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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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하고 아들 얻은 정조 임금

  • < 김두규/ 우석대 교수 >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3-08-01 1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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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하고 아들 얻은 정조 임금
    정조 임금이 집권하던 1786년 12월, 왕대비 정순왕후는 다음과 같은 한글 교서를 내린다. “1786년 5월 문효세자의 사망, 9월 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죽음, 11월 상계군 담의 사망 등 왕실의 비극적 사태들이 모두 독살에 의한 것이니 빨리 역적을 찾아내라.”

    1786년은 정조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해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슬픔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자녀가 없던 정조가 뒤늦게 얻은 일점혈육 문효세자를 홍역으로 잃은 것이었다. 문제는 다섯 살 어린 나이의 세자가 홍역을 앓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되면서부터. 사실 정조는 세자가 홍역을 앓게 되자 의약청을 설치하고 자신이 친히 약을 달여 먹일 정도로 온 정성을 기울여 아들을 살려냈다. 그리고 이를 몹시 기뻐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과거를 실시하고, 조세를 탕감해주는 등 온 나라를 축제 분위기로 이끌던 터에 갑자기 세자의 병이 악화돼 끝내 죽고 만 것이다.

    이 때문에 정조는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불행을 겪어야 했고, 그 자신이 왕세손으로 있을 당시에는 정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을 받았으며, 왕이 되고 나서도 몇 번씩이나 자객으로 인해 암살 위기에 처했던 정조였다.

    이장하고 아들 얻은 정조 임금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임신중이던 왕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가 그 해 9월 갑자기 사망하고 만 것이다. 또 그 해 11월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 담이 갑자기 죽는다. 상계군 담은 정조의 이복아우 은언군의 아들이었다. 사도세자의 후손들이 모두 죽어 나가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왕대비 정순왕후가 왕실에 더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음을 감지하고 이 같은 한글 교서를 내린 것이다.

    결국 정조는 명당을 통한 ‘운명바꾸기[改天命]’를 시도한다. 그러잖아도 이전부터 억울하게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무덤 자리가 나쁘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던 터였다. 정조는 고모부인 박명원(화평옹주의 남편)과 지관 차학모(車學模)를 대동하고 사도세자의 무덤(현재 서울시립대 내에 위치)을 둘러본 뒤 그곳이 흉지임을 확인하고 이장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장하는 데 좋은 날을 잡지 못하여 무려 3년을 기다린 끝에 정조 13년 마침내 수원으로 이장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세자의 현재 무덤인 융릉이다. 이 자리는 고산 윤선도가 일찍이 ‘천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최고의 명당’으로 평가한 자리였다. 이른바 엎드린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반룡롱주형(盤龍弄珠形)의 명당.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이장하고, 정조는 주역으로 점을 치게 한다. 괘가 겸괘(謙卦) 오효(五爻)로 나왔다. 이 괘는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며, 조만간 국가의 경사(즉 자손을 두는 것)가 있을 것’으로 풀이됐다. 실제로 이장한 그 이듬해인 1790년 6월에 수빈 박씨가 왕자를 낳는다. 바로 11세의 나이로 임금 자리에 올라 34년간 왕위를 지킨 순조 임금이다. 아무튼 순조를 얻은 것이 명당의 발복 덕분이라 생각한 정조는 더욱더 자주 융릉을 참배한다. 나아가 그는 융릉을 위해 성을 쌓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이다.

    이렇듯 수원 화성은 자신에게 아들을 안겨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의 보존과 자신이 융릉을 참배할 때 머물 행궁(行宮)이라는 1차적인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 때의 대신 김종수(金鐘秀)가 쓴 화성기적비(華城紀積碑)에도 명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화성이 건립된 1차적 목적은 풍수적 이유였다는 것이다.



    실전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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