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즈음 홍대 앞에선 시대의 우울과 허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음악들이 나왔다. 외환위기라는 현실과는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초 미국에서 날아와 홍대 앞에 이식된 그런지(Grunge)에 시적 재능이 있는 이들이 쓴 가사는 모두 달콤한 꿈에 취해 있던 90년대 중반 이미 공연장에 나타났다. 98년 인디 레이블이 하나 둘씩 등장하면서 공연과 함께 흩어지던 음악들이 음반이 돼 세상에 나왔을 뿐이니까.
이장혁은 그 대표적인 뮤지션이었다. 아무밴드로 활동하던 시절 대표곡인 ‘사막의 왕’은 질주나 반항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절망하고 좌절하는 청춘 그 자체의 노래였다.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받은 이 앨범을 끝으로 아무밴드는 해체됐다. 한동안 이장혁을 볼 수 없었다.
세상이 다시 꿈을 꾸던 2004년, 그는 자신의 첫 솔로앨범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음악만큼이나 조용한 복귀였다. 밴드 시절보다 더욱 처연하고 아름다운 우울로 가득 찬 음악이었다. ‘난 아직 고갤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 했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어/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의 수상한 질서 (중략) 밖으로 밖으로 눈부신 태양이 뜨고/ 안으로 안으로 날 비추던 그 햇살/ 밖으론 밖으론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안으론 안으론 하지만 난 울고 있었어.’
앨범의 첫 트랙이자 대표곡인 ‘스무살’의 가사다. 분노조차 남지 않은 허망함, 보통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 행복의 절정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불안함 같은 정서가 가득했다. 누군가에게 이 음악은 아무 거울에도 비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거울이었다. 역시 상업적으론 큰 의미가 없었지만, 당시 발표된 음반 가운데 지금까지도 전곡을 들을 수 있는 앨범은 이장혁의 1집뿐이다. 여전히 짠하다.
2008년 발표한 2집은 허무를 넘어선 체념의 정서가 가득했다. 다시, 꿈이 끝난 시대였다. 그들에게 이장혁은 노래했다. ‘그대여 아파 말아요 세상은 항상 그랬죠/ 뒤돌아볼 것 없어요 어차피 없어질 풍경’(‘백치들’). 전기 기타가 아닌, 어쿠스틱 기타 선율에 얹히는 읊조림이 그리는 세상은 황무지의 쓸쓸한 풀 같았다.
이장혁의 새 앨범(사진)이 나왔다. 6년 만이다. 그 세월 동안 한 곡 두 곡씩 만들고 공연을 통해 불렀던 노래들이 공연에서는 들을 수 없던 밴드 사운드로 세상에 나왔다. 첫 곡 ‘칼집’부터 ‘낮달’까지 총 12곡, 어느 곡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가사는 귀를 거쳐 심장에 새겨지고, 멜로디는 더욱 섬세해졌다. 본질적 고독을 품에 안은 목소리는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 밝음이 거세된 정서를 비춘다. ‘에스키모’ ‘불면’ ‘빈집’ ‘레테’로 이어지는 초반 흐름은 한 권의 시집을 귀로 읽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여전히 우울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음악이지만, 구질구질하거나 초라하지 않다. 극복과 회피 대상이 아닌, 소년부터 노인까지 담고 사는, 쉽사리 내뱉을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우울을 건조하고 따스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한 존재라는 명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 안을 때 이런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주변의 음악 동료들과 함께 한 편곡은 그의 음악을 소묘에서 유화로 변화하게 했다. 이 고독의 연대는 그래서 힘차게 걷는다. 험한 길을 더듬듯. 감춰둔 울음을 몰래 울면서. 이장혁의 음악은 그렇게 이 가을에 동기화된다. 단풍과 낙엽 사이 어디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