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늦봄 무렵, 한 달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걸출한 문인이 작고했다. 5월 17일 조지훈이 지병인 기관지천식으로 별세한 후 한 달 뒤인 6월 16일 김수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조지훈과 김수영은 태어난 해도 같았다. 학병세대에 속하는 1921년생으로 사망 당시 48세였다. 한창의 나이였다.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 대학가의 대자보 논란과 함께 유명해진 김수영의 시 한 편에 조지훈이 언급돼 눈길을 끌었다. 2008년 김수영 40주기 즈음해 부인 김현경 씨가 보관하던 자료를 김명인 교수가 발굴해 공개한 김수영의 미발표 유고로 ‘김일성 만세’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시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 전반부)
사려 깊은 독자라면 금방 눈치채겠지만, 장면 정권기인 1960년 10월 6일로 탈고 표시된 이 시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한국 언론 자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시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조지훈을 언급했을까.
이 이야기는 시를 평하려는 것도 아니며 시인들을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해방 후 한국지성사에서 정신의 두 원형에 관한 이야기다.
1921년 1월 11일 경북 영양 출신인 조지훈은 영남 북부 유림 명가인 한양 조씨 호은종택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명성처럼 기골이 대단한 집안이었다. 증조부 조승기는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항일운동을 하다 매천 황현처럼 한일합병 직후 자결했다. 조부 조인석은 구한말 사헌부 대간을 지낸 선비로 6·25전쟁 때 마을이 유린되자 역시 자결했다. 부친 조헌영은 일본 와세다대 영문학부를 다니던 도쿄 유학생 시절 재일 동경유학생 학우회장으로 있었고, 해방 후 한민당(한국민주당) 창당 멤버로 활동하면서 제헌국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런 집안에서 조지훈은 서당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하기까지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검정고시 후 독학으로 혜화전문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은 당연히 없었으며 당시 명문가 출신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일제 교육을 받지 않은 셈이었다. 일본에 ‘빚진 바’ 없음은 조지훈에게 어떤 ‘당당함’의 근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조지훈은 지적으로 매우 조숙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 ‘승무’는 혜화전문에 다니던 19세 때 지은 작품이다. 일찌감치 유학과 불교에 통달해가던 조지훈은 혜화전문을 졸업한 1941년 4월,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外典) 강사로 갔다. 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원을 맡기도 했으며, 해방 직후인 45년 미 군정청 학무국(교육부에 해당)에서 위촉한 한글학회 ‘국어교본’과 진단학회 ‘국사교본’의 편찬원으로 일했다.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 전신)와 동국대 강사를 거쳐 48년 가을 28세에 고려대 문과대 교수로 부임했다.
조지훈이 한국 전통 탐구에 가졌던 집착은 순수하게 학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격류하는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봤고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민족 주체의식 확립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민족 주체의식 확립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가. 먼저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이에 따라 전통 탐구가 이어졌다. 말하자면 조지훈은, 민족문화의 새로운 창조는 전통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전형적인 전통주의자이자 문화적 보수주의자였다.
전통에 대한 이런 태도는 개인적 ‘처신’으로도 나타났다. 박목월은 다음과 같이 그를 평했다. “모든 처신에 의젓했고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하기를 거부했으며 모든 일에 공명정대하기를 염원하며 대의명분이 서지 않는 일에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박목월의 ‘지훈 회상 이제(二題)’). 조지훈은 용모에도 고전적 ‘귀태(貴態)’가 있었다. “누구든 선생을 한번 뵈면 대뜸 그 비범한 기품에 눌렸다. 훤칠한 장신에다 장발도 그렇지만 티 한 점 없는 백석(白晳)의 얼굴빛과 검은 테 안경 너머 좀 수줍은 듯한 안광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귀족적이면서도 소탈한 데가 있어 사람을 끌어당기기도 하나 도저히 버릇없이 굴게는 안 되었다.”(박희진의 ‘지훈 선생의 이모저모’)
요컨대 조지훈은 ‘도의’ ‘지조’ ‘애족’ ‘애민’을 좌우명으로 삼는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모습 그대로이고자 했다. 조지훈이 이승만 정권과 공화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일도 박노준의 표현대로 일종의 ‘선비다운 우국경세의 붓’을 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3·15 부정선거 직전인 1960년 2월 발표한 글 ‘지조론’은 마치 옛 선비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조지훈의 ‘지조론’)
조지훈은 전통적인 민족주의적 지사(志士)의 관점에서 과거 친일파가 해방기 친미파로 변신한 것에 혐오를 나타냈고, 나아가 1950년대 친일·친미주의자 중심의 자유당 정권을 ‘뒤집어엎고’ 싶어 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 말기, 학생의 의분을 촉구하면서 대학생이 혁명의 선두에 서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학문에의 침잠을 방패 삼아 이 참혹한 민족적 현실에 눈감으려는 경향은 없는가? (중략)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여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우리는 민족의 지사, 구국의 투사로서 자임해야 할 시기가 왔다.”(조지훈의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네 벽 어디를 두드려 봐도/ 이것은 꽝꽝한 바윗속이다. (중략) 절망하지 말아라/ 이대로 바윗속에 끼어 화석이 될지라도/ 1960년대의 포악한 정치를 네가 역사 앞에 증거하리라.”(조지훈의 시 ‘터져오르는 함성’ 일부)
4·19와 5·16의 격동기에 김수영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까. ‘김수영 평전’을 쓴 최하림은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김수영의 행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5·16 직후 대엿새 동안 온 데 간 데 없었다. 김수영의 행방불명은 조지훈이 쿠데타군에 연행돼 간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수영은 김이석의 집에 숨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김수영의 ‘소심함’은 김명인 교수가 다음과 같이 말한 그대로였다. “김수영의 현실참여는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서명에 뒤늦게 참여하고 함석헌의 꼿꼿한 저항에 감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신이 의용군 출신이라는 것에 기인한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 섬약한 그에게 늘 족쇄로 작용했다.”(김명인의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여러 사람의 회고를 종합할 때, 확실히 김수영은 ‘눈이 크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서울 종로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학교는 다니지 않고 연극연구소에 출입하다 징병을 피해 44년 2월 초 귀국했다. 서울 고모댁 다락방에 피신해 있던 김수영은 곧 어머니를 따라 만주 지린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해방 후 전쟁 때 서울에 남아 있다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 미군 포로가 돼 거제도에 수용되는 곤욕까지 치른 김수영은, 1955년 마포 구수동에 정착해 양계를 하면서 틈틈이 번역을 병행하는 다소 ‘지질한’ 삶을 살았다. 김수영은 맏이였지만 출판사(현대문학사)에 다니던 첫째 여동생 김수명의 보살핌에 종종 의지했다. 김수영은, 술값 때문에 혹은 그냥 돈이 없을 적에도 누이를 찾아갔다고 한다.
성격, 기질, 출신 등 어느 모로나 조지훈과는 반대되는 김수영이었지만, 그럼에도 한국 현대지성사에서 김수영의 위치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는 ‘자유정신의 불모지’ 한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자유주의를 시와 글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김수영은 정치적인 자유, 언론 자유가 곧 예술의 자유이며, 다른 모든 자유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또한 역으로 미적·문화적 저항은 곧 정치적 저항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꿰뚫어봤다. 그가 그린 사회는 “혼란이 허용되는 사회”이며 “잠꼬대를 써도 용납해주는 사회”였다(미발표 시 ‘김일성 만세’의 또 다른 제목이 ‘잠꼬대’였다).
김수영은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 김수영에게 민족주의란, 그것이 진보적이든 아니든 ‘위험한’ 것이었다. 1960년대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 거개가 민족주의로 달려갈 때, 김수영은 그 위험성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민족주의라는 범주 안에 남과 북은 동일하게 갇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김수영에게는, 자유와 사랑과 혁명이 남북통일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김수영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김일성 만세’가 아니라 김일성 만세라고 ‘할 수 있는 자유’였다.
김수영은 조지훈 식의 논리가 가진 문제를 보고 있었다. 김수영에게 자유의 ‘제한’이란 곧 자유의 ‘부재’를 의미했다. 김수영에게는, 자유는 사랑과 동의어였고 사랑이 없다면 진보도 없었다.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김수영의 ‘요즈음 느끼는 일’)
조지훈 대 김수영, 이 구도는 현대 한국의 정신사에서 보수 대 전위, 전통 대 현대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 보수주의자 조지훈과 진보적 자유주의자 김수영은 다른 모든 지성을 대표한다.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 대학가의 대자보 논란과 함께 유명해진 김수영의 시 한 편에 조지훈이 언급돼 눈길을 끌었다. 2008년 김수영 40주기 즈음해 부인 김현경 씨가 보관하던 자료를 김명인 교수가 발굴해 공개한 김수영의 미발표 유고로 ‘김일성 만세’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시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 전반부)
사려 깊은 독자라면 금방 눈치채겠지만, 장면 정권기인 1960년 10월 6일로 탈고 표시된 이 시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한국 언론 자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시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조지훈을 언급했을까.
조선 선비, 전통적 인문주의자 조지훈
조지훈과 김수영이 언제 어디서 만나 어떤 대화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작가 이호철에 따르면 6·25전쟁이 나기 전 서울 명동 다방 ‘무궁원’에 드나들던 많은 문인 중 조지훈과 김수영도 있었다고 하며, 한때 김수영과 함께 동인지 활동을 한 김규동의 회고를 보면 1950년대 중반 명동 다방 ‘동방살롱’에서 조지훈과 김수영이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모두 확증할 수 없는 말들이다. 이 시에서 김수영이 조지훈을 언급한 것은 단순히 조지훈의 ‘글’을 읽은 김수영의 소감일 수도 있다.이 이야기는 시를 평하려는 것도 아니며 시인들을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해방 후 한국지성사에서 정신의 두 원형에 관한 이야기다.
1921년 1월 11일 경북 영양 출신인 조지훈은 영남 북부 유림 명가인 한양 조씨 호은종택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명성처럼 기골이 대단한 집안이었다. 증조부 조승기는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항일운동을 하다 매천 황현처럼 한일합병 직후 자결했다. 조부 조인석은 구한말 사헌부 대간을 지낸 선비로 6·25전쟁 때 마을이 유린되자 역시 자결했다. 부친 조헌영은 일본 와세다대 영문학부를 다니던 도쿄 유학생 시절 재일 동경유학생 학우회장으로 있었고, 해방 후 한민당(한국민주당) 창당 멤버로 활동하면서 제헌국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런 집안에서 조지훈은 서당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하기까지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검정고시 후 독학으로 혜화전문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은 당연히 없었으며 당시 명문가 출신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일제 교육을 받지 않은 셈이었다. 일본에 ‘빚진 바’ 없음은 조지훈에게 어떤 ‘당당함’의 근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조지훈은 지적으로 매우 조숙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 ‘승무’는 혜화전문에 다니던 19세 때 지은 작품이다. 일찌감치 유학과 불교에 통달해가던 조지훈은 혜화전문을 졸업한 1941년 4월,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外典) 강사로 갔다. 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원을 맡기도 했으며, 해방 직후인 45년 미 군정청 학무국(교육부에 해당)에서 위촉한 한글학회 ‘국어교본’과 진단학회 ‘국사교본’의 편찬원으로 일했다.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 전신)와 동국대 강사를 거쳐 48년 가을 28세에 고려대 문과대 교수로 부임했다.
보수주의자의 현실정치 비판
조지훈에게 한국의 전통과 고전은 일종의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고려대 교수로 있던 1963년, 조지훈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민연·현 민족문화연구원)를 만들어 사망할 때까지 5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는 등 고전 한국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조지훈이 한국 전통 탐구에 가졌던 집착은 순수하게 학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격류하는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봤고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민족 주체의식 확립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민족 주체의식 확립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가. 먼저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이에 따라 전통 탐구가 이어졌다. 말하자면 조지훈은, 민족문화의 새로운 창조는 전통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전형적인 전통주의자이자 문화적 보수주의자였다.
전통에 대한 이런 태도는 개인적 ‘처신’으로도 나타났다. 박목월은 다음과 같이 그를 평했다. “모든 처신에 의젓했고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하기를 거부했으며 모든 일에 공명정대하기를 염원하며 대의명분이 서지 않는 일에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박목월의 ‘지훈 회상 이제(二題)’). 조지훈은 용모에도 고전적 ‘귀태(貴態)’가 있었다. “누구든 선생을 한번 뵈면 대뜸 그 비범한 기품에 눌렸다. 훤칠한 장신에다 장발도 그렇지만 티 한 점 없는 백석(白晳)의 얼굴빛과 검은 테 안경 너머 좀 수줍은 듯한 안광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귀족적이면서도 소탈한 데가 있어 사람을 끌어당기기도 하나 도저히 버릇없이 굴게는 안 되었다.”(박희진의 ‘지훈 선생의 이모저모’)
요컨대 조지훈은 ‘도의’ ‘지조’ ‘애족’ ‘애민’을 좌우명으로 삼는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모습 그대로이고자 했다. 조지훈이 이승만 정권과 공화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일도 박노준의 표현대로 일종의 ‘선비다운 우국경세의 붓’을 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3·15 부정선거 직전인 1960년 2월 발표한 글 ‘지조론’은 마치 옛 선비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조지훈의 ‘지조론’)
조지훈은 전통적인 민족주의적 지사(志士)의 관점에서 과거 친일파가 해방기 친미파로 변신한 것에 혐오를 나타냈고, 나아가 1950년대 친일·친미주의자 중심의 자유당 정권을 ‘뒤집어엎고’ 싶어 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 말기, 학생의 의분을 촉구하면서 대학생이 혁명의 선두에 서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학문에의 침잠을 방패 삼아 이 참혹한 민족적 현실에 눈감으려는 경향은 없는가? (중략)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여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우리는 민족의 지사, 구국의 투사로서 자임해야 할 시기가 왔다.”(조지훈의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급진적 자유주의자 김수영
1950년대 말 신문·잡지의 논설을 통해 줄곧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던 조지훈은 학생과 시민이 들고일어선 1960년 4월 25일, 4·19혁명을 지지하는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을 기초했다. 4·19혁명 이듬해 5·16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대다수 사람이 그랬듯 조지훈도 일단 ‘환영’의 뜻을 표시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 한일협정을 추진하자 이내 비판적 태도로 돌아섰다.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 직전인 65년 7월 조지훈은 박두진, 신동엽 등과 문인들의 비준 반대성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다음의 시 구절은 공화당 정권에 대한 조지훈의 배신감과 분노를 그대로 보여준다.“네 벽 어디를 두드려 봐도/ 이것은 꽝꽝한 바윗속이다. (중략) 절망하지 말아라/ 이대로 바윗속에 끼어 화석이 될지라도/ 1960년대의 포악한 정치를 네가 역사 앞에 증거하리라.”(조지훈의 시 ‘터져오르는 함성’ 일부)
4·19와 5·16의 격동기에 김수영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까. ‘김수영 평전’을 쓴 최하림은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김수영의 행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5·16 직후 대엿새 동안 온 데 간 데 없었다. 김수영의 행방불명은 조지훈이 쿠데타군에 연행돼 간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수영은 김이석의 집에 숨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김수영의 ‘소심함’은 김명인 교수가 다음과 같이 말한 그대로였다. “김수영의 현실참여는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서명에 뒤늦게 참여하고 함석헌의 꼿꼿한 저항에 감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신이 의용군 출신이라는 것에 기인한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 섬약한 그에게 늘 족쇄로 작용했다.”(김명인의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여러 사람의 회고를 종합할 때, 확실히 김수영은 ‘눈이 크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서울 종로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학교는 다니지 않고 연극연구소에 출입하다 징병을 피해 44년 2월 초 귀국했다. 서울 고모댁 다락방에 피신해 있던 김수영은 곧 어머니를 따라 만주 지린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해방 후 전쟁 때 서울에 남아 있다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 미군 포로가 돼 거제도에 수용되는 곤욕까지 치른 김수영은, 1955년 마포 구수동에 정착해 양계를 하면서 틈틈이 번역을 병행하는 다소 ‘지질한’ 삶을 살았다. 김수영은 맏이였지만 출판사(현대문학사)에 다니던 첫째 여동생 김수명의 보살핌에 종종 의지했다. 김수영은, 술값 때문에 혹은 그냥 돈이 없을 적에도 누이를 찾아갔다고 한다.
성격, 기질, 출신 등 어느 모로나 조지훈과는 반대되는 김수영이었지만, 그럼에도 한국 현대지성사에서 김수영의 위치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는 ‘자유정신의 불모지’ 한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자유주의를 시와 글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김수영은 정치적인 자유, 언론 자유가 곧 예술의 자유이며, 다른 모든 자유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또한 역으로 미적·문화적 저항은 곧 정치적 저항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꿰뚫어봤다. 그가 그린 사회는 “혼란이 허용되는 사회”이며 “잠꼬대를 써도 용납해주는 사회”였다(미발표 시 ‘김일성 만세’의 또 다른 제목이 ‘잠꼬대’였다).
김수영은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 김수영에게 민족주의란, 그것이 진보적이든 아니든 ‘위험한’ 것이었다. 1960년대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 거개가 민족주의로 달려갈 때, 김수영은 그 위험성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민족주의라는 범주 안에 남과 북은 동일하게 갇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김수영에게는, 자유와 사랑과 혁명이 남북통일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김수영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김일성 만세’가 아니라 김일성 만세라고 ‘할 수 있는 자유’였다.
보수 대 전위, 전통 대 현대의 원형
조지훈은 학생들을 지지했고 혁명을 원했고 정권을 비판했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의(義)’의 문제, 바른 ‘민족정신’의 문제였다. 그런데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의’에 있다면, 그 ‘옳고 그름’의 내용을 누가 어떤 각도에서 설정하느냐에 따라 억압이 발생할 수 있다. 조지훈은 장면 정부에서 대학생들이 보인 생각과 행동들을 ‘방종과 무질서’로 이해했다. 5·16쿠데타에 대해 조지훈은 다음처럼 말했다. “이번 혁명은 우리에게 자율적으로 방종에 흘렀던 자유를 당분간 제한해야 한다는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조지훈의 ‘나라를 다시 세우는 길’)김수영은 조지훈 식의 논리가 가진 문제를 보고 있었다. 김수영에게 자유의 ‘제한’이란 곧 자유의 ‘부재’를 의미했다. 김수영에게는, 자유는 사랑과 동의어였고 사랑이 없다면 진보도 없었다.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김수영의 ‘요즈음 느끼는 일’)
조지훈 대 김수영, 이 구도는 현대 한국의 정신사에서 보수 대 전위, 전통 대 현대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 보수주의자 조지훈과 진보적 자유주의자 김수영은 다른 모든 지성을 대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