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0

2005.04.12

백의정승 윤증 고택 300년 사연 켜켜이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 … 교촌리에는 공자 모시는 궐리사 유명

  • 글·사진= 신정일 / 황토현문화연구소장 hwangton@paran.com

    입력2005-04-08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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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의정승 윤증 고택 300년 사연 켜켜이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돼 있는 윤증 선생의 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돼 있는 윤증(尹拯, 1629~1714) 선생의 고택이 있다. 나는 논산이나 공주를 답사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이 집을 찾는데, 그때마다 나를 반겨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조선 숙종 때 대학자인 윤증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지금 모습은 19세기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 집은 파평 윤씨 세거지지(世居之地·대대로 살고 있는 고장)인 이산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마당이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정원 뒤편에는 사랑채가 있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 중앙에 2칸의 사랑방과 그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아 먼산을 바라보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최근엔 공사를 하고 있어 아쉽게도 그런 정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사랑채를 지나면 안채로 이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안채 넓은 대청에 왼쪽으로는 윗방 2칸과 안방 2칸을 두고 오른쪽으로는 건넌방 2칸을 두었다. 안채 대청에 딸린 문을 열면 잘 정돈된 장독대가 보인다. 오래전에도 동학 취재 때문에 이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종부(宗婦) 양병호 님과 후덕한 며느리가 김치를 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대가의 가풍답게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전주에서 동학 취재차 들렀다고 하자 “동학?” 하며 말문을 열었다.

    “돌아가신 어른들에게서 들은 얘긴디, 동학군은 대적(大敵)이라고 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혁명가들이라고 불렀답니다. 동학군들이 전라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렀는데, 그때가 한겨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집 어른들이 많이 먹이고 많이 줘서 보내라고 했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사용하던 나무가 지금도 우리 집에 있어요. 동학군들 중 몇 사람이 대문간에다 불을 질렀는데 그 자리가 저기요” 하며 대문 위쪽의 검게 그을은 서까래를 가리켰다. 100여년 전 분연히 일어났던 이 땅의 민중은 무언으로 아픈 역사를 말하고 있다.

    송시열과 사제지간 싸움, 후학들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윤증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이다. 그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병자호란을 만나 가족이 강화도로 피란 갔다가 어머니가 그곳에서 자결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어머님 한 분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는가”라며 평생을 학문에만 열중한다.

    김집에게서 학문을 배운 그는 김집이 “주자학에 정통한 송시열에게 배우라”고 추천하자 29세가 되던 해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 사사(師事)받으며 ‘주자대전’을 배웠다. 아버지 윤선거는 그때 아들 윤증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은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워라. 하지만 단점도 알아두어라.” 윤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송시열의 성격을 아들이 배울까 걱정돼 송시열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주고자 했다. 그러나 윤휴와 송시열이 ‘예송(禮訟)’논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은 윤선거가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백의정승 윤증 고택 300년 사연 켜켜이

    윤증 고택의 장독대.

    윤선거가 세상을 뜨자 윤증은 아버지 묘비명을 써달라고 송시열을 찾아간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처자를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란 갔고, 청군이 쳐들어왔을 때 처자와 친구는 자결했는데 성을 탈출하여 살아남은 일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던 일을 들먹인다. 송시열은 선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며 윤증을 소홀히 대한다. 이에 분개한 윤증은 송시열과 사제지간의 의를 끊는다. 그 뒤 송시열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론’이 된다. 그리고 여러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사간 정호등이 상소하여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헐뜯자 숙종은 “아버지와 스승 중 누가 더 중한가, 아버지가 욕됨을 받는데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며 윤증을 옹호한다. 윤증의 학문이 높고 깨끗하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자 숙종은 그에게 대사헌, 좌찬성 등의 벼슬을 내린다. 1709년에는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고 출사(出仕)를 종용했지만 윤증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고 우의정에 올랐다고 해서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윤증은 83세에 학질을 앓다가 이듬해 정월에 세상을 떴는데, 죽기 직전에 후학들의 당파 싸움을 걱정하면서 묘비에 ‘착한 선비’라고만 쓰도록 일렀다.

    백의정승 윤증 고택 300년 사연 켜켜이

    교촌리 궐리사.

    노성천과 연산천 만나는 ‘초포’ 정감록에서 거론

    숙종은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아쉬워하며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도다. 나 또한 그를 흠모했지만 평생을 두고 그의 얼굴 보지 못했네. 그가 떠났다 하니 내 마음 깊이 한 쌓이네.”

    계룡산이 눈앞에 들어오는 곳에 노성이 자리잡고 있다. 노성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노산(魯山)은 현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으로, 일명 성산(城山)이라고도 불린다. 노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9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네 개 있다.”

    그러나 노산성은 지금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노성의 백제 때 이름은 열야산현(熱也山縣)이었다. 신라 때는 이산현 웅주의 속현이었고, 고려 현종 9년까지 공주에 속해 있다가 그 후에 나뉘어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때 석성현을 합하여 이성현이라고 했다. 태종 24년에 연산-은진을 합해 은진으로 부르다 효종 7년에 노성현으로 분리되고, 고종 32년에 군으로 승격 11개 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논산군 노성면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노성에 대해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고, 기후가 차며, 호수가 384호요, 인구는 159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윤증 고택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교촌리 궐리사 사당이 있다. 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봄가을에 제사 지내는 곳으로 숙종 42년인 1716년에 건립했다.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오산과 이곳 두 군데가 있다. 궐리사 동쪽에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제사 지내는 여제단 터가 있고, 향교 마을 앞에는 윤증의 아내 권씨의 열녀 정문이 있다.

    백의정승 윤증 고택 300년 사연 켜켜이

    노성향교.

    향교 마을 남동쪽에 있는 구앞술막은 예전에 주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두사리의 군량들은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칠 때 이곳에다 군량미를 쌓아두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또 정감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도 있는데, 예전에 노성 땅이었던 논산시 광석면 향월리의 노성천과 연산천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 잡은 초포, 즉 풋개가 그곳이다. 정감록에 따르면 “풋개에 배가 다니고 계룡산의 돌이 희게 되면 계룡에 도읍지가 될 것을 가히 알 때가 되리라” 했다는데, 금강 하구 군산과 서천 사이에 하구둑이 생기면서 배가 들어올 날은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계룡산 자락 신도안 일대에 군 사령부가 들어서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공주시 장기와 연기 일대에 행정 복합도시가 들어선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니 정감록의 예언은 그냥 헛된 말은 아니었던 듯도 싶다.

    가볼 만한 곳

    멀지 않은 논산시 부적면 충현리에 계백 장군 묘라 전해오는 무덤이 있고, 가까운 계룡산 자락에 신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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