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3

2005.09.20

영아차 마시니 겨드랑이에 바람이 솔솔

  • 입력2005-09-13 1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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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아차 마시니 겨드랑이에 바람이 솔솔
    나그네가 사는 데서 30여 리 떨어진 곳에 개천사라는 절이 있다. 개천사 스님들은 고려 때 이미 차를 만들어 마셨던 것 같다. 이색이 ‘개천사의 행제(行齊) 선사가 부친 차에 대하여 붓을 움직여 써서 답장하다’라는 다시(茶詩)에서 행제 선사가 만든 영아차(靈芽茶)를 이렇게 품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갑 지기 늙은이라 더욱 친하고/ 영아차 맛은 절로 참따랗구나/ 양쪽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 이노니/ 곧장 고상한 사람 뵙고 싶네.

    도대체 영아차가 어떤 맛이기에 ‘양쪽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 이노니(淸風生兩腋)’라고 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 시구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노동(盧同)이 쓴 다시에 ‘느끼노니 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이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다시의 고전 중의 고전인 노동의 시를 자신의 시에 인용했다는 것은 이색이 절창(絶唱)의 다시들까지도 꿰고 있었던 다인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茶詩 통해 영아차 품평 … 차 매개로 스님들과 깊은 교유

    조선 개국에 협력하지 않은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은 찬성사 곡(穀)의 아들이자 이제현의 문하생으로, 진사가 된 뒤 원나라로 가 국자감 생원 신분으로 성리학을 연구한다. 그러나 3년 만에 아버지 부음을 듣고 귀국한다. 이때 이색은 조정에 개혁 건의문을 올리고 나옹 선사의 탑명을 지어 신륵사와 첫 인연을 맺는다. 또한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대장경을 인쇄, 보관하고자 대장각을 짓는다. 신륵사는 유학자인 이색이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했던 절인 것이다.



    이색은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면서 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며 관리에 등용된다. 이색은 개혁주의자였던 것 같다. 비리의 온상이던 정방(政房)의 폐지를 건의하고, 유학에 의거하여 삼년상을 시행케 했다. 그리고 대제학이 되어서는 학칙을 재정한 성균관에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유학 보급과 성리학 발전에 공헌케 했다.

    그러나 공양왕 1년 위화도회군 사건으로 이색의 관운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태조 이성계가 권력을 잡으면서 장단에 유배되고 이듬해에는 청주의 옥에 갇힌다. 또 장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이성계의 명으로 한산백(韓山佰)에 봉해지면서 석방되나 조선에 끝내 나아가지 않고 여강으로 가던 중에 생을 마감한다. 훗날 사람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지킨 고려 충신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가리켜 삼은이라 한다.

    척불론(斥佛論)자임에도 이색은 스님들과의 교유가 아주 깊다. 아마도 차로 인해서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앞의 다시에서도 차를 보내준 행제 선사를 고상한 사람(高人)이라 지칭하며 어서 뵙고 싶다고 할 뿐만 아니라, 개천사의 담(曇) 선사와도 동갑내기로 친했다. 또 가지산 보림사 영공(英公)과도 차를 매개로 사귀었다.

    나그네는 나옹 선사의 부도를 들러본 뒤 강가 낭떠러지 위에 자리한 신륵사 대장기비(보물 제230호)로 발걸음을 옮긴다. 대장기비에는 이색이 대장경을 조성한 경위가 자세히 나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나옹 선사 제자들과 함께 조성한다는 그의 효성이 드러난 대목이다. 그는 유교에 따라 삼년상도 지내고, 불교에 의거해 재(齋)도 지낸 것이다. 여말선초 학자의 복잡한 의식구조를 유추해볼 수 있는 흥미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 가는 길

    이색의 효성을 엿보려면 여주의 신륵사를 가보는 것이 좋고 선비정신을 느껴보려면 장단의 임강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한산의 문헌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등을 들러보는 것이 좋다.



    茶人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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