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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풀뿌리 썩는 자치단체

죄는 단체장이, 아픔은 주민이

광역·기초 등 비리 연루로 낙마 줄줄이 … 대행 체제 한계 탓 사업 차질, 경쟁력 급락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죄는 단체장이, 아픔은 주민이

죄는 단체장이, 아픔은 주민이

광주시청(왼쪽)과 전남도청 전경.

2004년 1월29일, 감색 양복 차림의 박광태 광주시장이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형사) 309호 법정에 도착한 것은 재판 예정시간보다 10분 이른 오전 9시50분. 현대 비자금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정에 선 박시장은 다른 피의자들과 행동을 달리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우선 방청객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했고 뒷줄에 앉은 부인 등 가족들에게도 눈인사를 보냈다.

단체장 파워 클수록 공백 후유증도 커

그러나 비서실장과 공보관 등 20여명의 시청 직원들이 지켜본 가운데 열린 재판에서 박시장의 여유는 겨우 1시간30여분 뒤 경악으로 바뀌었다. 재판부가 증거인멸 등을 이유로 박시장을 법정구속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정치권 한 관계자는 “박시장은 꿈에도 구속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후 광주시는 대형 현안사업과 관련해 수장의 ‘공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 출범 후 광주시의 역점사업은 충청권에 행정수도, 광주에 ‘문화수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소비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 사업은 그러나 박시장이 영어의 몸이 되면서 큰 차질을 빚었다. 투자유치 활동, 광산업 2단계 사업, 기업도시 유치 등도 마찬가지. 박시장 개인의 맨파워와 인맥 의존 비율이 크게 작용하는 이 사업들이 박시장의 구속으로 추동력을 잃고 표류상태에 빠져버렸다. 광주시 공보실 한 관계자는 “문화중심도시 육성과 경제 활성화 등 현안은 박시장의 인맥과 정치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추진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광주시 관계자들은 박시장 구속 후 경기 의왕구치소를 가끔 찾는다. 이들은 구속 초기 팀을 짜 박시장 면회에 나섰고, 박시장은 이들에게 “여기 들어오니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이 눈에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시장을 찾은 시청 관계자들은 면회 자리에서 대형 사업과 관련해 박시장의 의중을 물어보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한대행 체제가 가동돼 굳이 박시장에게 보고할 이유는 없지만, 직원들로서는 박시장을 빼놓을 경우 박시장이 현직을 유지할 수 있는 형량이나 무죄를 선고받으면 ‘괘씸죄’를 면키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재판부의 최종판결이 날 때까지 시 직원들의 구치소 면회는 계속될 수밖에 없고, 광주시의 ‘두 집 살림’도 피할 수 없는 형편이다. 보다 못한 시민단체가 “박시장은 사퇴하라”고 요구했지만 박시장은 “재판을 통해 억울함을 밝히겠다”며 요지부동이다. 참여정부는 7~8월 1차로 공공기관 지방 이전 정책을 가시화할 계획이다. 다른 시·도는 공공기관 유치를 위해 로비를 적극 전개하지만 선장을 감옥에 둔 광주시는 뚜렷한 유치전략을 마련하지 못하고 중앙정부만 쳐다보고 있다. 그 위로 “죄는 단체장이 저지르고 아픔은 주민이 덮어쓴다”는 쓴소리가 날아들지만 귀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지 13년.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가 흔들리고 있다. 비리 연루 등으로 자치단체장들이 구속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파행 운영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16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부산·경남·광주·전남·제주 등 5곳의 자치단체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구속 또는 자리를 잃은 상태. 30%가 넘는 광역단체장이 유고 상태인 셈이다. 단체장이 없는 기초단체 18곳까지 포함하면 단체장 부재현상은 훨씬 심각해진다. 부산·광주·경남 등 3개 광역단체의 올해 예산은 10조원 정도. 3개 광역단체에 살고 있는 800만명의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름살진 시·도정으로 고통을 겪어야 한다. 겉으로는 위민(爲民)행정을 외치지만 잇속 챙기기와 각종 비리에 개입, 스스로를 교도소로 밀어넣은 단체장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시·도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단체장의 유고는 자치단체의 경쟁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온다. 대부분의 자치단체들이 추진하는 시·도정 사업과 해외투자 및 기업, 자본유치 등 대규모 사업은 단체장의 맨파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자치단체장의 사업 추진력, 신뢰성과 인적 인프라가 무엇보다 결과에 영향을 준다. 리더십 부재현상이 경쟁력 상실로 이어지는 현상은 전남도가 잘 보여준다. 4월 말 자살한 박태영 전 전남지사의 2004년 역점사업은 50만평이 넘는 대규모 관광 신도시 건설, 해외 기업과의 MOU(투자양해각서) 체결 등으로 정리되는 제이 프로젝트(J-Project).

박 전 지사는 취임 이후 267회에 걸친 국내외 투자유치 교섭활동을 벌여 607개 업체에서 1조7434억원에 달하는 투자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126개 업체(7조6000억원)의 잠재투자가를 발굴, 성공한 도백으로 평가받았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이 사업들은 박 전 지사의 마무리 손길이 필요했지만 박 전 지사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현재 이 사업의 상당 부분은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전남도의 한 관계자는 “박 전 지사가 사라진 지금 투자양해각서를 실제 투자유치로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선 굵은 단체장이 떠날 경우 후유증이 크다는 사실은 김혁규 전 지사가 떠난 경남에서도 확인된다. 타고난 비즈니스맨인 그는 도정에 경영마인드를 접목시킨 인물. 그는 재직시절 F1, F3 국제자동차경주대회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러나 김 전 지사가 떠난 지금 이 사업은 전망이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애물단지로 생각한다.

김 전 지사는 떠났지만 그의 그림자는 지금도 ‘주식회사 경남’에 남아 영향력을 발휘한다. 경남도 한 관계자는 “김 전 지사는 지금도 주식회사 경남의 사외이사”라고 말한다. 3선 민선도백인 김 전 지사의 인맥이 지금도 경남도에 튼튼한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국무총리로 지명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영향력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경남도 일각에서는 지금도 김 전 지사의 ‘수렴청정설’이 나오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 권한대행이 설 자리는 크지 않아 보인다. 새로 선출될 경남지사가 ‘김혁규 카리스마’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도 적지 않다.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상영 전 시장을 떠나 보낸 부산시도 한동안 ‘안상영 금단증상’으로 고통을 겪었다. 지방분권과 국가균형 발전전략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세계해양도시를 건설한다는 장대한 목표를 세웠지만 선장을 잃은 이 프로그램은 좌초 위기에 직면했다.

시·도지사 유고라는 위기를 맞은 자치단체는 권한대행체제로 행정을 꾸려가고 있다. 시스템상 권한대행이 조직을 통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다르다. 상당수 권한대행은 정치적 ‘책임’을 부담스러워한다. 때문에 책임이 뒤따르는 결정과 결단사항은 되도록 뒤로 미룬다. 또 일부는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욕심에 대행역보다 정치 판짜기에 더 바쁜 경우도 많다.

이런 대행들을 보는 공무원들도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린다. 경남도 한 관계자는 “조직의 장이 빠지니 모두 무사안일, 복지부동으로 일관한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을 대행들이 모를 리 없다. 경남 한 기초단체의 K권한대행은 “전체적으로 조직이 엉성하게 돌아가는 게 눈에 보인다”며 “그러나 부단체장도 일종의 ‘낙하산’이라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또 모나게 통솔하기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근 1년 동안 부군수가 군수대행을 하는 전남 화순군은 이번 보궐선거에 나설 후보가 17명이나 돼 직원들의 줄서기 행태가 벌어졌다는 지적을 받지만 통제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평가다.

보궐선거 비용도 주민이 고스란히 떠안는 셈

불분명한 책임의식 뒤에는 대행을 활용, 더 높은 비상을 꿈꾸는 얄팍한 처세도 한몫한다. 6월5일 실시되는 재·보궐선거 지역 중 단체장은 부산·전남·경남·제주 등 광역자치단체장 4명과 시장·군수·구청장 등 기초자치단체장 19명. 이 자리를 노리고 대행들이 대거 사퇴했다.

부산시장권한대행인 오거돈 행정부시장과 허남식 정무부시장은 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퇴했다. 이들의 사퇴로 부산시는 한 달여간 ‘대행의 대행’ 체제가 불가피하다. 한솥밥을 먹던 두 인사의 출마는 친소관계에 따라 줄서기와 편가르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경남도 상황은 비슷하다. 장인태 행정부지사가 보선 출마를 위해 사퇴, 김채용 행정자치부 민방위재난관리국장이 4월3일 제27대 경남도 행정부지사로 발탁됐다. 고현석 곡성, 민화식 해남 군수 등 2명의 기초단체장은 전남지사 보궐선거에 뛰어들었다.

자치단체를 파괴하는 정치권의 역할은 지난 총선 때도 맹위를 떨쳤다. 자치단체장들의 총선 출마 시한이었던 2003년 12월17일 13명의 자치단체장이 한꺼번에 사퇴서를 제출한 ‘사건’은 한국 자치단체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17대 총선을 앞둔 지난해 연말, 중부권의 한 도백은 집권여당의 핵심인사와 소속 정당의 대표에게서 수시로 면담 요구를 받았다. 총선구도를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정치권의 회유와 공작, 그리고 협박은 집요했고 정치바람을 피하려는 자치단체장의 움직임은 처절했다. 안상영 전 부산시장은 자살하기 전 쓴 유서에서 “여당의 끈질긴 입당 권유를 뿌리치기 힘들었다”고 기록했다. 강현욱 전북지사와 박태영 전 전남지사, 우근민 전 제주지사는 3월12일과 15, 18일 각 3일 간격으로 민주당적을 버리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자치단체장의 파행 배경에 정치권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총선 때 광역단체장은 물론 일부 시장·군수들까지 탈당과 입당 공세에 시달렸고, 이를 거절한 단체장은 수사 공포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퍼지기도 했다.

우근민 전 제주지사는 당적변경 기자회견에서 “국회의 탄핵소추로 인한 대통령의 직무정지 사태를 지켜보면서 고뇌에 찬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신의 선거법 위반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보험’에 든 것이라고 비난했다

2004년 5월 현재, 대전지역 5개 구청 가운데 3곳에 구청장이 없다. 동구 임영호, 유성구 이병령, 대덕구 오희중 전 구청장이 자민련 교섭단체 달성의 특명을 받고 총선 주자로 징발됐기 때문이다. 광역자치단체를 구성하는 기초자치단체에서 이처럼 절반이 넘는 구청장이 동반 사퇴한 것은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단체장들의 사퇴는 해당 기초자치단체 구민들에게 행정공백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도 가중시킨다. 보궐선거를 치러야 할 자치단체는 선거비용으로 4억~5억원을 부담해야 한다. 지방자치법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등 관련법령에 ‘보궐선거 경비는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대전총선시민연대는 대전지역 3곳 구청장들에게 “구청장직 중도사퇴에 따른 14억원의 보궐선거 비용을 물어내라”고 요구했다. 이들이 해당 관할 선관위의 자료를 산출한 보궐선거 예상소요 경비는 유성구 4억2701만원, 대덕구 5억1724만원, 동구 4억7217만원 등 모두 14억1642만원에 이른다.





주간동아 435호 (p38~40)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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