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0

2004.06.24

검증당하는 사상 검증기관

경찰 공안문제연구소·검찰 민주이념연구소 … “한 가지 생각 강요 시대착오” 변화 촉구 거센 목소리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6-17 16: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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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증당하는 사상 검증기관

    민변 민가협 등 시민사회단체에선 공안문제연구소의 표현물 감정 결과가 비객관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보법 폐지를 요구하는 민가협 회원들.

    보안상 인터뷰하기 곤란합니다. 우리 연구소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어서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입장을 발표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트집을 잡을 겁니다.”

    그동안 ‘사상 검증기관’ 구실을 해온 공안문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이런 말로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제17대 국회가 개원하고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개폐 논의가 또다시 점화되면서 경찰의 공안문제연구소와 대검찰청의 민주이념연구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도서 유인물 등 표현물에 대한 이들 기관의 감정 결과는 수사기관이 기소할 때 결정적 증거로 삼고, 법원이 이를 근거로 유죄 여부를 판단해왔다. 그럼에도 이들 기관의 실체가 무엇이고, 어떤 기준에 따라 사상을 검증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사상 검증 따라 기소와 유죄 불구 객관적 잣대 불투명

    “요즘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행정정보 공개 청구가 많이 들어오고, 표현물 감정의 잣대에 대한 의문이 많은 것 같은데 석·박사급 연구원들이 하는 만큼 객관적 잣대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그러나 이 관계자가 말하는 ‘객관적 잣대’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의뢰해 내놓은 ‘국보법 적용상에서 나타난 인권 실태’ 보고서를 통해 이들 기관의 행적을 공개했지만 전모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4월 말 건국대 법대생 이호영씨는 공안문제연구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4월 초 연구소의 활동 내용에 대한 이씨의 정보공개 청구에 대해 부분 공개를 결정, 통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씨가 공안문제연구소를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한 이유는 같은 학과 선배가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등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건 때문이다. 지난해 7월 건국대 김종곤씨 등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맑스를 위하여’(알튀세르 지음) ‘자본론’(마르크스) ‘신좌파의 상상력’(조지 카치아피카스) 등 책의 내용 일부를 인용해 만든 팸플릿이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3월 중순에도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당시에는 비공개 결정이 나왔다. 이번에 이씨가 제기한 질문은 △증거물 감정시 위법성 여부를 따지는 객관적 기준 △감정물을 분류하는 세부등급 기준 △이제까지 이루어진 감정의 내용 및 감정자 △연구원의 인적사항과 실적 등이다.

    이 가운데 부실하나마 답변을 보내온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문건을 감정할 때 내용이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 사상이론 등에 부합하는지를 연구관 개인의 전문적 식견에 의해 판단하되 증거물의 위법성 여부는 판단하지 않는다는 내용. 둘째는 감정물을 좌익, 용공, 문제없음으로 구분한다는 내용. ‘좌익’은 내용이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 사상이론 및 전략 전술상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하고 혁명 투쟁을 선전·선동하는 것, ‘용공’은 이 범주에 들지만 실천적 투쟁방법과 목표 등이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지 않은 것, 그 외는 ‘문제없음’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이런 답변을 받은 이씨는 ‘연구관 개인의 식견’이 어떤 객관성과 합리성을 갖고 있는지, 분류 기준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등 의구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조만간 ‘비공개·부분공개 결정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소송을 맡은 조범석 변호사는 “좌익이니 용공이니에 대한 판단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기준을 분명히 알기 어렵고, 그것을 판단하는 연구원 개개인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확히 따질 필요가 있다”고 소송 취지를 설명했다.

    검증당하는 사상 검증기관

    한 시민이 국회 앞에서 국보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0년 민노당 활동도 ‘용공’ 취급 … 설립 취소 소송 움직임

    공안문제연구소의 운영규칙에도 감정원칙(제16조)이 제시돼 있지만 많은 경우 기준이 논리적으로 비약되거나 단순도식화하는 측면이 있었다. 예컨대 2000년 5월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학생위원회의 ‘열린 주장과 대안’이라는 문건에 대한 감정에서는 ‘투쟁이념’이나 ‘변혁투쟁에 의한 타도’(오모 연구관) 같은 말을 쓰면서 합법정당인 민노당의 활동조차 ‘용공’으로 몰았다. 공안문제연구소는 1988년 10월 경찰대 부설기관으로 설립됐다. 치안본부 시절에는 비슷한 기능을 담당하는 내외정책연구소가 남영동 대공분실 안에 있었다.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개편된 이후 서울경찰청 산하에 보안문제연구소가 신설됐는데 직원들이 서울시 전문직 공무원 신분으로 서울시 예산을 받는 것으로 돼 있어 94년 내무위 국정감사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동안 연구소는 좌익 이념과 세력에 대한 연구 등을 임무로 내세웠지만 60%가 넘게 ‘공안관련 사건에 관한 문건 감정 및 분석’에 치중했다. 현재 공안문제연구소 소장은 경찰 고위인사 출신의 전병용씨가 맡고 있다. 연구원 중 박사학위 소지자는 9명, 박사학위 수료자는 3명이며 직제는 서무과 연구1부 연구2부 연구분석과로 나눠져 있다.

    1999년 국정감사 당시엔 연구관 및 연구원 16명, 경찰행정직 4명, 기능직 5명 등 모두 25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도 근무하고 있을 만큼 베테랑들이다. 연구관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연구가 전공인 이들도 있지만 한국 교육철학사상 연구, 일제하 개신교의 분파 형성에 관한 연구, 가정 소실에 나타난 갈등구조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이들도 있다.

    1998년 당시 한 해 동안의 감정실적은 모두 6540건. 14명의 연구원이 한 해 동안 평균 467건을 감정해 단순계산만으로도 한 사람이 평균 2일에 3건을 감정했다. 99년에는 8월까지 7557건을 감정했는데, 한 연구원이 하루 평균 2.2건 넘게 감정한 것이다.

    검찰의 ‘사상 검증기관’인 민주이념연구소는 1997년 1월 ‘북한의 대남 도발 공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이적표현물 분석업무를 체계화 전문화’하기 위해 대검찰청 산하에 설치됐다. 현재 소장은 대검 강충식 공안부장, 부소장은 안창호 공안기획관이 맡고 있다. 국가안보 통일 이념 등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을 두고 대검 공안담당 검찰연구관 등 법조인으로 구성된 연구위원들이 이적표현물 분석 및 평가 업무를 맡아왔지만 공안문제연구소에 비하면 활동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대검청사 7층에 연구소가 있지만 소장과 부소장이 모두 겸직이어선지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연구소는 문건 도서 신문광고 비디오테이프 노래가사 등을 분석해 이적성이 인정된 사건은 산하 검찰청에 수사 지휘를 하게 하거나 안기부 등 의뢰기관에 통보해왔다. 1997년 분석한 164건 가운데 이적성을 인정한 경우가 79건, 이적성 부정이 64건, 분석 불필요가 21건이었다. 이후 98년에는 318건(인정 26, 부정 8, 불필요 284), 99년 436건(인정 36, 부정 15, 불필요 385), 2000년 2건(인정 2), 2001년 108건(인정 2, 부정 9, 불필요 97), 2002년 17건(인정 7, 부정 10)의 결과를 내놓았다.

    검찰 공안 기능의 축소, 국보법 개폐 주장 등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사상적 근거가 돼왔던 이들 기관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김승교 변호사는 “민주이념연구소와 공안문제연구소는 그동안 균형감과 객관성을 상실해왔기 때문에 민간시설화하든가,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변호사들 사이에선 공안문제연구소의 설립 자체를 취소하는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심재환 변호사는 “일반 국민을 상대해야 할 국가기관이 이념적 편향성을 가진 이들로 채워져 있고, 시민들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한 가지 생각만 강요하는 것은 국가기관으로 운영될 근거가 없으므로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베일에 가려진 채 한때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사상 검증기관’들의 수난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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