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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山 정기 받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대권주자는 물론 유력 정치인 30여 명 등정 … ‘야망’ 꿈꾸는 자에겐 ‘달콤한 유혹’

  • 산둥성 태산(山東省 泰山)=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泰山 정기 받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泰山 정기 받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태산 정상 부근에 각인된 오악지존(五嶽之尊).

2006년 3월30일, 중국 산둥성(山東省) 타이안(泰安)시 한 음식점의 오찬장. 손학규 경기도지사 일행을 맞은 자아쉐잉(賈學英) 시장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서너 차례 건배가 오간 뒤 자연스럽게 손 지사의 태산(泰山) 등정이 화제에 올랐다. 먼저 자아 시장이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선거 직전(1996년) 태산을 등정했다. 그 후 대통령이 됐다. 오늘 등정을 통해 ‘좋은’ 성공을 기원한다.”

한국의 대권주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손 지사에게 “태산의 정기를 받으라”는 자아 시장의 덕담이었다. 환한 얼굴의 손 지사는 ‘대한민국 경영론’으로 화답했다.

“태산에 올라 옥황정(정상)의 정기를 듬뿍 받아 경기도와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겠다.”

신앙이 살아 있는 중국인 “영혼의 고향”



식사를 마친 손 지사 일행이 태산으로 향한 것은 오후 2시경. 길은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태산 중턱에까지 간 손 지사 일행은 10여 분 케이블카를 타고 옥황정 바로 밑까지 올랐다. 옥황정과 천가를 둘러본 손 지사는 도교 의식에 따라 향을 피웠다.

“나라를 번성하게 하고 국민이 편안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올랐다. 태산의 정기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곧고 바른 자세를 가지는 것이 곧 태산의 정기이고, 우리나라에서 지도자들에게 바라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하는 그의 발언을 태산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태산을 향해 손 지사는 마지막 가슴속의 말을 던지고 하산 길에 올랐다.

“곧고 바른 자세로 나라를 경영하겠다.”

태산은 중국 중원에서 볼 때 해가 떠오르는 동쪽의 큰 산이다. 해 뜨는 동쪽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자 하늘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태산은 예로부터 성산(聖山)이자 신악(神嶽)으로 숭배의 대상이었다. 신악 태산에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 신앙이 살아 숨쉰다. 태산은 중국인들이 평생 꼭 한 번 오르고 싶어하는 영혼의 고향이다.

중국의 역대 권력자들은 태산의 이런 성스러움에 주목했고, 영웅들은 태산의 권위와 카리스마에 기대어 정권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진시황 이후 72명의 제왕들이 태산에서 하늘에 고하고(封) 땅에 알리는(禪) 봉선(封禪) 의식을 올린 이유다. 황제들은 봉선 의식을 통해 태평성대와 백성의 안녕을 빌었다.

태산의 신화와 전설은 새로운 권력질서 구축에 나서는 현대의 정치인들, 특히 ‘야망과 꿈’을 품은 정치인들을 유혹한다. 그 유혹에 이끌린 탓일까? 7월 한국의 또 다른 유력 대선주자도 태산을 찾을 전망이다. 은밀히 태산 방문을 계획 중인 이 인사의 한 측근은 “유동적이지만 태산 방문을 검토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태산 방문이 목적이 아니라 산둥성 전반을 둘러보는 일정”이라는 해명이 따랐지만, 태산이 품고 있는 신화와 전설 속의 ‘천기(天氣)’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5월14일 타이안시에서 만난 린화융(林華勇) 부시장의 설명이다.

“태산은 기도가 잘 이루어지는 곳이다. 정치적 꿈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소원을 빌면 꿈이 이뤄진다는 속설이 있다. 태산의 기를 받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도 예부터 전해 내려온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마당발인 이수성 전 총리. 1997년 집권여당의 강력한 대권후보로 거론됐던 그는 부족한 ‘천운’으로 중도에 낙마한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시사월간지 ‘신동아’ 6월호와 가진 인터뷰에서 “5·31 지방선거 후 신당을 창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 대권 도전에 실패했던 그가 정치 재개를 선언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체적인 내막을 알기는 어렵지만 정치 재개를 하려는 그의 동선(動線) 중 하나가 태산과 맞닿아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泰山 정기 받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도교 의식에 따라 향을 사르는 손학규 지사. 천가(天街) 입구(왼쪽부터).

이 전 총리가 태산을 방문한 것은 2005년 가을경. 측근 및 부인과 동행한 등정길에 이 전 부총리는 여러 명으로부터 덕담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이 전 총리의 한 측근은 “경제포럼 참석차 산둥성을 방문했다가 등정한 것뿐”이라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이 전 총리의 정치 재개 여부는 이 전 총리와 태산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태산의 높이는 해발 1545m다. 명성에 비하면 그리 높다고 할 수는 없다. 태산의 정상에 서면 하늘의 거리, 즉 천가(天街)가 살포시 속살을 드러낸다. ‘신선이 산다’는 천계(天界)로 들어서는 입구다. 하지만 천가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많은 관문이 가로막고 있다. 먼저 일천문과 중천문, 그리고 속세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는 남천문을 통과함으로써 속세와의 질긴 연을 끊어야 한다.

수직으로 뻗은 7412개의 계단을 밟으며 인간의 한계를 시험받는 과정도 극복해야 한다. 젊은이도 오르기 힘든 이 계단을 황제들이 오르기란 쉽지 않았을 터.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신념은 때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다리가 불편한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태산을 찾은 것은 1996년 6월경이었다. 15대 총선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 김 전 대통령은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신분으로 태산 등정에 나섰다. DJ를 수행해 태산에 오른 김옥두 전 의원의 설명이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타이안시에서 김 전 대통령을 초청한 것으로 안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밑에 가니 비가 내렸다. 안내를 맡았던 산둥성 관계자가 ‘정치인이 태산을 방문했을 때 비가 내리면 대통령이 된다는 속설이 있다’며 ‘김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덕담을 했다.”

수직 계단 7412개 젊은이도 힘들어

당시 DJ를 수행한 사람은 정대철, 박실 전 의원, 박상천 전 법무부 장관 등이었다.

DJ는 비를 뿌리고 안개가 자욱한 악천후 속에서 정상 정복의 의지를 불태웠고, 결국 정상을 밟았다는 게 김 전 의원의 설명이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등산을 거의 하지 않던 DJ가 정상 정복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은 그만큼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했음을 말해준다.

김일성 북한 주석도 생전에 태산의 명성을 탐해 다녀갔다고 한다. 한중교류협회 이세기 회장의 설명이다.

“몸이 불편해서인지 몰라도 그는 정상에 오르지 않았다. 그저 산 중턱까지 차를 타고 와 산세를 지켜본 뒤 조용히 내려갔다고 들었다.”

천가를 지나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그 이상은 인간 세상이 아니다. 천하에 이보다 더 하늘이 가까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곳에 송(宋)대에 지어진 벽하사(碧霞祠)가 있다. 벽하사는 역대 황제들이 즉위할 때 하늘에 신고식을 치른 곳이다. 요즘은 관광객들이 절을 하면서 속세의 한을 털어놓거나 소원을 빌고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이용된다.

벽하사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다. 5월 중순 이곳을 찾은 경북 청도 시의회 초대 의장인 김한태(엑슨 밀라노 대표) 씨는 “통속적 의미의 기운이 아니라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경건함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산둥성과 태산을 찾았던 정치인이다. 90년 중반 ‘태산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교하 노씨 집성촌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에 따른 것이다. 연희동 측은 노 전 대통령과 태산의 전설이 어우러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노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2000년 종친회 일로 산둥성을 방문했고 그때 노 전 대통령이 태산을 오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泰山 정기 받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김혁규 전 경남지사(우리당 의원)도 교류협력 등을 명분으로 산둥성을 서너 차례 방문했다가 태산을 찾았던 잠재적 대선후보다. 타이안시 한 관계자는 “김 의원이 지사 시절 태산에 올라 정기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김 의원의 한 측근은 전화통화에서 “경남지사 시절 산둥성에 경남공단을 만든 뒤 현지를 몇 차례 방문했다”며 “그러나 태산 방문 여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태산은 156개의 산봉우리와 138개의 절벽, 130개의 계곡, 72개의 샘을 품고 있다. 이런 골, 바위, 봉우리는 인간사의 풍상과 혼돈을 거둬내고 여유와 평화를 불러 모은다. 그래서 태산은 푸근하다. 어머니의 품 같다.

2001년 5월 말, 당시 민주당 김중권 대표는 당내 개혁세력으로부터 쇄신 요구를 받고 있었다. ‘대표 자리를 내놓으라’는 압력이 비등했다. 민주당 대권후보로 거론되던 그는 마음이 무거웠고, 곧바로 보따리를 싸 태산으로 향했다. 갈등에 휩싸인 그를 태산은 말없이 감싸 안았다. 등정 후 산둥성 고위 관계자가 주최한 환영만찬에서 그는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태산에 가면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기를 쓰고 정상에 올랐다. 주위 사람들이 중간에 힘들어 포기하자고 했으나 포기하면 아니 오르니만 못해 끝까지 올랐다. 오르면 오를수록 기를 더 많이 받는 느낌이었다.”

1년여 후인 2002년 3월 말, 파워게임에서 밀린 한나라당 의원들이 같은 모습으로 태산 앞에 섰다. 주인공은 김덕룡, 홍사덕 의원. 한 사람은 대권을, 또 한 사람은 서울시장을 염두에 둔 중진들이었지만 이회창 당시 총재의 일방독주에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던 시기였다. 태산을 오르면서 끊임없이 자문자답을 한 그들은 탈당할 것이라던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후일을 기약했다. 태산이 그들에게 준 가르침은 ‘인내와 기다림’이었을까.

“시조 통해 잘 알려져 있기 때문”

심대평 전 충남지사(국민중심당 대표)도 태산 준령에 족적을 남긴 잠룡 그룹의 일원이다. 타이안시 한 관계자는 “한국의 정·관계 인사들이 자주 태산을 찾는다”며 “이들은 대부분 태산의 정기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정종택 전 환경부 장관, 김한규 전 총무처 장관 등 공식·비공식적으로 태산을 오른 한국 정치인들은 줄잡아 30여 명이 넘는다.

한편 정치인들의 태산 방문을 둘러싸고 굳이 정치적인 시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산인 만큼 각계각층의 많은 한국인이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시각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땅인 산둥성에 있는 데다가 양사언의 유명한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잘 알려져 있어 수많은 한국인들이 찾는다는 얘기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중국 정부도 태산을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비근한 예가 중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자 중국의 일부 언론은 ‘21세기판 봉선대전(奉禪大典)’이라고 환호했고, 중국 정부는 태산의 신화와 전설을 강대국 중국 건설에 충분히 활용한 것.

태산을 찾는 한국 정치인들은 태산 신화 속에 숨은 이런 진실을 알고 있을까. ‘오악지존’(五嶽之尊, 태산·형산·항산·숭산·화산의 오악 가운데 으뜸), 태산은 오늘도 신화와 전설로 한국의 정치인들을 유혹한다.



주간동아 2006.06.06 538호 (p12~14)

산둥성 태산(山東省 泰山)=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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