습지에 다슬기가 돌아와 주민들을 달뜨게 했다.

    행정기관 관리 소홀 사람들 이해 부족은 여전

    서울시가 지정한 생태계보전지역에는 밤섬과 둔촌동 외에도 방이동·탄천·진관내동·암사동·고덕동 등이 있는데, 이들 중 제대로 관리된 곳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밤섬을 제외하면 둔촌동 습지가 거의 유일하다. 최 할머니와 습지 지킴이들의 노력 덕택이다.

    습지의 웅덩이엔 대농갱이, 버들매치 등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지표종이 나타났으며 멸종위기종인 식충식물 통발, 수중식물인 생이가래와 나자스말을 비롯해 부들, 박주가리, 환삼덩굴, 물억새 등 다양한 식물이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다.

    ‘동식물 寶庫’ 둔촌洞 습지에 살어리랏다

    둔촌동 습지에 빽빽하게 자리잡은 부들(좌).올빼미목 올빼밋과의 솔부엉이(우).

    서울에서 유일한 용출습지가 보존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알 턱이 없는 어치 한 마리가 최 할머니를 스치듯 날아 물박달나무 군집에 몸을 숨긴다. 습지에서는 어치뿐 아니라 천연기념물 제323호 황조롱이도 날갯짓을 한다.

    황조롱이가 뉘던가. 황조롱이는 황새목 맷과의 맹금류로 먹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사냥의 달인이다. 황조롱이가 둥지를 튼 것은 먹이사슬이 또렷하게 형성돼 있다는 뜻이다. 최근엔 고라니 똥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최 할머니는 너구리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웃한 일자산으로 통하는 포유류의 이동통로가 하루빨리 마련돼야 합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구청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최 할머니 반만큼이라도 당국이 신경을 썼으면 좋겠어요.”(강동송파환경운동연합 류주현 간사·40)

    이 도심의 별천지엔 꾀꼬리, 오색딱따구리, 솔부엉이, 흰눈썹황금새, 쇠백로, 파랑새 등 50여 종의 야생조류도 서식하고 있다. 야생조류보호협회 회원이기도 한 사진기자가 오색딱따구리가 사는 나무구멍을 찾아냈다고 말하자, 디지털카메라의 화면을 들여다보던 최 할머니는 소녀처럼 배시시 웃는다.

    ‘동식물 寶庫’ 둔촌洞 습지에 살어리랏다

    천연기념물 제323호 황조롱이.

    “붉은귀거북이 다시 나타나면 안 될 텐데….”

    최 할머니는 느닷없이 거북 얘기를 꺼냈다. 천적이 없는 붉은귀거북은 습지에서 개구리, 뱀, 맹꽁이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다. “누군가 거북을 방생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혀를 차는 최 할머니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습지의 적은 붉은귀거북뿐만이 아니다. 행정기관의 소홀한 관리와 사람들의 이해 부족으로 습지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습지의 완충지대에 편법으로 들어선 모 종교시설이 특히 문제다(종교시설이 들어설 수 없는 곳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근린시설로 허가를 받은 뒤 종교시설로 편법 운영되고 있다).

    습지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도 예전 같지 않다. 100명이 넘었던 ‘습지를 가꾸는 사람들’은 5명가량으로 줄었다. 냄비처럼 끓어올랐다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이 야속할 법도 하지만 최 할머니와 ‘습지를 가꾸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묵묵히 습지를 아들, 손자 다루듯 보듬을 것이다.

    ‘깐깐한’ 최 할머니가 만든 뚱딴지김치는 어떤 맛일까? 서릿발과 낙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초겨울 습지가 벌써부터 보고 싶다.

    최 할머니는 요즘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고희의 할머니가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을 들으면서 뚱딴지김치를 맛보고 싶다. 겨울이 기다려진다, 목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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