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왕성지도(일본 와카야마 시립박물관 소장)
“궁궐은 왕이 정사를 펴는 곳이며,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이다.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한다.”
궁궐을 짓는 국가의 자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복(景福)’이라는 말도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경복궁은 1394년 공사를 시작, 이듬해인 1395년(태조 4년) 준공됐다. 당시 15만평의 땅에 근정전 등 정전들과 회랑, 누각 등 390여 칸을 지어 국가의 위엄이 나타나도록 했다.
“15만평에 누각 등 390여칸 지어”
그러나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당시 경복궁의 규모나 양식(樣式)에 대해 알 길이 없다. 궁궐의 건축도면은 물론 설계한 건축가, 공사비 등 어느 것 하나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 역사서에는 건물 이름 정도만 기록되어 있는데 준공 이래 증개축, 이축, 멸실이 잦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화재, 정변 등의 와중에 왕궁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우리가 보는 경복궁 모습은 세워질 당시와는 매우 다르다. 현재의 경복궁은 대원군 이후 지어진 것 중에서도 일부일 뿐이다.
이번에 일본에서 찾아낸 ‘조선국왕성지도(朝鮮國王城之圖)’는 경복궁을 그린 최초의 그림으로 추측된다. 궁궐을 그린 그림을 흔히 ‘궁궐도’라고 하는데 이 그림에는 ‘왕성지도’라 씌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또 한 번에 여러 벌 제작되어 분배된 것 중 하나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있는 경복궁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경복궁도’로 헌종 때(1834~49)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채색 필사본 ‘경복궁전도’나 장서각이 소장하고 있는 ‘경복궁지도’도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자가 일본에서 ‘조선국왕성지도’를 발견한 것은 지난 여름. 마침 중부도시 후쿠야마(福山)의 작은 항구마을 도모노우라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세미나’에 참가했을 때다. 여느 때처럼 자료 모으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일본 관계자가 ‘조선국왕성지도’의 소재와 내용에 대해 귀띔을 해주었다. 도모노우라는 조선통신사들이 거치던 곳으로 옛 한문 이름이 ‘도모노우라(韜の浦)’였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림은 옛 기슈(紀州)의 한 도시에 있다는 것이다. 기슈라면 오사카 남쪽 와카야마(和歌山) 일대를 가리킨다. 이후 세 차례나 일본을 오가며 그림 찾기에 나섰다. 다행히 게이오기주쿠 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인 재일동포 3세 부학주씨의 도움을 받아 와카야마 시 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작가 미상의 경복궁 궁궐도(위).보수공사가 거의 마무리돼 ㅁ자형의 경복궁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아래).
그림의 크기는 35.5×70.2cm. 그림에 ‘기일(其壹)’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림이 몇 장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복궁 외의 다른 궁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그림들을 찾는 것 또한 우리의 숙제다.
그림은 궁중의 화원이 그린 것 같다. 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이거나 외국(중국이나 왜국) 사신에 대한 외교용 그림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어람용 그림인 ‘근정전청연도(勤政殿請宴圖, 1537)’ 등이 남아 있고, 중국 사신이 우리 궁궐도를 요구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한양을 드나들던 왜사(倭使)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이 그려진 연대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다음 몇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1400년 전후 일본 왜사가 한성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준 것이다. 1395년 경복궁 준공을 기념해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둘째, 임진왜란(1592~1596) 때 일본군이 탈취해 갔다.
셋째, 이 그림이 조선통신사 자료에 묶여 있던 것으로 보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선물한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을 오갔다.
넷째, 당시 조선과의 교류를 위한 교두보였던 쓰시마의 왜인들이 이 그림을 얻어, 일본 막부에 전달했다. 당시 일본 막부도 조선의 왕궁에 관심이 있었기에 이런 그림이 필요했다. 와카야마 시는 세토나이카이에 면한 항구도시로 쓰시마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조선국왕성지도’는 왕궁과 궁내의 정원을 묘사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바탕을 노란색으로 하고 붉은색을 많이 써서 건물을 표현했는데 동양풍이 강하다. 여기서 동양풍이란 조선, 명나라, 왜의 3국풍이 뒤섞인 것을 말한다. 그림은 서양식 투시도법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고 멀리 있는 건물은 약간 크기를 줄이는 원근법도 이용됐다.
그림에 보이는 경복궁은 백악산(白岳山)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백악산은 북악산(北岳山)으로 불린다. 북악산 기슭 현 청와대 쪽은 고려 숙종(1096~ 1105) 때 궁궐로 쓰이던 곳이다. 숙종 때인 1104년 5월 남경(南京) 궁궐을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경은 오늘의 서울이다.
그림에서 북악산 기슭의 궁전은 고려시대 연흥전(延興殿)으로 보인다. 연흥전은 조선 연간에는 연고궁(延枯宮)으로 이름이 바뀌고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다. 현재의 청와대 일대다. 만약 청와대가 옮겨가면 이곳은 옛 궁궐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림에서 경복궁 경내는 광화문, 근정전, 서루(西樓)로 보이는 건물들이 축상에 이어져 있으나 오늘 우리가 보는 경복궁과는 다르다. 건물은 대부분 중층(重層)으로 되어 있다. 탑 형태의 건물도 많이 보인다. 궁궐이 비교적 꽉 찬 느낌이다. 중앙에 두 개의 방형 큰 연못이 연결돼 설치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경복궁의 대표적인 건물인 근정전(국보 223호).
경복궁 담장은 1503년 11월에 쌓았다. 그 전에는 간이 울타리만 있어 주변 민가와의 경계가 확실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담을 쌓으면서 주거를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림에도 담장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1527년 7월 경복궁을 수리했다. 1553년 9월(명종 8년) 사정전(思政殿) 북쪽이 모두 소실됐다가 1554년 9월 중건되었으나 1592년 선조 때 경복궁은 다시 불타버렸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각은 200여년 후인 1865년 2월 대원군이 중건을 시작, 1868년 6월에 완성한 것이다. 고종은 그해 7월부터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때 경복궁 안에 지어진 건물은 모두 7225칸이었으나 1876년 11월 화재가 있었고 1905년 이후에는 일제에 의한 파괴가 극심했다. 근정전과 경회루 등 10여동만 남기고 200여동을 헐어버렸다.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은 고종 때에 중건된 궁궐의 10%도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 그림은 임진왜란 이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파(全破)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경복궁 그림은 희소성으로도 가치가 높다. 이 그림의 발견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조사와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