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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운동권 전성시대

맏형 ‘71동지회’, 막내 ‘386’

제도 정치권 진입한 운동권 계보 … 중간 민청학련 세대는 노무현 정권 핵심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맏형 ‘71동지회’, 막내 ‘386’

맏형 ‘71동지회’, 막내 ‘386’
6월9일 모든 조간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해찬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 의원을 새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는 뉴스를 1면 머릿기사로 다뤘다. 이날 일부 신문은 전날 밤 이 총리지명자가 총리 인준청문회 등 임명동의절차 등을 보고하기 위해 의원회관으로 찾아온 국무총리 김대곤 비서실장과 반갑게 악수하는 사진을 싣기도 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는 “운동권 출신이 우리 사회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진”이라고 말했다.

이 총리지명자는 첫 ‘운동권 출신 총리후보’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서슬 퍼런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학생운동 탄압사건인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과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으로 구속돼 3년5개월여를 복역한 ‘민청학련 세대’다. 운동권 시절부터 기획전략통이었던 그는 88년 13대 총선을 통해 제도 정치권에 들어간 이후 10여년간 여권의 선거운동을 총괄했고 김대중 정권에서는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대곤 실장은 일반인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균관대 운동권 ‘대부’로 통한다. 성균관대 법대 68학번으로 71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 당시 성균관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이끌었다. 김실장은 당시 등록금이 없어 70년 2학기부터 미등록 제적상태였기 때문에 당국의 추적권 밖에 있었다고 한다. 위수령 세대들은 90년 ‘71동지회’를 결성, 끈끈한 유대를 과시하고 있다. 2001년에는 위수령 발동 30주년을 맞아 기념문집 ‘나의 청춘 나의 조국’을 펴내기도 했다.

‘71동지회’ 회원들은 어느새 우리 사회의 지도급 인사로 성장했다. ‘차기’에 대한 꿈을 착실히 키워가고 있는 재야 운동권의 ‘대부’ 우리당 김근태 전 원내대표를 비롯해 유인태 이호웅 원혜영 김재홍 이석현(이상 우리당) 김문수 의원(한나라당), 심재권 배기운 이신범 전 의원, 이태복 전 대통령복지노동수석비서관, 조순용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장기표 전 녹색사민당 대표, 김대환 노동부 장관 등이 회원이다. 대부분이 68~71학번이다.

이 가운데 김근태 전 대표와 유인태 의원은 특이하다. 당시 서울대 법대 3학년으로 제적과 함께 군대에 끌려갔던 SK투신운용 최명의 사장은 “김 전 대표는 서울대 상대 65학번이지만 군대 제대 후 복학해 장기표 전 대표, 심재권 전 의원과 함께 서울대 운동권을 주도했기 때문에 68~71학번이 대부분인 ‘71동지회’ 회원이 됐고, 유인태 의원의 경우 74년 민청학련 사건에도 연루돼 이철 전 의원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4년 4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70년대 후반 이후 학번 열린우리당 주력군 형성

민청학련 세대는 노무현 정권의 핵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해찬 총리지명자를 포함해 유인태 의원이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지금도 대통령비서실에는 ‘촌닭’ 정찬용 인사수석, 장준영 사회조정1비서관 등이 있다. 정동영 전 우리당 의장도 군법회의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노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우리당 이강철 국민참여운동본부장도 중용이 예상되는 인물이다.

민청학련 세대는 현재 사회 각 분야에서 당시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들은 94년 기념사업회도 만들었으나 올 4월3일 사건 발생 30주년을 맞아서는 제대로 기념도 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당시 민청학련 지도부였던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는 “민청학련 출신 가운데 정치권으로 진출한 사람이 많아서인지 대부분이 선거운동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모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맏형 ‘71동지회’, 막내 ‘386’

6월8일 총리로 지명된 이해찬 의원(왼쪽)이 서울 여의도의원회관에서 김대곤 총리비서실장으로부터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민청학련 세대와 함께 참여정부의 핵심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그룹은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멤버들이다. 통추란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을 때 민주당에 잔류해 야권통합을 이끌었던 인사들. 노대통령의 ‘정치 스승’으로 통하는 김원기 국회의장이 당시 통추 공동대표를 맡았다. 유인태 의원과 부천시장을 지낸 원혜영 의원도 통추 멤버다. (노대통령이 후보 시절 통추 멤버들이 모인 자리에서 원의원에게 ‘집권하면 행정자치부 장관직을 맡아달라’고 제의했으나 원의원이 농담 삼아 ‘후보님, 장관직은 3명 이하에게만 파는 것입니다’라고 받아넘겼는데 이에 노후보의 얼굴이 굳어졌다는 게 통추 멤버들의 전언이다. 참여정부 조각 당시 원의원은 행정자치부 장관에 거론됐으나 결국 장관이 되지 못했다.)

이 총리후보 지명으로 무엇보다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입각이 예정된 김근태 전대표와 이 총리지명자의 관계. 김 전 대표가 운동권 후배 총리 밑에서 장관직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 일각에서는 김 전 대표가 입각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 전 대표의 한 측근은 “행정 경험을 쌓기 위해 입각하는 만큼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전 대표는 83년 재야세력들을 한데 모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초대 의장에 취임,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유신체제 아래의 대규모 학내시위였던 75년 5월22일 서울대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수배돼 7년 동안이나 잠행을 계속했던 그가 얼굴을 내밀고 일약 재야운동의 리더로 나선 것이다. 이 총리지명자는 당시 민청련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장영달 의원이 부의장이었다.

맏형 ‘71동지회’, 막내 ‘386’

87년 6월10일 서울 홍제동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총리지명자가 비교적 일찍 88년 총선에서 제도 정치권에 진입한 것은 자신의 ‘노선’과 관련이 있다. 이 총리지명자는 민청련 내에서 “운동권 출신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위해서는 제도정치권에 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김 전 대표는 “재야운동권이 중심이 돼 사회변혁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대표는 이후 전두환 정권의 야만적인 고문을 겪는 등 계속 재야운동권의 중심에 서 있다가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합류했다.

김 전 대표 주변에서는 “노대통령이 김 전 대표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얘기를 한다. 또 노대통령 직계 일부 386 인사들이 김 전 대표가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노대통령을 확실히 도와주지 않았다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나 노대통령과 김 전 대표는 지난 총선 이후 청와대에서 단둘이 만나 서로에 대한 섭섭함을 완전히 털어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노대통령의 입각 권유를 받아들였다.

김 전 대표를 비롯한 ‘71동지회’와 ‘민청학련’ 세대가 우리당 중진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면 70년대 후반 이후 학번은 우리당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99년 10월 80년대 학번이 중심이 돼 3김 시대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결성한 ‘제3의 힘’ 소속 운동권 출신은, 조금 과장하면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이들은 대부분 김 전 대표 주변에 포진해 있다.

13대 국회 노동위 3총사 운동권 출신 정치인으로 첫 주목

제도 정치권에 진입한 운동권 출신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13대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노무현 이해찬 이상수 의원이 ‘3총사’로 활약하면서부터였다. 세 사람이 89년 철저한 공조 속에 죽음의 공장으로 불리던 원진레이온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등 의정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정치권 안팎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노의원은 5공 청문회에서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이들 3총사 의원을 보좌한 이들은 운동권 출신이었다. 노무현 이해찬 이상수 의원 보좌진으로 이호철 전 대통령 민정비서관과 이광재 의원, 유시민 의원과 곽해곤 전 대통령 제도개선비서관, 이화영 의원(이상 우리당) 등이 각각 포진해 있었다. 다음은 곽해곤 전 비서관의 회고.

“88년 원 구성과 함께 이해찬 의원 비서관으로 들어갔더니 다른 의원 보좌진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 보좌진은 아마도 처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이 왜 노동위 3총사가 뜨게 됐는지를 알아가면서 운동권 출신을 보좌진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제도 정치권이 ‘새로운 피’ 수혈 차원에서 운동권 출신을 영입하면서 김민석 전 의원처럼 바로 공천을 받아 의원이 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우리당의 운동권 출신 의원들은 노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돼야 자신들의 지평도 넓어진다고 말한다. 참여정부 들어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전면에 부상한 만큼 국민 눈에는 ‘참여정부=운동권정권’으로 비치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성공이 자신들의 성공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성공을 바탕으로 운동권 출신 총리를 넘어 운동권 주류 출신 대통령까지 나올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주간동아 2004.06.24 440호 (p18~20)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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