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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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로 영재 만들기’ 아이 잡는다

“내 아이도 혹시…” 어른들 착각 … 매일 ‘학원 쇼핑’에 교재 파악·정보전쟁도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2-12-05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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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외로 영재 만들기’ 아이 잡는다

    서울의 한 과학고에서 방과 후 운영되고 있는 영재교육 프로그램.

    ‘영재교육 2007년까지 4만명으로’ ‘각 분야 우수 두뇌 발굴, 전체 학생의 1%’ ‘대학별 영재 특별전형 대폭 확대’. 11월25일 교육인적자원부의 ‘영재교육진흥종합계획안’이 발표된 후 언론들이 일제히 ‘영재교육’ 특집을 내보내자 네 살짜리 아들을 둔 주부 신모씨(34·서울 은평구 갈현동)는 일주일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유치원 다니는 것 빼고는 일주일에 한 번 한글 방문수업을 받는 게 전부다. 남들 다 하는 은물(가베로도 알려진 유아교육 프로그램)이나 영어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다 초등학교 출발 단계에서부터 처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신씨는 대학들이 영재 특별전형을 확대하는 만큼 보통 아이들의 기회가 줄어들면 영재가 아니더라도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사설 교육기관 문의 줄이어

    사설 영재교육기관에도 영재 판별을 받고 싶다는 문의가 줄을 이었다. 서울 대치동 영재교육센터의 고혜진 실장은 “2000년 영재교육진흥법이 통과된 뒤 영재학교가 세워진다, 종합계획안이 나온다 분주하니까 혹시 내 아이도 영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영재 판별에 관심을 갖는 부모들이 부쩍 늘고 있다. 그중에는 영재 판별용 검사지를 미리 구해 연습을 하고 오는 아이들도 있다”고 말한다. CBS영재교육학술원 윤여홍 소장은 “영재아들이 국가 차원에서 교육의 기회를 얻는 일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고사하고 전문교사도 양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영재 4만명이라는 발표는 성급한 감이 든다”고 지적했다.

    벌써부터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어느 학원 혹은 영재교실 출신들이 과학영재학교에 붙었다는 입소문이 파다하다.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무슨 교재로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아내려는 정보전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영재교육진흥법’ 발효 직후인 2001년 2월 인터넷언론 ‘이슈투데이’가 “영재학교가 영·유아 과외 열풍을 초래할 것인가”를 놓고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문가 그룹의 78%, 일반인의 87%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영재교육을 조기교육으로 착각하는 왜곡된 교육풍토에서 영재과외 열풍은 충분히 예상된 결과다.

    수원에서 24개월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를 대상으로 놀이교육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이모 원장(36)은 엄마들의 ‘영재 신드롬’과 ‘창의성 콤플렉스’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엄마들은 불안감에 아이에게 뭔가 자꾸 가르치려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배우는 데 지쳐 있다. 요즘에는 인지교육에 더해 창의성을 중시하는 분위기인데, 창의성까지도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이 의외로 많다. 영재교육이란 타고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교육이지만, 내 아이도 그 프로그램대로 시키기만 하면 영재가 될 수 있다는 어른들의 착각 때문에 엉뚱하게 보통 아이들이 희생자가 되고 있다.”



    ‘과외로 영재 만들기’ 아이 잡는다

    9월 ‘과학영재교육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했던 폴란드 과학원의 발데마 고르츠코프스키 박사가 서울 과학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일부 부모들은 영재교육을 한글, 영어, 피아노, 수영, 태권도와 같은 특정 과목쯤으로 여긴다. 지금 하고 있는 과외에다 ‘영재교육 하나 더’ 추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막 두 돌을 지난 아이가 매일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강행군하는 일도 흔하다. 또 교육열이 높은 부모들의 공통점이 ‘학원 쇼핑’. 오르다, 가베, 프뢰벨, 몬테소리, 아마데우스 등 남들이 좋다고 하는 교육 프로그램과 학원을 한 달이 멀다 하고 갈아치운다. 각 학원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데는 유아교육 전문가 뺨치는 수준. 그러나 정작 아이들은 프로그램의 장점을 충분히 경험할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끝난다. 이렇게 자라 영악해진 다섯 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이거 안 해주면 엄마한테 말해서 학원 그만둘 거예요”라는 협박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개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영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달을 하지만, 정작 영재를 둔 부모들은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몰라 가슴앓이를 한다. 국내 영재교육의 기본방향을 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온 조석희 박사(한국교육개발원)는 “1986~87년 전국적으로 발굴한 3~5세 신동들에 대해 이들이 대학 2~4학년이 되는 2001년 시점에서 추적조사를 했다. 대부분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가정의 아이들이어서 별도의 교육을 제공받지 못해 학업 성취도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영재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박사는 서로 다른 아이들에게 같은 방식,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교육의 평등이 아니라 각자의 특성에 맞는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의 평등개념을 제시했다.

    언어능력이 뛰어난 영재 푸름이(초등학교 5학년)의 아버지이며 독서를 통한 영재육아법을 보급하고 있는 최희수씨(40·www.prumi.com)는 “교육은 밖에서 뭔가를 쑤셔넣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내부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단 ‘똑똑한 아이로 기르고 싶다’는 부모의 욕심을 드러내지 않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섬세한 교육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재 판별을 받는 순간 부모의 욕심이 개입하고 끊임없이 주위 아이들과 비교하려는 불안한 심리상태가 된다.

    최희수씨는 “영재란 각 분야별로 5% 안에 드는 아이들이다. 흔히 언어능력과 수학적 재능이 가장 먼저 발현되지만 사회성이나 종교적 성향(내면통찰)이 뛰어난 영재들도 있다. 이들이 특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여홍 소장도 “아직까지 영재나 영재교육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영재라고 하면 무엇이든 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너는 영재라면서 이것도 못하니’ 하는 식으로 놀리거나, 부모가 좋은 교육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자녀를 영재로 만들려는 것 모두 아이들에게 상처만 준다”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 3월 미국 사회는 가짜 ‘천재소년’ 저스틴(8)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저스틴은 여섯 살 때 IQ테스트 298점, 대입수능시험인 SAT 800점 만점을 받아 ‘세계 최고의 천재’로 알려졌다. 그러나 영재학교에 입학한 뒤 “죽고 싶다”고 말하는 등 심리상태가 불안정하자 정신과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엄마의 조작극임이 드러났다. 아이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는 욕심 때문에 IQ 검사지를 미리 구해 외우게 하는 방법으로 점수를 올렸던 것이다.

    신의진 연세대 교수(소아정신과)는 “영재에 대한 개념 자체가 모호한 상황에서 영재성을 개발한다는 교육이 과연 가능한가”라고 반문한다. “타고난 재능을 가리키는 ‘gifted’라는 말에는 방해만 하지 않으면 알아서 큰다는 의미도 있다. 영재에게 적극적으로 자극을 주어 잠재력을 키울 것인가, 스스로 꽃피울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직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영재교육 열풍에 휩쓸리다 보면 아이들만 희생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영재학회 상임이사인 김명환 박사(김연구소 소장)는 현재 실시되고 있는 영재교육이 속진, 선행학습 중심인 데다 과학과 수학 분야에만 치우쳐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일부 영재교육센터들이 가시적 성과에 급급해 경시대회 준비기관으로 전락한 것도 영재교육의 본질을 흐리는 요인. 경시대회 성적은 곧 대학특례입학과 연결된다. 김소장은 “장애아동에게 특수교육이 필요하듯 영재들에게도 조금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부작용이 없다”고 말한다. 영재여도 고민, 아니어도 고민인 세상. 아이의 성장을 느긋하게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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