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6

2006.05.23

도덕주의자, 이상 꿈꾸다 현실에 통곡하다

서적 보급 통한 ‘인간의 도덕화’ 주창 … 공신들 미움 사 순식간에 몰락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05-22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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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주의자, 이상 꿈꾸다 현실에 통곡하다

    조광조 선생의 초상화(위)와 정암 조광조와 우암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 도봉구 도봉서원에서 열린 `도봉서원 추향제.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왕이 된 이유는 생모를 잃은 불행한 개인사와 그의 성품도 작용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문화 창조의 열정이 잦아드는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거룩한 사업은 세종, 세조, 성종을 거치며 마감돼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추진할 만한 문화사업이 없었던 것이다.

    연산군의 황음무도는 할 일 없는 시대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가 양반들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았더라면 황음무도는 기록에 남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쫓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정(反正)을 주도한 공신 역시 도덕적 집단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부패로 말하자면 연산군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참신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반정세력은 깨끗한 이미지가 있는 집단을 불러냈는데, 이들이 바로 ‘사림(士林)’이다. 사림은 권력의 단맛에 취한 서울 양반들이 아니라, 성리학에 의식화된 지방의 선비들이었다. 사림은 성종 때부터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했지만, 연산군 시대에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거치며 패퇴를 거듭하던 중이었다. 반정세력의 요구에 따라 그들은 도덕적 상징이 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들이 주도한 개혁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반정세력에 의해 정계 진출 후 초고속 승진

    모든 인간의 도덕화! 이것이 사림 개혁의 골자였다. 사림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모든 개인이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도덕적 개인이 집합을 이룬 사회! 황홀하지 않은가. 사림은 개인의 대뇌에 도덕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그 프로그램에 의해 신체가 저절로 작동하는 상태를 바랐던 것이다. 당연히 구체적인 방법이 모색됐다. 그 방법이란 성리학에 근거한 도덕 교과서를 인쇄하고 배포하는 일이었다. 사림들은 기묘년(중종 14년, 1519) 정계에서 축출되기 전까지 ‘생산량을 늘리자, 부를 균등히 하자’는 식의 삶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는 정책은 단 한 가지도 추진하지 않았다. 오로지 도덕책을 찍어 전국에 배포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중종 초기에 국가가 발행한 도덕 교과서는 다양했다. 국역본 ‘삼강행실도’를 엄청나게 찍었고, ‘삼강’에 ‘이륜’을 더한 ‘이륜행실도’를 새로 편집했다. 또한 향촌사회를 교화하기 위한 ‘정속편’과 ‘여씨향약’, 그리고 여성들을 의식화하기 위한 ‘열녀전(列女傳)’ ‘여계(女誡)’ ‘여측(女則)’ 등을 저술하거나 편집해 보급했다. 그런데 이 모든 도덕책은 ‘소학(小學)’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사림들이 보급하고자 가장 노력했던 책이 바로 ‘소학’이었던 것이다.

    ‘소학’은 ‘대학’과 짝을 이룬다. ‘대학’은 ‘예기(禮記)’의 한 부분이었다. 주자(朱子)가 ‘예기’에서 떼내어 경전으로 격상시킨 ‘대학’은, 개인의 인격 수양에서 천하 경영의 정치학에 이르는 과정을 압축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총론이다. 일상적 차원에서 유가의 도덕적 원리들은 어떻게 실천돼야 할 것인가. 즉 일상의 국면에서 유가의 도덕적 원리에 합하는 구체적 행위란 어떤 것인가? 주자는 여러 고전을 인용해 ‘소학’을 엮음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소학’은 인간의 일생과 일상을 포괄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행위의 사례, 즉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 하루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구성하는 미세한 구체적 행위에 대한 명령이다. 세수할 때, 식사할 때, 홀로 있을 때, 부모를 대할 때 등등으로 말이다. 예컨대 식사 때의 규범을 보라.

    도덕주의자, 이상 꿈꾸다 현실에 통곡하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동죽서원. 1960년 지방 유림이 정암 조광조와 덕촌 최희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 밥을 뭉치지 말며, 밥을 크게 뜨지 마라.음식을 앞에 놓고 혀를 차지 마라. 뼈를 깨물어 먹지 마라. 먹다 남은 생선이나 고기를 다시 그릇에 놓지 마라.국을 들이마시지 말고, 국에다 다시 간을 하지 말며 이를 쑤시지 마라.물기가 있는 고기는 이로 끊고, 마른 고기는 이로 끊지 마라. -

    ‘소학’이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가는가. 사림이 모든 인간의 도덕화를 정책으로 밀고 나가려면 자신들부터 도덕적 존재가 돼야 했다. 그리고 표본으로서 최고의 도덕적 인간이 필요했다. 그 표본이 바로 조광조(趙光祖, 1482~1519)였다. 오늘날까지 조광조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부패한 훈구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인물로 기억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맑고 강직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소학’이 그 근거다. 조광조는 ‘소학’ 실천에 골몰했던 ‘소학동자’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김굉필이 어머니에게 보내려고 꿩 한 마리를 말리고 있는데, 지키는 사람이 소홀한 틈을 타서 고양이가 꿩을 물고 달아났다. 김굉필이 흥분하여 지키던 자에게 소리치며 꾸짖자, 제자 조광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어버이를 봉양하는 정성은 지극하시지만, 군자는 말과 안색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소자가 마음에 찜찜하여 말씀드립니다.” 충격을 받은 선생은 제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도 즉시 뉘우쳤는데, 네가 이렇게 말하니 정말 부끄럽구나. 네가 내 선생이지, 내가 네 선생이 아니다.”

    ‘소학’의 실천으로 ‘소학동자’라는 이름까지 얻은 스승을 도덕적으로 훈계한 제자 조광조는 그야말로 ‘소학’의 완벽한 구현이었다. 홍인우(洪仁祐)는 조광조가 꿇어앉는 자세가 습관이 됐고, 언제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있었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초저녁부터 삼경까지 꼿꼿이 앉아 꼼짝하지 않았고,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으며, 아무리 더운 여름의 짧은 밤이라도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말한다.

    스승에게까지도 군자의 도리 간언

    조광조는 중종 10년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그의 출세는 쾌속 항진이었다. 그는 4년만인 중종 14년, 곧 그가 죽음을 당한 기묘사화가 일어난 그 해에 대사헌까지 오른다. 그 과정에서 그가 추진한 정책의 핵심 역시 ‘소학’이었다. 중종 11년 11월4일 조광조의 우익 김안국(金安國)이 조강(朝講)에서 중앙과 지방, 그리고 민간과 학교에 ‘소학’을 널리 보급할 것을 요청했다. 여기에 장순손(張順孫), 기준(奇遵) 등 사림 출신들이 거들자, 중종은 이틀 뒤 예조에 ‘소학’의 보급을 지시했다. 보급의 범위도 양반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즉, 중종 12년 6월27일 홍문관이 ‘소학’을 ‘열녀전’ ‘여계’ ‘여측’과 함께 국문으로 번역해 보급하자고 건의해 허락을 얻어낸 것이다. 국문 번역본의 목적은 ‘여염의 소민(小民)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이 다 강습하여 일국의 집들이 모두 바르게 되는 데’ 있었다. 기묘사림의 ‘소학’ 보급 노력은 중종 12년 7월27일 “‘소학’은 풍속을 바로잡는 책이므로 많이 인쇄해 중외에 널리 반포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중종 11년부터 기묘사화가 일어난 중종 14년까지 사림들은 ‘소학’의 보급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다. 중종은 ‘소학’을 경연의 텍스트로 삼았다. 그의 실천은 성과를 냈다. “근래 성상께서 이처럼 ‘소학’을 높이 받드시기에 젊은 무리가 다투어 ‘소학’을 끼고 항간에 다닌다”는 것이었다(‘중종실록’ 12년 8월29일). 그럼에도 조광조 등은 미진하다면서 임금에게 계속 ‘소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마침내 그 철저한 근본주의자 조광조의 입에서 ‘소학’ 보급이 실효를 거두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근일에 신이 성균관에 가서 보니 입학(入學)하는 사람은 다 ‘소학’을 끼고 있고, 읽는 자도 많아졌습니다. 전에는 ‘괴이쩍다’고 하던 ‘소학’ 읽기를 지금은 예사로 여기고 있습니다.”(‘중종실록’ 13년 7월27일) ‘소학’ 보급이 얼마나 강력하게 추진되었는지는 중종 13년 7월2일 일시에 ‘소학’ 1300부를 찍어 관료와 종친에게 나눠준 일만 보아도 알 만하다. ‘소학’이 온 나라에 보급되었던 것이다.

    도덕주의자, 이상 꿈꾸다 현실에 통곡하다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을 배향한 죽수서원. 전남 화순군 한천면에 있다.

    조광조와 사림의 ‘소학’ 보급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 성과는 중종 14년의 기묘사화로 일시에 파산해버리고 만다. 조광조가 실각한 직접적인 계기는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추삭(追削)에 있었다. 정국공신이란 중종반정의 공신이다. 원래 이런 일에는 어중이떠중이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조광조 등은 별 공도 없이 공신의 칭호를 받게 된 어중이떠중이들의 공신 칭호를 취소하자고 주장했다. 어중이떠중이를 대표하는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은 분노했고,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조작해 조광조와 그의 당류(黨類)를 축출했다.

    기묘사화의 중심에도 ‘소학’이 있었다. 조광조가 쫓겨난 뒤 남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간에서 ‘소학’을 힘써 실천하게 된 것은 다 저들이 주장했기 때문이므로, 저들이 귀양을 간 뒤로 무지한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죄를 받은 것은 ‘소학’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듣기에 아주 민망합니다.”(‘중종실록’ 14년 12월16일) 요컨대 기묘사화는 ‘소학화(小學化)’와 ‘반소학화(反小學化)’의 대립으로 발생했던 셈이다.

    경직된 도덕주의가 불만·원한 초래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1년 전 익명의 투서를 단 화살이 의정부와 사간원의 대문에 꽂혔다(중종 13년 8월21일). 이 투서에는 조광조, 김안국, 기준 등 30여 명의 사림 출신 관료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들이 국정(國政)을 어지럽힌다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사관(史官)은 조광조 등의 개혁 정책을 일단 높게 평가한 뒤, 사람에 대한 과도한 도덕적 평가가 인재를 폐기한 탓에 노성(老成)한 사람들 중에는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경직된 도덕주의가 불만과 원한을 초래했던 것이다.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곤 역시 애초에 조광조 일파와 어울리려고 했으나, 조광조가 소인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원한을 품었다고 하지 않는가? 사관은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때 조광조의 명망이 가장 높아 그를 사모하고 본받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젊은이들은 ‘소학’의 도리를 말했고, 행동거지도 법도에 맞게 하려고 힘써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 성리학에 관한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은 이름만 있고 실천은 없다 해도 도학(道學) 하는 사람이라 했으므로, 문관(文官)과 선비들이 읽는 책이란 ‘근사록’ ‘소학’ ‘대학’ ‘논어’와 같은 책뿐이요, 문예(文藝)의 학문은 거들떠보지 않아 문장과 학술이 성종조보다 훨씬 쇠퇴했다.-

    ‘소학’에 근거한 사림들의 도덕주의는 문화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도덕적 행동이 잘못일 리 없다. 하지만 인간의 문화는 오로지 도덕만이 아니다. 조광조의 실패는 도덕적 근본주의에 있었던 것이다.

    선조(宣祖) 때 사림들은 정계에 복귀했다. ‘소학’도 부활했다. ‘소학’을 문제 삼으며 반대하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과연 도덕적 사회가 되었던가? 천만에! 사림은 정권을 잡자 권력투쟁에 돌입했다. 조선의 고질병인 당쟁(黨爭)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 부패했던 정권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소학’은 양반의 책이었다. 상민들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신체를 완벽하게 ‘소학화(小學化)’해 ‘소학’의 내용이 양반만의 독특한 사회적 습관이 되게 하는 것이 ‘소학’ 보급의 속내였다. 곧 ‘소학’은 조선의 지배계급을 만들어내는 장치였던 것이다. 조광조가 증오했던 부패한 인간들은 사라졌지만, 조광조의 기획은 대신 백성과 구별되는 ‘소학화(小學化)’한 양반들을 만들어냈고, 그들은 조선을 영원히 지배했다. 어떤가? 도덕주의에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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