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염불암.
허균이 실존했던 홍길동을 참고하여 ‘홍길동전’을 썼는지도 모른다. 소설가는 역사가들이 단죄한 인물을 변호하고 누명을 벗겨주기도 하니까. 역사는 홍길동을 도적으로 몰지만,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의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지금 나그네는 오대산 우통수(于筒水)의 물로 차를 달이고 싶다고 노래한 허균의 다시(茶詩)를 떠올리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전략) 봄 지난 들꽃은 병든 눈을 닦아주고/ 비 갠 뒤 산새들은 조용한 잠을 청하는 듯/
찻사발에 달인 차로 소갈증이나 낫게 하고 싶지만/ 어찌 우통(于筒)의 으뜸가는 샘물을 얻으랴.
우통수는 남한강의 발원지인데, 다천(茶泉)의 성지로서 다인들의 발길이 잦은 샘이다. 우통수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 문신 권근의 ‘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수정암이란 상원사 1인 선방인 염불암을 말한다. 나그네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우통수는 염불암 입구에 있다.
허균은 조선 선조 2년(1569)에 명문가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서경덕의 제자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엽(曄)이고, 임진왜란 직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제며, 봉()과 난설헌(蘭雪軒)은 동복형제다.
남한강 발원지 다천의 성지
허균은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유성룡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이달에게서 시를 익혔다. 그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해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지만 기생을 가까이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만다. 곧 복관하지만 수안군수 때 불상을 봉안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불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또다시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막힘없는 학식으로 이름을 떨쳐 삼척부사가 되기도 하지만, 또다시 불교를 믿는다는 감찰을 받아 파직되어 부안으로 내려가 기생 계생(桂生)과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柳希慶)과 교분을 나눈다. 이때 호남지방의 의적 홍길동의 얘기를 전해 듣지 않았을까 싶지만 정확한 고증은 사학자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후에도 그는 몇 번의 복관과 파직을 거듭하다 결국 역적모의했다는 죄명으로 동료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는 정해진 규범 같은 것을 따르기보다는 그것을 거부하는 자유인의 기질이 강했던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의 학문과 재주를 인정하여 조정에서는 번번이 복관을 시키지만, 그는 제도권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일탈해 살았던 것이다.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이이첨 같은 권세가에게 붙어 아부도 하고, 유교국가에서 감히 불교를 신봉하는가 하면 양반들이 멸시하는 서류(庶流) 출신이나 천민, 기생과 어울렸던 것이 그 예다.
우통수에 이르러 물 한 모금으로 산길을 오르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른다. 우통수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안개처럼 모호했던 허균이 차를 달이고 싶어했던 샘물이다. 이 샘물이 한 방울 흘러 한강이 된다. 나그네는 지난해 이 샘물로 너와집 암자 염불암의 선승과 함께 차 한잔 대신 점심 공양 때가 되어 국수를 끓여 먹은 적이 있다. 우통수의 물로 차를 달여 마시고 싶다는 허균을 생각하며.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에서 진부인터체인지로 나와 전나무 가로수
길로 곧장 가면 월정사, 상원사에 이른다. 거기에서 2.8km 떨어진 곳에 우통수와 염불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