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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의 진원지인가 진실의 저수지인가

정치 주제 ‘허브 사이트’ 폭로와 제보 넘쳐 … 흥미로운 내용, 시대 흐름 맞으면 본격적인 퍼 나르기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음모의 진원지인가 진실의 저수지인가

음모의 진원지인가 진실의 저수지인가

주요 정치토론 사이트들

신기남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 의원의 당 의장 퇴진을 불러온 ‘오장 부친 사건’은 한 네티즌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주인공인 윤태곤씨(30)는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표방한 정치토론 사이트 ‘진보누리’에서 ‘으허허’ ‘루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해왔다. 윤씨는 “신의원이 당 의장 취임 직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찾아가 부친 사이의 친분을 강조한 데 의구심이 들었다. 신의장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혼식에 부친 신상묵씨가 청첩인이었다’고 했다. 같은 대구사범 출신으로 한 사람은 일본군에 투신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무얼 했을까 궁금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우선 신의원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거기에는 부친 경력이 자랑스럽게 소개돼 있었다. 대구도경 보안과장, 빨치산 토벌대장(서남지구 사령관)을 거쳐 경무관에까지 올랐다 했다. 거기서 의혹이 커졌다.

해방 후 경찰에 입문해서는 그렇게 빨리 진급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던 윤씨는 ‘매일신문’에서 “신상묵씨는 잠시 훈도(교사) 생활을 하다 일본경찰이 된 뒤 광복 후 경찰에 다시 몸담았다”는 문장을 발견했다. ‘청년 박정희’라는 연재물의 한 구절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가던 중,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윤씨는 “개정안이라지만 문제가 있었다. 특히 신상묵씨처럼 일제시기를 거쳐 미군정, 자유당 시절까지 경찰 고위간부로 승승장구한 인물이 조사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고 했다. 7월13일, 윤씨는 ‘진보누리’ 게시판에 ‘친일진상규명법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중 신의장 부친에 대한 내용은 글 말미 두세 줄에 불과했다. 애초 신의장을 공격하려던 것이 아니라 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한 네티즌 법 문제 지적하다 신기남 사건 밝혀져





그러나 윤씨의 문제 제기는 몇몇 신문의 ‘받아쓰기’ 보도와 신의원의 강력 부인, ‘신동아’의 추적 취재 등을 거쳐 결과적으로 여당 의장직 사퇴, 친일진상규명 본격화라는 대격변을 불러왔다. ‘신동아’ 보도 후 우리당 관계자들은 “처음 폭로자가 아예 작심을 하고 달려든 거다. 자료를 들고 먼저 민노당에 찾아갔다가 거절당하자 한나라당에 가 공론화를 종용했다더라”는 등의 발언을 하고 다녔다. 우리당 이부영 의장, 전봉주 의원 등도 ‘배후설’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윤씨는 “음모설이라니 황당할 따름이다. 할아버지가 독립투사여서 관심이 큰 주제였을 뿐이다. 신상묵씨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우리 할아버지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에 고통받다 51살에 작고하셨다. 신의장이 ‘친일파 자손은 3대가 떵떵거리고…’ 운운한다든가, 그런 아버지를 정치적 후광으로 삼으려 한 점 등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이 모두는 결국 신의장이 자초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신의장 부친 오장 사건은 한 네티즌의 책임성 있는 문제 제기에 언론의 추적 보도가 보태져 나름의 ‘성과’를 낳은 경우다. 그러나 한편 인터넷에는 확인되지 않은 의혹의 무차별적 제기와 이를 어떻게든 ‘활용’해 정략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인터넷 폭로가 현실 정치를 흔들기까지는 나름의 과정이 있다. 먼저 한 네티즌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투영한, 혹은 객관적으로 문제라 생각하는 주제에 대한 글을 올린다. 평소 주로 드나드는 사이트에만 올릴 수도 있고,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동조자-반대자 간 논쟁이 활발한 사이트 여러 곳에 동시에 쏠 수도 있다. 그것이 흥미롭고 나름의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글이면 네티즌들의 퍼 나르기가 시작된다. 설사 객관성이 떨어진다 해도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부합하면 ‘마우스 품’ 팔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각 정파의 ‘자발적 알바(아르바이트)’들이다.

이런 글들은 몇몇 허브 사이트에 집산해 뜨거운 논쟁 대상이 된다. 정치적 주제와 관련해 이름난 허브 사이트로는 민노당 지지 성향의 ‘진보누리’ ‘대자보’, 우리당 지지 색이 강한 ‘서프라이즈’ ‘노하우’ ‘국민의 힘’ ‘조아세(조선일보없는아름다운세상)’, ‘건전한 보수’를 표방하는 ‘독립신문’ ‘업코리아’ ‘데일리안’, 민주당 지지 노선이 뚜렷한 ‘남프라이즈’, 권력을 향한 전방위 공격을 자처하는 ‘브레이크 뉴스’ 등이 있다.

의혹을 제기한 글은 올려진 사이트가 어디냐에 따라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친노 사이트에 반노 정서가 담긴 글이 올라가면 무차별 공격을 당해 생명력을 잃는 것이 당연지사. 우익 사이트에 올라간 친노 성향 글 또한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대신 사이트 성격에 부합하는 글은 수많은 지지의 댓글을 단 채 긴 생명을 보장받는다.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비방, 인신공격 또한 난무한다.

각 정당과 정파들이 이를 가만두고 볼 리 없다. 떠도는 이야기 중 각자의 입지 강화에 도움이 될 만한 것만 쏙 빼내 공론화한다. 그러다 상대편 반발이 심하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발뺌을 하고 만다. 객관성이 떨어져 네티즌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얻지 못한 내용이라도 일단 도움이 될 것 같으면 활용부터 하고 본다.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환영이다.

2003년 1월 정계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인터넷 살생부’ 사건만 해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한 공로를 기준으로 민주당 의원들을 ‘공신’ ‘역적’ ‘역적 중의 역적’ 등으로 분류한 글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닌 것. ‘피투성이’라는 아이디(ID)를 쓰는 네티즌 왕현웅씨가 최초 작성자로 밝혀졌지만, 마침 분당 문제로 어수선하던 민주당 측은 “동네 철공소 직원이 이렇게 정확한 내용을 알 리 없다”며 배후설을 제기하는 등 강력 대응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이를 편 가르기와 ‘보이지 않는 단죄’의 도구로 적절히 활용하기도 했다.

“네티즌 정치권 검증은 이제 시작 … 우리당 긴장해야”

당시 정치사이트 ‘서프라이즈’에 몸담고 있던 인터넷 논객 변희재씨(‘브레이크뉴스’ 편집장)는 “애초 왕씨가 ‘서프라이즈’에 올린 글에는 오류가 상당히 많았다. 그것을 네티즌들이 직접 나서 수정해 (사이트에) 올리고, 또 수정해 올리고 하는 과정을 수십 차례 거쳤다. 그래서 그렇게 정확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왕씨는 노사모 초기 멤버, ‘서프라이즈’는 대표적 친노 사이트다. 이들이 발휘한 ‘정치적 의협심’은 결국 애초 의도와 상관없이 민주당 분당과 우리당 탄생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2000년 5월 터진 ‘광주 386 술 파티’ 건은 보수 집단의 총공세로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경우다. 애초 임수경씨가 386 운동권 내부 사이트인 ‘제3의 힘’에 올린 글은 겨우 40여명이 본 다음 임씨 동의 아래 삭제됐다. 그런데 그 40여명 중 누군가가 이 글을 여기저기 퍼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고급 단란주점’ ‘여성을 껴안고 흐드러진 술자리를 벌였다’는 등의 자극적 표현이 보태졌다. 이름이 언급된 이들이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음은 물론이다. 일이 너무 커지자 임씨 또한 “그들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여론의 ‘마녀사냥’은 끝이 난 다음이었다.

인터넷을 ‘음모의 블랙홀’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인터넷 논객 이창은씨(‘대자보’ 편집장)는 “인터넷 검증의 정확성과 건강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 맞받아쳤다. “물론 누군가 정치적 의도에서 특정한 사실을 인터넷에 흘릴 수 있다. 또 그것을 자체적으로 열심히 퍼 나르며 공론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현재의 사회 흐름과 방향을 같이하는 ‘공적인 주제의 흡입력 강한 팩트(사실)’가 아니라면 힘을 받기 어렵다.” 근거 없는 확증을 일삼는 것은 네티즌이 아니라 정치권이라는 주장이다.

변희재씨는 “네티즌의 정치권 검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특히 우리당 의원들은 더 긴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네티즌은 강자만 건드린다. 특히 도덕·개혁적 깃발을 들고 나대는 이들이 타깃이다. 인터넷에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한없이 약하다. 그들을 공격한들 무슨 반향이 있겠나. 이제 네티즌들은 (정치적 폭로에) 재미를 들렸다. 하루 1~2시간만 잡아 매달리면 다 나오지 않나.” 인터넷으로 우뚝 선 우리당이 바로 그 인터넷으로 인해 끝 모를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주간동아 451호 (p20~22)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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