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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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CEO 어디 없소”

오너 중심 기업문화 속 CEO 양성 등한시… IT 등 특정 분야 구인난 심각

  • < 구미화 기자 > mhkoo@donga.com

    입력2003-05-23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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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 만한 CEO 어디 없소”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출신의 이명우 사장은 소니코리아에 둥지를 틀면서 24년 동안 달고 다닌 ‘삼성맨’ 꼬리표를 뗐다. 삼성에서 그의 마지막 직책은 삼성전자 북미총괄 상무보. 이명우 사장은 77년 삼성그룹에 입사한 뒤 88년 영국법인 총괄직을 비롯해 중동과 미국, 독일 등 해외시장에서 마케팅을 책임져왔다. 그가 경쟁사인 소니코리아로 갈 수 있었던 건 전자업계의 마케팅 전문가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데다 미국 전자업계 유력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한국전기초자 서두칠 사장이 회사를 그만뒀을 때 국내 주요 헤드헌팅사에는 그를 모셔가기 위한 국내 기업들의 의뢰가 쇄도했다. 쓰러져가던 한국전기초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그의 구조조정 능력을 높이 산 것. 서사장은 결국 올해 초 동원그룹 계열의 정보통신장비 업체인 이스텔시스템즈로 옮겼다.

    하지만 이명우 사장처럼 국내 기업 임원이 외국계 기업 지사장으로 발탁되거나 서두칠 사장처럼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여기저기서 모셔가려 나서는 CEO는 흔치 않다.

    최근 국내에 진출한 일부 외국계 IT(정보기술) 기업들이 적당한 CEO를 구하지 못해 경영 공백 상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미국계 컴퓨터 업체인 한국유니시스가 지난 3월 이후 6개월 가까이 지사장을 뽑지 못하고 있고,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도 지난달 유원식 전 한국휴렛팩커드 부사장을 신임 사장으로 영입하기까지 넉 달 동안이나 CEO 자리를 비워둬야 했다.

    고급인재를 알선하는 헤드헌터들은 “아직까지 한국에서 CEO의 성공담을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파격적인 조건이 제시되고 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것.



    외국 기업들은 ‘미래 경영자’ 후보군 별도 관리

    이처럼 외국계 IT 기업이 한국에서 CEO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외국어에 능통한 IT 전문가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국내 기업들이 CEO를 배출해온 시스템이 외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 기업의 CEO는 대부분 업종을 불문하고 여러 계열사를 돌며 오너의 신임을 얻어 CEO로 승진하는 절차를 밟아왔다. 국내 기업 총수들 중 유독 오너의 비서 출신이 많은 것도 우리 기업풍토에서 CEO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오너의 신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다국적 컨설팅 업체 베인앤컴퍼니 한국지사 이성용 대표는 “국내 기업의 CEO들은 그동안 회사에 공헌한 대가로 CEO 자리에 오르는 일이 많았다”며 “전문경영인으로서 전략적으로 사고하기보다는 아랫사람에게만 일을 맡기는 한국식 경영 마인드에 젖어 있다”고 지적했다.

    “쓸 만한 CEO 어디 없소”
    이와 달리 대부분의 외국기업들은 미래의 경영자 후보군을 관리하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대개의 경우 25~35세 사이에는 여러 분야를 경험하도록 해 그 사람에게 맞는 분야를 찾고, 그 사람에게서 CEO의 자질이 발견되면 35~45세까지 경영자 수업을 받게 한다. 엄격한 평가기준에 의해 선발되는 이들은 특별 급여 체계를 적용받으며 체계적인 리더십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매년 치밀한 심사를 통해 핵심 인력군 잔류와 탈락이 결정된다. 헤드헌터들에 따르면 이때 눈에 띌 만한 실적을 내야만 CEO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한다. 오너에 대한 충성심이나 친분이 아닌, 오로지 성과에 따라서만 CEO가 결정되는 것.

    삼성 LG 포스코 등 국내 대기업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제너럴 일렉트릭(GE)의 크로톤빌 연수원은 대표적인 CEO 양성 프로그램이다. 국내 최고의 CEO로 손꼽히는 김정태 국민은행장도 올해 초 다녀온 것으로 알려진 크로톤빌 연수원은 교수들의 강의를 수동적으로 듣는 형태가 아닌 실제 기업들이 안고 있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등 철저한 현장학습으로 진행된다. 회계 리더십과 마케팅 리더십을 교육하는 크로톤빌은 GE 특유의 인사조직평가를 통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인물에게만 연수 자격을 준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도 CEO 지향 제도 본격화

    베인앤컴퍼니 이성용 대표에 따르면 대부분의 국내 대기업이 가족경영체제이고,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맡는 일은 많지 않아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CEO 양성을 위한 내부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이건희 회장이 “디지털시대에는 한 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며 인력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삼성이 적극적으로 인력관리에 나서고 있고, SK 코오롱 두산 등도 외부 컨설팅을 통해 본격적인 ‘CEO지향형’ 인력관리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헤드헌팅 업체에서나 쓰이던 ‘하이 포텐셜(High Potential)’이라는 말이 삼성 같은 대기업에서는 ‘H급 인력’이라는 용어로 정착하기도 했다. 장래 최고경영자나 중역으로 커나갈 수 있는 높은 잠재력을 가진 사원이라는 말이다.

    국내 기업들은 이러한 인재양성 프로그램 개발과 함께 최근 외부에서 CEO를 영입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고급인력을 알선하는 ‘CEO 헤드헌터’들에 따르면 과거에는 헤드헌팅 업체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국적기업 한국 지사의 CEO를 찾는 사람들이었으나 최근 들어 CEO를 구해달라는 국내 대기업의 요구도 많아지고 있다. 다국적 헤드헌팅 업체인 ITP월드와이드코리아 김성민 대표는 “해외 경쟁사, 혹은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는 선진 기업들로부터 대표급 임원들을 데려오려는 대기업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며 “외국계 헤드헌팅 회사의 한국 진출에 대한 관심이 높고, 그 숫자가 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국내에서도 CEO를 사고 파는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 기업들이 CEO나 임원급 간부의 외부 영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뒤, 더 이상 오너 중심 체제로는 전문화된 시장을 개척해나갈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금융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팔방미인형 ‘멀티CEO’들이 속속 출현하는 것도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계열사 내에서 안정된 승진을 보장받아왔던 기존 CEO들의 위기의식으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헤드헌팅 업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또한 국내 기업의 임원급 간부나 CEO가 외국계 기업의 한국지사장으로 스카우트되거나 국내 진출 다국적기업의 한국인 지사장이 해외 본사의 지역 CEO로 진출하는 것도 ‘CEO 지향형’인력관리 프로그램의 성과로 볼 수 있다. 지난 6월 한국에서 영업을 시작한 미국계 제너럴밀스가 동서식품에서 오래 일해온 한종률씨를 제너럴밀스코리아 초대사장으로 임명한 일이나 지난 99년부터 농심켈로그 사장으로 일해온 신현수씨가 지난 3월 켈로그 본사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담당 사장으로 ‘영전’한 것도 이런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헤드헌팅 업체 대표 역시 “소니코리아의 이명우 사장처럼 국내 대기업 임원이 조만간 일본계 전자회사 지사장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유니코서치 유순신 사장은 “기업들이 과거에는 인간관계 좋고 조직 운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호했으나 최근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회적 평가가 우수한 CEO를 선호한다”며 “과감한 인센티브로 CEO의 전략적인 사고를 유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베인앤컴퍼니 이성용 대표는 “국내 CEO시장이 보다 유연성을 갖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승진과 어느 분야에서든 CEO를 새로 영입하면 거리낌없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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