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3

2002.12.12

노년의 사랑… 다시 찾은 청춘

  • 김시무/ 영화평론가 kimseemoo@hanmail.net

    입력2002-12-05 13: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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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사랑… 다시 찾은 청춘
    박진표 감독의 디지털 장편 데뷔작 ‘죽어도 좋아’가 마침내 일반극장에 걸린다. 영상물등급위원회(위원장 김수용)로부터 두 차례나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가 결국 약간의 수정을 거쳐 재심을 통과한 것이다.

    이 영화는 11월23일 폐막된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출품돼 관객상, 국제영화평론가상 그리고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이렇듯 작품성이 있는 이 작품의 개봉이 그동안 지연된 이유는 이른바 선정성 때문이었다.

    ‘죽어도 좋아’라는 텍스트로 들어가보자. 이 영화에서 특히 문제가 됐던 부분은 일흔을 넘긴 노부부가 성기를 애무하는 장면과 장장 7분간에 걸쳐 이어지는 정사 정면이었다. 심의를 맡았던 한 인사는 “이불 속에서 한다든지 어떻게든 상징적으로 처리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는데 굳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공연히 선정성 시비만 불러일으킬 뿐인 불필요한 장면들이라는 얘기다.

    노년의 사랑… 다시 찾은 청춘
    그렇다면 박진표 감독은 왜 그러한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줬을까. 그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필요했다면 특정 장면만을 따로 떼어내어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소아병적 사고방식이랄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장면을 애초부터 찍지 않았거나 편집과정에서 자진 삭제했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당연히 등급보류 없이 바로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죽어도 좋아’는 이렇게까지 논란거리가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평론가들이 나서서 ‘감동적인 영화’ 운운하지 않아도 됐을 터다.



    70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그것도 만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정신적 동반자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회춘의 기쁨을 만끽한다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섹스가 핵심 사항이 된다. 그것도 실제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섹스 장면의 사실성 여부를 들어 비영화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몰래카메라와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아무튼 이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섹스를 한다. 게다가 가끔 ‘낮거리’도 한다. 이 낮거리라는 것이 밤에 하는 것보다 체력 소모가 상당히 크다고 한다. 그래서 코믹한 효과도 준다. 그런 설정들이 영화 ‘죽어도 좋아’의 주된 요소들이다.

    나는 이 영화에서의 성기 노출은 필수 불가결하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할아버지가 연령상 자연적인 발기 불능이라면 영화 속 섹스신은 모두 허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우리가 이 영화에 열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정사 장면들이 그저 배우들이 연기하듯 폼만 잡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새롭다고 할 만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연기일 뿐이라면 최불암과 황정순 같은 원로배우들의 연기로도 얼마든지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새로움은 바로 그 같은 통념을 뒤집은 데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박진표 감독은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현실과 허구 간의 장벽을 보기 좋게 허물어버렸다.

    영화에 나온 할아버지의 발기된 그것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희망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그것은 영화적 허구에서나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자, 보아라! 내 나이 70이지만 청춘 못지않게 발기도 되고 섹스도 한다.” 바로 거기에서 삶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다. 죽음에 다다른 쇠약해진 노인의 육체가 아닌 생의 약동으로 충만한, 섹스로 달아오른 불멸의 육체는 “죽어도 좋아”라는 탄성을 절로 내뱉는다.

    결국 할아버지의 발기된 그것은 영화의 뇌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장면이 너무 어두워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부분은 더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했지만 이번 재심과정에서 더 어둡게 처리됐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종전에는 등급 부여가 보류되면 그 다음 심의 때는 어김없이 가위질이 뒤따랐는데, 이번 경우 화면을 좀더 어둡게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래저래 ‘죽어도 좋아’는 금기의 벽을 또 하나 허물었다.

    끝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안이 있다. 사실 이 작품이 노인들의 성생활을 진솔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영화 속 부부는 백년해로를 한 부부가 아니라 만년(晩年)에 뒤늦게 만나 인생의 새로운 희열을 만끽하고 있는 특수한 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논의가 재개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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