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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16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불같은 성격, 사자 같은 용모의 명연설가…평생 중도노선 지키며 기독교 사회운동에 헌신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1991년 1월 20일 서울 라마다올림피아호텔(현 올림피아호텔 서울)에서 크리스챤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남북문제 세미나에 강원용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과 민자당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정원식 국무총리, 민주당 김대중 공동대표가 나란히 참석했다(왼쪽부터). 동아DB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문익환을 제외하면, 한신(韓神) 그룹에서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인물은 강원용이다. 김재준은 물론이고 문익환, 안병무 등이 모두 학교(한신대)에 적을 두었다면, 김재준이 키운 또 한 명의 걸출한 제자인 강원용은 학교 바깥에서 일선 목회자이자 탁월한 조직가, 활동가로 활약했다.
강원용이 운영하던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가 1970년대 정권의 탄압 아래서 민주진영 인사들의 피신처가 됐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 현대지성사에서 한신의 위치를 이야기하려면 한신과 기장(기독교장로회)이 지닌 ‘조직’으로서의 영향력 문제를 피해가기 어려운데, 강원용이 그 영향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1917년 함남 이원 출생인 강원용은 서른 살도 되기 전인 해방기에 이미 청년 웅변가로 이름을 날렸고, 이후 목회를 할 때 탁월한 설교가로 명성을 얻었다. 훗날 김경재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로 강원용을 평했다. “아마 정계로 나갔다면 대통령이 됐거나, 못해도 국무총리는 몇 번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웅변을 잘했고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어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설교였습니다”(김경재의 ‘여해 강원용 목사와 한국사회 속의 교회’). 강원용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을 타고났고 사자 같은 용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북간도 룽징(龍井) 은진중 재학시절, 학생회장이던 강원용은 스승 김재준의 강권과 은진중의 캐나다인 교장의 지원으로 1939년 일본 메이지학원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노조)과 농민조합을 일본에 도입하고 빈민운동을 하던 기독교인 가가와 도요히코를 직접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학병세대에 속하는 강원용은, 학병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서 돌아와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이 목사로 있던 룽징 중앙교회 전도사로 일하다 해방과 함께 월남했다.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1975년 1월 크리스챤아카데미 중간집단 교육 중 농촌지도자 지도력 개발 과정에서 강의하는 강원용(오른쪽). 사진 제공 ·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WCC의 거물이 되다

일반적으로 강원용이라 하면 흔히 따라 붙는 수식어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 ‘기독교 사회운동의 선구자’ 등이다. 사실 강원용은 한국보다 세계에 더 많이 알려진 기독교 지도자다. 이렇게 된 데는 강원용의 WCC(세계교회협의회) 활동이 있었다. WCC와의 인연은, 강원용이 뉴욕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한 1954년 미국 에번스턴에서 열린 WCC 2차 총회에 참석하면서 시작됐다. 동서와 남북으로 쪼개진 국제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교파와 교리를 넘어 교회일치운동을 주창하며 시작된 WCC는, 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창립총회 선언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포함하고 있었다.
“기독교회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자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해야 하며, 또 양극단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사람들을 벗어나게 해야 한다.”
이런 WCC의 중도 통합 노선이 1950년대 후반 한국 교계에서 월남 보수우익 기독교 세력에 의해 ‘용공주의’로 비난받게 되고, 급기야 WCC 가입 문제로 예수교장로회(예장) 내부에서 ‘통합’(가입파)과 ‘합동’(비가입파)으로 교단이 분열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김경재의 ‘강원용 목사와 에큐메니컬 운동’).
강원용은 1961년 인도 뉴델리 WCC 3차 총회에서 ‘교회와 사회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국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뉴델리 3차 총회는 한국 기독교 진보진영의 지식운동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제3세계 국가들에서 일어난 탈식민운동이 WCC에도 본격 상륙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는데, 세계 교회의 흐름에 민감하고자 했던 강원용 등 한신과 기장 인사들이 한국 교회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이 대회의 영향을 받았다.
3차 총회가 있던 뉴델리에서 열린 WSCF(세계기독학생연맹·WCC 학생 조직) 대회에서 강원용은 주제 강연을 했다. 1961년 이 강연에서 강원용은 이후로도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에 매우 중요한 원칙이 되는 시각 하나를 제시했다. 강원용은 사회 문제에 대한 기독교회의 오랜 입장, 즉 구호와 자선으로 접근하는 것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문제를 ‘구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명확히 선언했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보다 큰 정의를 실현할 사회구조 자체의 개혁을 통해 구현돼야 한다.”(강원용의 ‘아시아의 혁명과 크리스찬의 응답’)
지속적으로 세계 기독교계의 흐름을 한국 내에 전달하고 또한 한국 상황을 세계 기독교계의 노선에 반영하고자 노력했던 강원용은 유신 선포 다음 해인 1973년,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정권이 ‘건드릴 수 없는’ 국제적인 거물이 됐던 것이다.
강원용은 1962년 독일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지원을 받아 한국에서 기독교사회협의체인 크리스챤아카데미(정식 발족 1965년, 2015년 재단법인 ‘여해와함께’로 변경)를 설립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 회장이 된 이듬해인 74년 강원용은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크리스챤아카데미의 경기 수원 사회교육원에서 ‘중간집단 교육’을 시작했다.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중간집단 교육은 일종의 ‘활동가 양성’ 교육이었다. 이 교육이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대단하다. 김세균, 신인령, 김근태, 천영세, 이우재, 한명숙, 윤후정 등 1970년대 이후 진보진영의 ‘지도급’ 인사들은 거의 이 중간집단 교육 프로그램의 교육담당자이거나 교육생 출신이었다.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일제 치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조선 좌우세력이 연대를 추진했던 운동으로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등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가했고 강원용은 당시 최연소 위원이었다(왼쪽 사진 가운뎃줄 왼쪽에서 두 번째). 1987년 6월 25일 강원용(가운데)은 한경직 목사와 함께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왼쪽)을 만나 시국 수습에 대한 의견을 전했다. 동아DB


진보 지식인 양성소 크리스챤아카데미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강원용은 1969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서 바이체커(훗날 독일 대통령·왼쪽)를 처음 만난 후 돈독한 인연을 맺었고, 바이체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동아DB

1974년 시작해 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반공법 사건’으로 끝나기까지 약 5년에 걸쳐 진행됐던 중간집단 교육은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종교 등 5개 분과로 운영됐다. 가장 주력한 영역은 노동자분과의 노조 강화 교육으로 교육담당자로는 김세균과 신인령 등이, 교육참여자로는 김근태와 천영세 등이 있었으며 농민분과에서는 이우재가, 여성분과에서는 한명숙, 윤후정 등이 교육담당자로 활동했다. 한명숙, 김세균, 신인령, 이우재 등은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신분으로 교육활동을 하던 중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이 사건으로 교육 프로그램은 정리됐다.
이 교육 프로그램은 사회 각 방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분과의 경우 교육생들이 별도로 여성사회연구회를 구성하면서, 1977년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이 교양선택 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제도권 학계 내 여성학의 시작이었다. 노동자분과의 경우는 예기치 않은 씨앗을 키우기도 했다. 80년대 말 좌파 노동운동의 상징 중 하나인 박노해가 이때 노동자분과 교육생이었던 것.
이 프로그램은 훗날 타 종교의 사회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일찍 출가해 20대 초반 나이였던 젊은 스님 한 사람이 농민분과 교육생으로 있었다. 훗날 평화재단과 정토회를 이끌게 되는 법륜이었다. 법륜은 이때 강원용을 처음 만나 이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사회에 대해 처음으로 눈뜨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실 때까지 오랫동안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 바로 강원용 목사님”이라고 했다(법륜의 ‘여해 강원용 목사와 종교 간의 대화’). 법륜은 이때의 교육 경험을 1980년대 초반 불교계 사회운동에 활용하다 ‘기독교 프락치’로 오인받아 승려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고 전한다.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반공법 사건이 터졌을 때 강원용도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았으나, 정권은 끝내 강원용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의 뒤에 WCC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원용은 국내외 유명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웠고 정치계, 언론방송계, 학계에 두루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위 사회지도층 사이에서 ‘마당발’이었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가 재야인사들의 피신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강원용이 사회 주요 인사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다양한 가치들 사이를 중재하고 통합을 매개하는 삶을 산 것은 일찍이 20대 젊은 시절부터 시작됐다. 해방 직후부터 이미 ‘청년 웅변가’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강원용은, 조선신학교 학생으로서 청년 정치 활동을 병행했다. 이 시기 강원용은 김규식계에서 활동했다. 1946년 3월 교회청년연합회(회장 김규식) 총무를 맡았으며 같은 해 봄, 여운형 휘하의 김용기(후일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와 기독교 정치동맹을 결성해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47년 6월에는 김규식의 추천으로 좌우합작위원회 정식 위원(청년대표)으로 활동했다. 요컨대 남북 분단을 막고자 했던 정치노선의 핵심에 있었던 것이다.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여해(如海) 강원용(1917~2006)은 함남 이원 출신으로 김재준이 은진중 교사로 부임한 1936년 여름, 학생회장으로 인연을 맺었다. 사진 제공 ·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해방기부터 비롯된 중도 지향의 삶

해방기 강원용은 패기만만한 젊은 세대로서 새 국가 건설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하고 싶어 했다. 여운형의 암살과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초 이후 정치활동을 접은 강원용이 힘을 집중한 영역은 기독학생운동으로, 국가 건설을 위한 ‘새 세대 육성’이었다. 그는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다녔고, 강연록을 모아 1949년 하반기 이희호(훗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의 도움으로 ‘새 시대의 건설자’라는 책을 출간했다. 발간 6개월 만에 6쇄가 나갔다고 한다.
모두 알고 있듯,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 모두에서 중도노선은 설 자리를 잃었다. 1950년대 후반 평화통일론과 중도 정치노선을 표방하며 등장한 진보당도 조봉암의 사형과 함께 궤멸됐다. 53년 캐나다를 거쳐 미국 유학을 떠났던 강원용은 진보당 창당(1956년 11월)을 멀리서 지켜봤던 듯하다. 훗날 강원용은 이때를 회고했다.
“진보당 관계자들 중에는 이명하, 윤길중, 조규희, 김기철 등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중략) 혁신 정당을 자처하며 출범한 진보당에는 해방 후 나와 함께 중간노선에서 활동한, 앞서 거명한 사람들이 모두 관계하고 있었다.”(강원용의 ‘역사의 언덕에서’ 제2권)
그렇지만 그는 귀국 후 더는 정당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강원용은 평생에 걸쳐 극단으로 기우는 것을 싫어했다. 해방기는 물론,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운영하던 1970년대에도 중간집단 교육이 좌경화되는 것을 항상 우려했다. 기독교 노동운동 내에서도 급진적 노선을 걷던 도시산업선교회에 경계를 표시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간사들이나 교육생들과 다소 마찰이 일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강원용이 본 ‘중간집단’의 기능은 ‘약자에게 힘을 주고, 억압자에게 압력을 가하는 집단’이었다. 말하자면, 궁극적으로는 사회통합 견지에서 구상된 것이었다.
분열을 통합하고 대화의 중재자가 되고자 했던 강원용은 오늘날 일반 대중이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말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거물이었다. 


주간동아 2015.12.23 1018호 (p64~67)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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