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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프로레슬링 열기 ‘한국 공습’

케이블·위성 방송 통해 경기 매료 … 국내 투어에도 관중 폭발 ‘인기 실감’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미국발 프로레슬링 열기 ‘한국 공습’

미국발 프로레슬링 열기 ‘한국 공습’

3월2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투어 ‘NEVER DIE’ 경기 장면.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둔탁한 소리, 이글거리는 불꽃, 화려한 조명과 귀청이 떨어질 듯한 함성들.

3월21일 오후 7시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은 프로레슬링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1000여명의 관중들은 선수의 한 동작 한 동작에 열광하며 그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WWA(World Wrestling Associ-ation)가 주최한 프로레슬링 투어 ‘NEVER DIE’ 현장의 모습이다.

프로레슬링 열풍이 불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어설픈 쇼’로 치부되며 쇠락의 길을 걸었던 프로레슬링이 ‘엔터테인먼트 스포츠’로 화려하게 부활중이다. 초등학생부터 중년의 남성들까지 프로레슬링 마니아들은 케이블과 위성 TV를 통해 외국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시청하며 열광한다. iTV와 SBS SPORTS, SKY KBS SPORTS 등 케이블·위성 방송 채널들이 중계하는 프로레슬링 관련 프로그램의 동시간대 시청점유율은 최고 40%대. 7만여명의 회원수를 자랑하는 다음 카페 ‘레슬마니아(cafe.daum.net/Wrestling)’ 등의 인터넷 동호회와 미국 프로레슬링 리그인 WWE(World Wrestling Enter- tainment) 관련 홈페이지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iTV 프로레슬링 해설위원인 천창욱씨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프로레슬링에 관심이 있는 이는 200만명, 열성 마니아는 50만명에 이른다.

국내 열성 마니아 50만명 추산

미국발 프로레슬링 열기 ‘한국 공습’

완벽한 근육질 몸매로 인기 높은 프로레슬러 스코트.

지난 1월23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렸던 WWE의 한국 투어는 국내 프로레슬링 열기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던 현장. 이날 경기를 관람한 1만5000여명의 관객들은 마치 미국의 프로레슬링 경기장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선수들의 플레이에 열광했다. 국내 프로레슬링 관계자들조차 “한국의 프로레슬링 열기가 이 정도인지 몰랐다”고 놀랐을 정도다.



한국프로레슬링연맹 최류 실장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미국 프로레슬링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현장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이 열기를 한국 프로레슬링 활성화로 연결하기 위해 한국 선수들이 출전하는 NEVER DIE를 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미국에서 프로레슬링 리그인 WWE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WWE 인터넷 쇼핑몰 비엠코리아(www.bmspoz.com)의 정세연씨는 “WWE가 2002년 한 해 동안 동원한 관객수는 200만명, TV 중계권과 이벤트, 입장권 수입 등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5억 달러에 달한다”며 “선수들의 모습을 한 인형(피규어)과 각종 티셔츠, 포스터 등을 판매해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돈은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WWE 프로레슬링 경기는 방송 중계와 비디오 테이프 등으로 세계 130여개국에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락, 스티브 오스틴, 부커티 같은 WWE 스타 플레이어들은 톰 크루즈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같은 세계적 스타의 반열에 올라 있다. 우리나라의 프로레슬링 열풍을 이끌어가는 것도 바로 이 스타들. 프로레슬링 마니아들은 이들의 이름뿐 아니라 프랑켄슈나이더(다리로 상대방의 목을 감고 넘기는 기술), 프로그스플레시(로프 위에서 점프해 마치 개구리가 뛰듯이 날아가 상대방을 몸으로 누르는 기술), 페디그리(상대의 머리를 다리에 끼운 후 상대편 팔을 위로 접어서 잡고 뛰어서 바닥에 찍는 기술) 등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기술의 이름까지 줄줄 외우며 레슬링에 열광하고 있다.

미국발 프로레슬링 열기 ‘한국 공습’

WWE 여성 프로레슬러들은 짧은 교복 치마를 입은 채 등장해 격렬한 동작을 선보이는 등 성적 코드를 사용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왼쪽은 여성 프로레슬링 ‘디바’가 받는 트로피.

한때 ‘잘 짜여진 각본일 뿐’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프로레슬링이 이처럼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이 프로레슬링이 순수한 스포츠가 아닌 ‘복합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경기 장면을 사실이 아닌 ‘쇼’로 받아들이고 나자 프로레슬링 특유의 박진감과 현장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

iTV의 천창욱 해설위원은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그대로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또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한다 해도 레슬러들은 항상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러한 현장성과 박진감,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가 혼합된 묘한 매력이 마니아를 사로잡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WWE 한국 투어를 관람하는 등 레슬링 마니아인 서울 성동고등학교 2학년 조항민군도 “프로레슬링이 잘 짜여진 한 편의 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프로레슬링을 본다”고 말했다. 조군이 말한 프로레슬링의 매력은 인간의 몸이 표현할 수 있는 역동성의 최대치를 보여준다는 것.

“사람의 몸이 상상할 수 없는 각도로 꺾여요. 200kg이 넘는 거구의 레슬러가 상대 선수에게 파워밤(상대의 머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복부를 감아 들어올린 다음 바닥에 강하게 내치는 기술)을 날리는 모습을 보면 전율이 일죠. 실전격투기에서는 이런 호쾌한 기술이 불가능하잖아요. 진짜로 하면 사람이 다 죽어버릴 테니까요.”

현실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거친 힘에 대한 팬터지가 바로 프로레슬링의 매력이라는 말이다. 프로레슬링 인터넷 동호회에서 활동중인 이민호군(18)도 “한국 선수들은 아직 좀 시시하지만 WWE 프로레슬링에 등장하는 외국 선수들은 파워 넘치는 기술을 구사해 강한 남자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며 “한 반에서 30명 정도는 WWE 프로레슬링 마니아”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열풍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거구의 남성들이 폭력을 통해 서열을 정하는 프로레슬링의 경기 방식이 청소년들의 모방심리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비키니만 입은 반라의 여성 레슬러들이 나와 격투를 벌이는 ‘디바 프로레슬링’은 청소년들에게 성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스테이시 등 여성 레슬링 스타들의 경우에는 교복 치마를 입은 채 격렬한 레슬링 기술을 선보이는 등 일본 포르노와 유사한 코드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력 세계 수준 … 쇼 부분 보완 필요

미국발 프로레슬링 열기 ‘한국 공습’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3월21일 ‘NEVER DIE’를 관람하며 열광하는 청소년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서울 중암중학교 이경연 교사는 “프로레슬링은 스포츠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며 “그렇지 않아도 폭력에 많이 노출돼 있는 요즘 학생들에게 영웅심과 성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한국 현실에 맞는 프로레슬링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실 WWE에 비하면 현재 한국 프로레슬링은 걸음마 수준. 프로레슬링 마니아들도 우리나라의 프로레슬링은 WWE 프로레슬링만큼 세련되고 재미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WWE의 한국 투어가 1만5000명의 관객을 동원한 데 비해 NEVER DIE를 찾은 이들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는 점도 이 같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대해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허남규 기획팀장은 “WWE가 100% 쇼라면 한국 프로레슬링은 이보다 훨씬 스포츠 쪽에 가깝다”며 “WWE는 다양한 도구와 연출을 통해 폭력성과 선정성을 극대화하지만 우리는 선수들의 몸이 실제적으로 해낼 수 있는 만큼만 보여주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실제 경기력에 있어서 한국 선수들의 실력이 떨어지지 않는 만큼 화려한 무대장치와 조명 등 쇼프로모션을 강화하면 WWE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왕년의 박치기 스타였던 WWA 아시아연맹 김일 회장도 “프로레슬링 관계자들이 NEVER DIE 등 많은 예산이 투입된 대회를 열면서 한국식 프로레슬링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조만간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왕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주간동아 2003.04.03 378호 (p88~90)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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