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한 해 동안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남긴 공개 발언 중 정책 관련 단어들을 모은 ‘낱말 구름(Word Cloud)’(원 안). 단어의 크기와 빈도는 박 대통령이 사용한 횟수를 반영해 표현된 것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tagxedo.com
2015년 한 해, 한국에서 이러한 경향은 한층 두드러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남긴 수많은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됐고, 사람들은 그 숨은 뜻이 무엇인지 가늠하느라 분주했으며, 대통령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랫동안 대중 정치인으로 단련돼온 박 대통령이다 보니 메시지 프레임을 설정해 국민 사이에서 확산시키는 전략을 매우 성공적으로 구사한 셈이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머릿속을 차지했던 생각은 과연 무엇이고, 청와대가 세상에 뿌리고자 했던 메시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고자 텍스트 분석(Text Analysis) 기법을 활용했다. 특정 인물이 특정 기간에 했던 말을 해체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와 논리구조를 통계적으로 추출하고 이들 단어 사이의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거시적 차원의 인식 틀이 무엇인지 유추해내는 분석 방법이다. 이를 통해 무수한 낱말 사이에 숨어 있는 패턴을 추적하는 작업은, 외국 학계나 언론에서는 주요 정치 지도자의 인식구조를 들여다보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수행해온 일이다.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사용한 방법론을 간략히 소개한다. 대상이 된 텍스트는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1월 6일부터 12월 14일까지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회의 중 언론에 공개된 모두발언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정리한 이 텍스트는 총 34회, 16만1598자 분량에 달한다. 먼저 이 텍스트 전체를 형태소 분석 프로그램으로 분해해 조사와 의존명사, 어미 등을 빼고 체언과 용언의 어간 혹은 어근만 남겼다.
단어 수가 적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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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업을 거치고 나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년간 청와대 회의에서 남긴 말들의 얼개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주요 작업이 모두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이뤄졌으므로 단순히 발언록을 읽어 내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수치화된 접근이 가능하다. 그 결과물이 직관적인 해석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장점은 무시할 수 없는 덕목이다.
첫 번째로 눈여겨볼 대목은 전체 텍스트에 등장하는 단어의 개수다.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회의 모두 국가 정책을 다루는 고도로 전문적인 회의지만, 공교롭게도 박 대통령이 사용하는 낱말의 수는 일반 대중연설과 비슷한 수준이다. 2회 이상 등장하는 단어가 총 300개 안팎에 머무는 것. 이는 해외 다른 지도자가 사용하는 단어와 비교해보면 그 특징이 명확히 드러난다. 예컨대 쉽고 평이한 연설로 정평이 나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우 일반 대중연설에서 2회 이상 사용하는 단어는 역시 300개 안팎이지만, 우리의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사용하는 낱말 수는 500개에 육박한다.
이러한 특징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원래 박 대통령의 발언 스타일이 가급적 적은 단어로 문장을 만드는 방식일 수 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이전에 출간한 회고록이나 수필집 역시 복잡한 개념어 대신 평이한 단어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한다. 여의도 정가에서 논란의 도화선 구실을 했던 ‘진실한 사람’ 같은 어구가 이러한 용법의 대표 사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에서의 발언을 실제로는 일반 유권자를 향한 연설과 동일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내각과 참모들 앞에서 남긴 발언이지만 실제로는 언론이나 영상을 통해 발언을 접하게 될 국민을 청자(聽者)로 전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개연성은 박 대통령의 말이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화제의 대상으로 떠오르며 다양한 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켜온 원인이 무엇인지 가늠케 해주는 잣대다. 요컨대 모든 후폭풍은 박 대통령 본인이 의도한 것일 수 있다는 의미다.
긍정적 용언과 부정적 용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대통령의 인식체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도구다. 다른 판단 없이 사용된 횟수로만 따지면 ‘우리’ ‘국민’ ‘경제’ ‘정부’ ‘개혁’이 각각 150회 이상씩 쓰이며 상위권을 차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11쪽 표 참조). 대상 테스트가 총 34회의 발언이었으므로 ‘우리’와 ‘국민’은 발언당 평균 10회 내외, ‘경제’와 ‘정부’ ‘개혁’은 6~7회씩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보편타당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을 빼고 구체적인 정책적 함의를 담은 낱말들만 순위를 다시 매겨보면 박 대통령의 인식체계는 한층 명확히 모습을 드러낸다. 한데 묶을 수 있는 ‘개혁’과 ‘추진’이 1, 2위를 차지한 데 이어 ‘국회’가 총 120회나 쓰여 3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4~9위를 차지한 ‘일자리’ ‘청년’ ‘과제’ ‘노동시장’ ‘활성화’는 2015년 박 대통령의 정책적 관심이 대부분 노동시장 문제에 집중돼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가치판단 부분이다. 주로 형용사와 동사 등 용언의 쓰임새를 추적해 긍정적 의미를 담은 용언의 앞뒤에 오는 단어는 무엇인지, 부정적 의미를 담은 용언과 함께 등장한 단어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방식이다. 전체 발언 가운데 자주 등장한 용언으로는 ‘이루다’ ‘나가다’ ‘이기다’ ‘모으다’ ‘살리다’ 같은 긍정적 단어가 있고, ‘어렵다’ ‘겪다’ ‘끌다’ ‘낡다’ ‘안타깝다’ 같은 부정적 단어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가운데 긍정적 용언의 경우 주로 정부의 정책 입안이나 추진 과정에 대한 단어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이들 용언의 앞뒤 5개 단위 범위에서 주로 등장하는 명사가 ‘정부’ ‘대책’ ‘경제’ ‘극복’ ‘개혁’이라는 것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전체 텍스트 가운데 정책 추진 과정에 대한 질타나 질책 등의 부정적 언급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국제신용평가회사의 국가신용등급 상향 조정,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등 긍정적 사안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나 다짐이 주를 이룬다. 정부 정책에 대한 단어와 문장들이 ‘알리다’나 ‘홍보’ 같은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 빈도가 높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 정책 추진과 관련해서는 ‘성과를 국민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게 박 대통령이 갖고 있는 핵심 메시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부정적 용언과 함께 등장하는 단어는? ‘시위’ ‘폭력’ ‘기득권’ ‘불법’ 등 다양한 단어가 있지만, 가장 압도적인 상관관계를 맺은 명사는 단연 ‘국회’(국회법, 정기국회, 임시국회 등 합성명사 제외)다. 이 낱말 자체가 전체 순위 10위를 차지할 정도로 자주 등장할뿐더러 ‘정치권’ ‘입법’ ‘법안’ ‘예산’ ‘통과’ 등 관련 단어까지 포함하면 그 비중은 기하급수적으로 뛴다. 앞서 박 대통령의 주된 관심사라고 제시했던 ‘노동’ ‘일자리’ 등의 낱말에 견줘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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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의 앞뒤를 추적해보면
국회에 대한 박 대통령의 언급을 월별 추이로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1년 내내 거의 고르게 분포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4월과 7월, 9월과 10월, 12월이 상대적으로 언급 비율이 늘었다(그래프 참조). 함께 사용된 단어를 추적해보면 각각 공무원연금개혁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정기국회와 이른바 ‘경제살리기 법안’ 등이 주요 화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이 가운데 부정적 용언과 결합하는 경우가 대통령과 새누리당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가 국회법 문제로 정면충돌한 6월 이후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이전 발언에서는 ‘국회에 협조를 부탁드린다’거나 ‘국회에 적극적으로 알린다’ 등의 조합이 심심찮게 눈에 띄지만, 이후에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있다’거나 ‘그 책임은 국회에 돌아갈 것’ 등의 부정적 언급이 80%를 넘나드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이러한 인식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잣대는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와 함께 등장한 단어를 추적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발목’이라는 낱말의 경우, 앞뒤 5개 단어 범위에서 가장 많이 함께 쓰인 단어가 모두 ‘통과’ ‘지연’ ‘어려움’ ‘방기’ 등 국회 관련 낱말들뿐이다. 이를 다시 앞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꼽은 정책 단어들과 연결해 재구성해보면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노동시장을 개혁해야 하지만, 국회에서 법안 통과를 해주지 않는 바람에 발목이 잡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2015년 한 해 동안 박 대통령의 인식을 장악한 핵심 메시지인 셈이다.
10월 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를 앞두고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끝)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진이 회의장에 입장하고 있다. 동아일보
거대한 선악 대립구도
긍정적 용언과 부정적 용언의 쓰임새만을 기준으로 크게 그림을 그려보면, 박 대통령의 인식은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리려 애쓰는 선한 정부’와 ‘이익만 챙기며 책임을 피하고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국회 혹은 정치권’이라는 두 개의 덩어리가 거의 배타적으로 분리돼 있다. 둘 사이 협력이나 협조를 말하는 문장은 상반기, 그것도 1~2월에 주로 눈에 띌 뿐이고, 국회법 파동 이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나 국회와 정치권에 대한 긍정적 언급이 모두 한꺼번에 사라졌다.전체적으로 거대한 선악 대립구도에 해당하는 이러한 인식 틀은 박 대통령이 스스로를 ‘입법부와 대결하는 행정부의 수장’이라는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과 내각, 참모진을 한편으로 둔 뒤 이들의 노력을 방해하는 국회를 압박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인식구조다. 특히 이러한 결론은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남긴 박 대통령의 발언이 실은 대국민연설에 가깝다는 앞서의 분석과 연결하면 한층 명확해진다. 자신의 이러한 인식을 국민에게 확신시키는 것이야말로 입법부 압박의 핵심 수단이며, 주요 회의에서의 발언은 그 채널인 셈이다. 자신은 알지만 세상은 모르는 ‘정치권의 실체’를 국민에게 호소하겠다는 전략. 2015년 박 대통령의 말이 어느 때보다도 날 서 있었던 이유다.
물론 이러한 논리구조의 끝은 2016년 총선에 가닿는다. ‘진실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인물들로 국회를 물갈이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렇게 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국회법 파동 이후 박 대통령의 주요 발언을 다가오는 선거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다. 특히 이들 발언이 모두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레벨의 회의석상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대목이다.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이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2016년 총선까지 달라질 개연성이 극히 적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12월 14일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가운데)가 정의화 국회의장(오른쪽)을 찾아가 공직선거법과 경제활성화 법안 등을 직권상정해줄 것을 건의했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