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커버스토리| “연애할까요?”

변화 출구 꽉 막힌 세상 그래서 ‘연애 혁명’ 꿈꾼다

숨막히는 현대인 욕구 폭발 ‘특급 이벤트’ … 많은 돈과 에너지 소모 남는 게 없는 게임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변화 출구 꽉 막힌 세상 그래서 ‘연애 혁명’ 꿈꾼다

변화 출구 꽉 막힌 세상 그래서 ‘연애 혁명’ 꿈꾼다

서울 강남의 한 사교클럽에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는 젊은 남녀.

2004년 5월. 대한민국을 꽃분홍으로 물들이고 있는 연애 열풍의 근원지는 어디인가. 왜 사람들은 연애에 목숨 걸고, 그 코드가 ‘낭만’이건 ‘쿨’이건 연애의 신화와 전설은 봄바람에 한껏 부푼 치마폭처럼 갈수록 커져만 가는 걸까.

“더 이상 큰 변화를 꿈꾸기 힘든 사회 현실이 가장 큰 원인이겠죠. 이전에는 혁명이면 혁명, 돈벌이면 돈벌이, 출세면 출세, 그렇게 뭔가 추구할 것이 있었잖아요. 또 노력하면 뭔가 될 것도 같고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그런데 지금의 한국 사회는 더 이상 급격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거든요. 계급의 고착화 단계에 이른 거지요.”

소설가 김영하씨의 말이다. 로또복권말고는 ‘서프라이즈’가 사라진 사회가 연애를 권한다는 뜻이리라.

신경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씨(용인정신병원)는 “연애는 자기실현의 한 방편”이라고 말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자기실현의 5단계’ 이론을 정립했다. 인간의 욕망은 생물학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사회적 욕구, 자긍심에 대한 욕구, 자기실현에 대한 욕구 순으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건강하고 평등한 사회라면 사람들은 부단한 자기 계발을 통해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려 노력하겠죠. 그러나 지금처럼 복잡한 세상, 재미도 없고 변화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연애만큼 절정에 빨리 다다를 수 있는 길이 없어요. 문제는 그 성취가 찰나적이며 감정적, 육체적 탐닉을 넘기가 힘들다는 거죠.”

권보드래씨(덕성여대 강사)는 1920년대를 연애라는 스코프(scope)를 통해 본 책 ‘연애의 시대’의 저자다. 그이 또한 “혁명의 가능성이 사라지니 섹스의 테크닉에서만 혁명을 추구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초월의 다른 가능성이 안 보이는 거죠. 현재의 지지부진한 삶을 초월할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연애도 초월의 한 형식이거든요. 하지만 초월을 ‘삶의 갱신’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연애는 들어가는 에너지에 비해 남는 게 별로 없는 장사예요. ‘영원히 뜨거운 연애’는 허구니까요.”



몸짱·얼짱 열풍 전 국민적 몸부림 결과물

변화 출구 꽉 막힌 세상 그래서 ‘연애 혁명’ 꿈꾼다

1920년대 연애 열풍의 중심에 섰던 인물 나혜석.

청년실업은 해결될 기미가 없고 남자들의 직장 근속 연수는 갈수록 짧아지는 지금, 연애는 제법 고상한 도피처이자 손쉽게 목숨 걸 수 있는 무엇이기도 하다. 좀체 진정될 줄 모르는 몸짱, 얼짱 열풍 또한 결국은 잠재적 연애 파트너들이 선호할 만한 외모를 갖추기 위한 전 국민적 몸부림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연애에의 몰입은 한편 소통에의 욕구가 폭발한 것이다. 현대인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의 대상을 만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 연애는 이러한 절박함과 외로움을 한숨에 날려버릴 수 있는 특급 이벤트다. ‘인정받는 것, 배려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연애에 빠진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행복의 절정이다.

일본 연애소설에 대한 우리 독자들의 남다른 열광은 이러한 사회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야마다 에이미 등의 연애소설에는 비슷한 주인공,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사랑방정식이 등장한다. 아르바이트나 프리랜서 비슷한 직업을 가진 폐쇄적 성격의 외로운 남녀, 특별한 사건 없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흩뿌려지는 대화와 이미지들, 오직 상대만을 향해 무한대로 열려 있는 감각과 열정. 주인공이 살아가는 삶의 이유는 오직 상대를 사랑하는 것뿐. 작가가 다소 낙관적이어서 끝마무리 어디쯤 혹 자기애를 깨우치게 된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를 사랑함으로써 얻게 되는 부산물일 따름이다.

또한 연애는 학습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젊은 역사학자 파비엔 카스타-로자는 그의 책 ‘연애, 그 유혹과 욕망의 사회사’(수수꽃다리 펴냄)에서 서구 유럽에서 ‘연애’가 태동한 때는 1870년쯤이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대중매체의 급격한 발달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무르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종의 대중매체는 매우 효과적인 연애 학습 자료다.

하지현씨는 “예를 들면 동성애 등이 갈수록 현실화, 일반화하는 현상이다. 이전이라고 해서 그런 욕구를 가진 이가 없었겠나. 그때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할 수밖에 없던 것을 이제는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연애 문제로 찾아온 상담자들의 경우 특히 30대나 40대 초반은 ‘외도를 하면 엄청난 죄의식을 느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너무 좋기만 하다. 이게 정상인가. 이런 내가 오히려 두렵다’는 말을 하곤 한다”고 전했다. 가족 이데올로기와 결혼의 환상은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철저히 깨져가고 있는 것이다.

변화 출구 꽉 막힌 세상 그래서 ‘연애 혁명’ 꿈꾼다

한 TV 시사프로그램에 소개된 동거 커플(위).2004년 3월7일 열린 우리나라 첫 동성애자 결혼식 장면.

각 매체가 연애담론을 퍼뜨리는 데에는 긍정적 접근도 있고 부정적 접근도 있다. 예를 들어 숨막히는 가부장적 질서에서의 일탈을 의미하는 연애는 여성의 자아정체성 회복이라는 사회적 주제와 맞닿아 있다. 조주현 계명대 교수(여성학)는 “신세대에게 섹스와 자유연애는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도구이자, 억압적 가족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대응의 소재이며, 자신의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매개물”이라 설명한다.

연애담론은 본질적으로 전복적이다. 연애를 다루면서 금기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는 대중적·예술적으로 유의미한 조명을 받기 어렵다. 연애 칼럼니스트 임경선씨는 “연애담론이 공론화하는 것은 어쨌거나 사회가 더 유연해지고 진보했다는 증거다.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사례를 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켠에선 연애만큼 관습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것도 없다고 냉소한다. 여성의 주체적 성을 말하지만 기실 그 밑바닥에 깔린 건 여전히 남성중심적 사고라는 식의 비판이다. 문학평론가 백지연씨는 “예를 들어 배수아의 소설은 사랑의 환상을 깨부수는 시니컬한 담화들로 가득하다. 그러면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밀폐된 개인성의 세계로 침잠한다. 그러나 연애로 인한 상처로부터 초연하려는 몸짓은 그 자체가 연애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연애담론은 종종 그것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인 것이건 사람들을 연애의 치명적 매혹에 빠져들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원작자인 소설가 이만교씨는 “지금 한국사회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를 꼽으라면 폭발하는 욕망과 자살”이라고 말했다. 욕망의 해방, 그러나 자살을 자행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삶의 조건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배태할 수밖에 없는 이 두 ‘원죄’야말로 ‘연애 권하는 사회’의 진정한 진원지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지금이 연애 열풍의 절정기인 듯하다. 20, 30대들은 연애의 면역을 기르기 위해 뛰어다니고 40, 50대들은 그에 대한 면역이 없어 오히려 크게 휘둘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연애의 전복성을 충분히 인정한다면 그 발전 단계란 ‘자유연애 실현→동거 등 제도의 변화→동성애·양성애의 용인 등 성 정체성 깨기’ 순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자유연애가 막 실현된, 그러면서 동거·결혼 등 각종의 결합 형태가 혼재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설사 사랑과 연애를 분리해 생각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해도 연애의 핵심은 여전히 소통과 배려, 합의와 정서적 친밀감이다. 결혼과 가족을 해체하면서까지 얻어낸 것이 오직 섹스뿐이라면 참으로 쓸쓸한 일 아닌가.

권보드래씨는 “자기를 갱신하고 행복을 부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운동이나 공부, 봉사처럼 열심히만 하면 성공적 결말이 보장되는 도전도 많지 않은가. 그에 비해 연애는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 들고, 엄청난 감정 소모를 동반하며, 그러면서도 성공 확률은 극히 낮은 ‘나쁜’ 게임”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번쩍 달뜬 연애에 빠진 당신. 이제 ‘멋진 연애’보다 ‘좋은 연애’를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주간동아 435호 (p22~23)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367

제 1367호

2022.12.02

청약 초읽기 국내 최대 재건축 단지 ‘둔촌주공’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