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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면 어때? 그래도 명품인데 …

불황 장기화 속 ‘중고명품점’ 승승장구 …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점령, 온라인서도 열기 뜨거워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중고면 어때? 그래도 명품인데 …

중고면 어때? 그래도 명품인데 …

압구정 로데오 거리 초입에 들어선 중고명품점들.

이제 압구정동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건 중고명품점과 애견센터뿐이다.”

심각한 불경기를 온 나라가 체감하던 작년까지만 해도 “그래도 이곳은 예외”라며 느긋해하던 서울 압구정동과 청담동 상인들이 요즘 절박한 표정으로 털어놓는 말이다. 세계적 명품 부티크들이 즐비해 ‘로데오 거리’로 불리는 이곳도 깊은 불경기의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 명품숍 매출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반짝 부동산 경기 속에 플래그숍(Flag shop·라인별 브랜드를 갖춰놓아 한 매장에서 원스톱 쇼핑이 가능한 대형 의류매장) 공사를 시작해 최근 오픈한 한 브랜드의 경우 “지금 같은 불경기라면 30년이 지나야 투자금을 회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근처에 새로 매장을 내려던 또 다른 브랜드는 일단 모든 계획을 중지했다.

명품족들 불황으로 눈높이 하향?

거의 날마다 파리, 뉴욕과 동시에 신상품 이벤트와 런칭 쇼가 열리던 명품 플래그점들은 에어컨의 찬바람만큼이나 차가워졌다. 그나마 전기요금도 내기 어려운 패션 편집 매장이나 작은 가게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이렇게 해서 빈 가게를 새로 채우는 것이 바로 샤넬이나 루이비통 같은 명품들의 중고 물건을 ‘선보이는’ 중고명품점이다.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 상가에서 로데오 거리에 이르는 길에는 40여개의 크고 작은 중고명품점이 영업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0~15개 정도는 작년과 올해 사이 새로 문을 열었다.

중고면 어때? 그래도 명품인데 …
특히 올해 초 로데오 거리 중심에 1, 2층 합쳐 200평 규모의 대형 중고명품점 ‘캐시캐시’가 들어선 것은 드디어 VIP 마켓에도 불경기의 그늘이 닥쳤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캐시캐시는 전혀 ‘중고’스럽지 않은 매장이나 거래하는 물건이 중고라는 점은 틀림없다.



중고명품점은 인터넷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다. 웹사이트 측정업체 랭키닷컴에 따르면 인터넷의 중고명품점 방문자는 올해 3월 2만2000명으로 지난해 12월에 비해 57%가 늘어났다. 또한 중고명품점 수도 2002년 20곳 정도에서 요즘은 100여곳을 헤아린다. 인터넷 중고명품점에서 그날의 신상품을 올리는 시간이 되면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손님이 많다.

네이버와 다음의 중고명품점 검색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구구스(www. gugus.co.kr)의 이기훈 대표는 “하루에 새로 들어오는 물건이 100~120개 정도이고 방문자 수가 1만 명 정도에 이른다. 요즘 명품 매장에선 손님 한 명 없는 날이 많은 데 비하면 거래가 활발한 편”이라고 말한다. 중고명품점들은 손님들이 갖고 있는 명품을 가져와 위탁하면, 촬영을 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판매가 끝난 뒤 15% 안팎의 수수료를 받는다. 물건의 값은 브랜드나 물건 상태마다 차이가 있다. 상태가 좋은 샤넬 핸드백은 구입한 값의 70~80% 정도에도 거래가 이뤄진다. 반면 아무래도 중고 느낌이 나는 옷이나 신발류는 20~50% 정도에서 값이 정해진다.

벤처 사업을 접고 인터넷 중고명품점을 시작했다는 이대표는 지난해 말 청담동과 압구정동에 오프라인 매장을 내고 대구에 지점을 두고 있다(대구는 TK가 세를 떨치던 시절, 서울 다음으로 명품이 많이 팔려나가던 도시로 대개 프랜차이즈 중고명품점들이 지점을 둔다). 이대표는 옥션이나 와와처럼 가짜가 많은 중고 쇼핑몰과 달리 “최고가의 진품 중고만 거래한다”는 원칙을 지켜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었다.

“요즘은 중고명품점 개업을 원하는 사람들이 상담차 많이 찾아오고 대형 패션몰에서도 들어오라고 합니다. 일본이나 싱가포르의 경우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중고명품점들이 전성기를 맞았기 때문에 불경기가 끝나도 전망이 밝다고 보는 것이죠. 2000년대 초에 문을 연 중고명품점들이 강남 아파트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양품점’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오프라인과 인터넷, 프랜차이즈 등으을 연결, 기업화하고 있습니다.”

중고면 어때? 그래도 명품인데 …

로데오 거리 가운데 문을 연 ‘캐시캐시’.

중고명품점을 찾는 손님들은 대개 강남과 분당, 서울 평창동과 성북동 등의 부유층 여성들이다. 또 명품의 주요 고객인 연예인들이나 유흥업소 여성들도 꽤 많다고 한다. 이들은 대개 처음엔 싫증나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팔기 위해 왔다가 한 번 구입해보고 단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 인터넷 중고명품 쇼핑에 재미를 붙였다는 이모씨(32·주부)는 “명품은 소량 수입되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못 샀던 물건을 우연히 발견해 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처음엔 남이 입던 옷이라 꺼렸지만, 명품 입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란 심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소박한(?) 손님들도 있지만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압구정동 중고명품점 업계에서 이름을 날린 30대 중반의 ‘제주도 사모님’은 외국 체류 후 제주도에 머물며 몇 군데의 중고명품점 가게에서 각각 1억원 가까운 물건을 사들였다가 꼭 1년 만에 모두 되팔아 업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소문이다.

또 ‘평창동 사모님’은 운전기사를 시켜 에르메스, 샤넬 등의 명품을 한번에 100여점씩 날라와 중고명품점 주인들을 기쁘게 했는데 ‘사회지도층 사모님’으로 알려져 있을 뿐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다고 한다.

한 중고명품점 주인은 “재산 관리에 엄격한 보수적인 남편이나 아버지들도 비싼 옷이나 보석은 잘 사준다. 그러면 부인이나 자식들이 매장에서 무조건 신제품들을 구입해 한 번도 입지 않고 중고매장으로 가져와 현금으로 가져간다”고 귀띔한다. 중고라도 에르메스 가방은 1000만원대를 넘어서므로 ‘용돈’으로 쓰기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최초의 법인 중고매장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캐시캐시의 경우 사금융업과 카지노업에서 출발했기 때문인지 중고품 위탁보다 대출에 영업 중심을 맞추고 있다. 급전이 필요한 개인이나 사업자에게 명품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것.

중고면 어때? 그래도 명품인데 …

온라인에서 먼저 유명해진 한 중고명품점의 로데오 거리 매장.

“명품 바람에 한동안 너도나도 이탈리아에서 명품을 수입해왔지요. 그러다 물건을 사기당해 들여오거나 부도 위기에 처한 보따리장수들이 물건을 잡히고 대출을 해가요. 재미있는 건 그 돈으로 또 명품을 수입한다는 거죠.”(차화선 캐시캐시 부사장)

매장에서는 마침 이틀 전에 수입업자가 위탁한 C사의 신발 1000켤레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4~5켤레를 한꺼번에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윤모씨(36·주부)는 “명품은 유행을 타지 않아 사이즈만 맞으면 산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품 시장이 침체하고 중고시장이 활성화되는 데 대해 명품 마케팅 담당자들은 대부분 “우리 브랜드와 관계없다”며 반갑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 명품 브랜드 홍보팀장은 “우리 옷의 70%는 상위 VIP 100명이 구입하기 때문에 매출이 줄지 않았고 아웃렛 매장도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덤핑’ 물건은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점은 명품 한국법인 관계자와 중고명품점 주인들이 똑같이 현재 시장변화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를 유흥업소의 불경기로 바라본다는 것. 구구스의 이대표는 “우리나라 경기는 아무래도 술에서 시작된다. 남자들이 술 마시고 돈을 뿌려야 유흥업소 여성들이 옷도 사고, 식당도 가고, 유행도 생겨 돈이 돈다”며 쓰게 웃는다.

그동안의 광풍처럼 일었던 명품 소비 붐이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음을 꼬집는 말이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패션 머천다이징(merchandising)을 공부하고 돌아온 윤모씨(28)는 “유학 갈 때만 해도 패션 머천다이징 전망이 밝았는데 돌아와보니 취직하긴 어려울 것 같다. 고민 끝에 중고명품점을 열기로 했다. 홍콩이나 일본에서 중고명품을 수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미 일부 국내 중고명품업자들이 홍콩이나 일본 중고명품점들을 돌며 싹쓸이 쇼핑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한다면 중고명품점은 안 쓰는 물건을 재활용하는 바람직한 모델이다. 그러나 긴 경기침체가 소수의 부유층만을 겨냥하는 시장만이 기형적으로 살아남는다는 교훈만을 남긴다면 외화를 주고 홍콩이나 일본인들이 쓰던 중고명품까지 수입하는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주간동아 2004.06.24 440호 (p72~73)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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