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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이 부서진 재기의 꿈이여”

정태수 씨 마지막 희망 인천 재개발사업 물거품 … ‘황제경영’ 시대의 종언 상징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산산이 부서진 재기의 꿈이여”

“산산이 부서진 재기의 꿈이여”

정태수 씨는 요즘도 매일 아침 8시 무렵에 서울 대치동 은마상가 사무실에 출근한다. 5월4일 출근 모습.

1997년 1월 한보그룹 부도 이후 재기의 꿈을 불태워오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이 재계에서 ‘영원히’ 퇴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퇴장은 단순히 한 재벌 오너가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최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데서 알 수 있듯 탈법과 불법으로 기업경영을 해온 기업인은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기 어렵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태수 씨는 요즘도 자신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서울 대치동 은마상가 보광특수산업㈜ 사무실에 아침 8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출근해 오후 6시 무렵에 퇴근한다. 83세의 고령이지만 그의 재기 의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 사무실에서 그동안 한보철강 인수, 인천 왕길동 일대 재개발사업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정 씨는 2월 말 보광특수산업 직원 8명 가운데 6명에게서 사표를 받았다. 나머지 2명에게는 회사 정리 작업을 맡길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 한 관계자는 “직원들을 내보냈다는 것은, 허황되기는 했지만 마지막 재기의 꿈마저도 포기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은마상가 경매 낙찰돼 여기서도 쫓겨날 처지

정 씨가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었던 것은 인천 왕길동 일대 재개발사업이었다. 인천시가 이 일대 12만평을 시가화 예정지구로 지정한 2020년 도시기본계획안을 짰기 때문이다. 정 씨는 시가화 예정지구 안에 조카 및 보광특수산업 명의의 땅 4만2000평을 소유하고 있어 이 기본계획안이 최종 확정되면 다시 아파트 건설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3월 말 중앙도시계획심의위원회에서 시가화 예정지구 지정이 거부된 채 인천시 도시기본계획안이 승인됐다. 시가화 예정지구 주변에 들어서는 검단지구 등 인천시의 개발 계획이 너무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정 씨 땅은 당분간 주거용지로 변경될 가능성이 없어 정 씨의 마지막 꿈마저도 산산조각 난 셈이다. 현재 공원·녹지 지역으로 묶여 있는 정 씨의 땅은 평당 80만원 수준을 호가한다.

정 씨가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한보철강이었다. 정 씨는 2004년 5월20일 공개석상에 나타나 한보철강 인수 참여를 허용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이날 “누구보다 한보철강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 “보광특수산업 컨소시엄이 한보철강을 인수하면 총 부채 6조1000억원을 단계적으로 상환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여론은 냉담했고, 부도 기업의 옛 사주에게는 입찰 자격을 제한하고 있는 회사정리법 제221조에 따라 정 씨는 입찰에 참여할 수 없었다.

2월 말에는 은마상가마저 경매에서 낙찰돼 그는 이제 은마상가에서도 ‘쫓겨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은마상가 일부는 정 씨 개인 소유로 돼 있다 97년 부도 이후 조흥은행 측에서 채권 회수를 위해 경매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유찰됐다가 이번에야 주인을 찾게 된 것.

현재 정 씨의 관계 회사는 모두 3곳.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보광특수산업, 청소 및 경비 용역업체 HB관리㈜, 여행사 상아여행㈜ 등이다. 물론 기업 내용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한 관계자는 “상아여행의 경우 고정자산으로 버스 몇 대가 있긴 하지만, 회사의 단기부채 5억원을 안고 인수하라고 할 경우 1억원 이상을 제시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산이 부서진 재기의 꿈이여”

1995년 6월23일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1단계 준공식 참석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가운데가 정태수 당시 한보그룹 총회장, 그 오른쪽이 박재윤 당시 통상산업부 장관.

그나마 언급할 만한 수준의 기업이라고는 보광특수산업이다. 은마상가 임대업을 주 사업으로 하는 이 회사의 임대료 수입은 월 7000만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한보그룹 부도 이후 경매가 유찰되면서 그동안 연간 8억원 정도의 수입을 안겨준 셈이다. 이 회사의 명목상 대표자는 정태수 씨 아들 보근 씨의 부인이다.

HB관리는 정 씨가 세운 강릉영동대의 청소 및 경비를 대행하고 있다. 강릉영동대가 이 회사에 지급하는 용역비는 매달 3000만원 수준. 이 회사가 관리하는 경비요원 10명의 월급이 80만원 수준이므로 매달 2200만원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정 씨는 강릉영동대 예산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 정 씨는 서울 대치동 은마상가 일부를 2003년 9월~2005년 4월에 강릉영동대 간호과 학생들의 서울 임상실습 숙소로 임대하는 허위계약을 맺고 임대보증금 명목으로 학교 측으로부터 72억원을 받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2월 서울중앙지법은 정 씨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노령과 지병 등의 이유로 법정 구속하지는 않았다. 검찰이 이에 불복해 현재 2심에 계류 중인 상태.

당시 검찰에 따르면 학교에서 빼낸 72억원 가운데 임상실습 숙소 개조 비용으로 쓰인 돈은 3억원뿐이었다. 그중 20억원은 보광특수산업 등 소유 회사 운영비로 썼고, 가족 생활비와 소송비용으로 10억원을 썼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옛 가회동 자택에 살고 있는 정 씨 일가의 2년 월세 비용 4억8000만원도 여기에서 나왔다. 나머지 23억원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학교에 반납했다.

운과 배짱, 로비경영의 쓸쓸한 말로

이번 실형은 정 씨에게는 네 번째 징역형이다. 1991년 수서비리 사건으로 두 번이나 구속됐고, 97년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또다시 철창신세가 됐다.

정태수 씨는 부도 당시 한보철강과 한보에너지 등 22개 계열사를 거느린 한보그룹 총회장이었다. 충남 당진에 한보철강 공장을 짓고 최신 제철 공법으로 일관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모한 꿈이었다. 그 자신뿐 아니라 한국 경제마저 수렁으로 몰고 갔다. 당시 한보철강에 몸담았던 관계자는 “정태수 씨는 한보철강 부도 배경과 관련해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하지만 경영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상용화가 입증되지 않은 공법으로 제철소를 건설하다 보니 원가와 품질을 맞추지 못해 팔수록 손해 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부도로 이어지게 됐다는 것. 정 씨의 퇴장은 운과 배짱, 로비력만 믿고 사업을 크게 벌이면서 독선적인 경영을 하는 기업인은 반드시 망한다는 뼈 아픈 교훈을 남겨주고 있는 셈이다.



주간동아 535호 (p44~45)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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