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7

2002.08.15

난 공연하러 ‘지하철’로 간다

‘지하철 예술무대’ 새내기 예술가 열린 공간 … 도심 속 페스티벌 정착 모색도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입력2004-10-07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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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공연하러 ‘지하철’로 간다
    을지로입구나 잠실 등의 지하철역을 지나다 보면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가운데 음악이 흘러 나오는 장면을 가끔 볼 수 있다. 지하철 이용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이 풍경은 바로 ‘지하철 예술무대’ 공연의 현장이다. 2000년에 시작되어 벌써 3년째를 맞는 지하철 예술무대는 동대문운동장, 경복궁, 이수, 노원 등 30여 군데의 지하철 역사에서 열린다. 공연 장르도 클래식 음악과 록밴드를 비롯해 무용, 국악, 해외 민속음악, 인형극, 마임 등 다양하다. 한마디로 정식 극장 무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공연 장르가 지하철역이라는 열린 무대에 있다.

    최근 지하철 무대는 역뿐만 아니라 전동차 안에까지 진출했다. 7월30일 온수역과 태릉입구역 사이를 달리는 7호선 열차 안에서는 잉카의 민속음악과 인형극, 탭댄스의 흥겨운 공연이 벌어졌다. 도시철도공사에서 운영하는 문화열차 ‘위민 메트로’(Women-Metro) 안에서 70분간의 공연이 펼쳐진 것. 전동차의 구조상 제한된 관객들만 볼 수 있었지만 뜻하지 않은 공연을 만난 승객들은 무척 즐거워했다.

    전동차 안에서 흥겨운 만남

    지하철 ‘무대’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 지하철역은 을지로입구역, 공덕역, 이수역, 김포공항역 등 손으로 꼽을 정도다. 개통된 지 오래된 지하철 역사일수록 공연하기에 열악한 상황이다. 출연자들이 역사 한구석에 자리를 깔고 공연을 하면 지나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본다. 물론 조명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야말로 가난한 예술인들의 가난한 무대다.

    난 공연하러 ‘지하철’로 간다
    지하철역 중에서도 출연자들이 선호하는 역이 있다. 3호선 경복궁역이나 5호선 광화문역은 역내에 미술전시장이 있어 비교적 예술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또 2호선 을지로입구역은 역 한가운데에 무대가 있어 관객들의 집중도가 높은 편이다. 반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은 환승역에서는 공연을 하기가 어렵다. 종로3가역 같은 경우는 3개 노선이 지나다니는 데다가 노숙자까지 많아서 공연이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외국의 경우, 지하철역에서 공연하는 ‘메트로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버스킹’(Busking)족이다. 이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간단한 장기를 보여주며 푼돈을 구걸한다. 자신의 예술을 선보이는 동시에 아르바이트도 하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메트로 아티스트’들이 받는 출연료는 전혀 없다. 또 누구나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디션을 거쳐야만 공연 허가를 받을 수 있다. 답답하고 탁한 공기 속에서 한 푼의 보수도 없이 땀 흘리며 공연을 하는 ‘메트로 아티스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난 공연하러 ‘지하철’로 간다
    이건민씨는 2001년에 3호선 경복궁역에서 피아노 연주를 시작해 지금껏 20회 이상 지하철 무대에 섰다. 연세대 작곡과 졸업반인 그는 졸업 후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학교 후배가 ‘지하철 무대에서 같이 연주해 보자’고 제의했을 때는 갈등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훈련의 무대로 지하철을 선택했다.

    “반년 이상 지하철 무대에서 계속 연주하는 것은 그동안 나름의 음악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죠. 또 지하철역에는 내 음악을 들어주는 관객이 항상 있으니까요.” 이씨는 “적지 않은 연주자들이 정식 무대에 서기 힘든 현실이다. 지하철 예술무대는 관객도, 연주자도 불편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많은 공연 기회와 자유를 준다”고 말한다.

    올해 6월부터 지하철역에서 ‘색을 입자!’라는 무용 공연을 선보이고 있는 선나영씨도 순천향대 무용과를 졸업한 무용인이다. 그는 무용공연의 객석이 무용 관계자들로만 메워지는 현실이 아쉬워서 지하철 무대를 찾았다. “사실 무용은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부분이 많죠. 그런 데 비해 지하철 무대에서는 일반인과 함께 저의 무용을 공유할 수가 있습니다.”

    무용의 경우는 부상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무대 바닥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에 준비 과정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 바닥을 깔고 분장을 하는 데 2시간이 훌쩍 지나가지만, 정작 공연은 10분 정도에 그치기도 한다. 선씨는 ‘기본적으로 바닥이 고르게 되어 있어야 춤을 추는 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공연 사고나 에피소드 적지 않아

    난 공연하러 ‘지하철’로 간다
    현재 1호선부터 4호선까지의 지하철 예술무대는 공연기획사 이일공이, 그리고 5호선부터 8호선까지는 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하고 있다. 공연 준비는 공연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한다. 열린 공간인 지하철역에서 공연을 하다 보면 사고나 에피소드가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공연 중간에 관객이 뛰어들어 같이 춤을 추는 정도는 사고 축에도 못 든다. 재즈밴드 ‘웨이브’는 공연 도중 장비의 전력이 나가버려 10분 정도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경험이 있다. 지하철역의 특성상 전동차가 들어올 때 전력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기 때문에 이런 사고가 생겼던 것. 그래서 지하철 예술무대에서는 큰 장비를 되도록 쓰지 않는다. 또 록밴드들은 공연 도중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는 역내 입주 상인이나 역무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난감해하기도 한다. 천장이 낮은 지하철역에서는 앰프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기 때문이다.

    평균 관객 수 240여명, 올해 상반기에만 300여 회가 넘는 공연이 열린 지하철 예술무대는 도심 속의 페스티벌로 정착할 길을 도모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땅속에서도 공연을 한다’는 자체가 화젯거리였죠. 이제는 지하철 무대가 제대로 된 공연문화로 정착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예술 전공자들이 지하철 무대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예술학교에서 음악이나 무용 등을 전공하고도 본격적인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는 기회를 갖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이런 학생들에게 지하철 무대가 기회와 용기를 주는 장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일공의 공연기획자 정성진씨의 말이다.

    메트로 아티스트들에게도 바람이 있다. 좀더 무대다운 무대나 관객들의 진지한 자세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의 가장 큰 희망은 재정적 지원. 현재 서울시나 지하철공사 등은 지하철 예술무대에 거의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도심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에게 ‘예술’이라는 신선한 선물을 선사하는 이들은 ‘큰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니다. 교통비나 점심값 정도의 지원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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