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 <b>김재식</b>은 1939년 출생, 백제미술대전 동상,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3회 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화 부문 심사위원 역임.
평생 단 5번만 전시회를 했다는 노화가 소강(素江) 김재식(73). 그중 초대전시회가 4번이니 자비로 연 개인전은 1번뿐이다. 그가 스스로 ‘원초적 재야’임을 먼저 알리는 데는 까닭이 있다. 일평생 전시 몇 번 못한 화가임에도 남종화의 대가로 알려지고, 살아오며 매달아본 ‘가방끈’은 초등학교 끈이 유일해 젊어서는 쟁쟁한 학벌만 알아주는 ‘넘사벽’ 화단의 경계 속에서 그림에만 매진하다가 초로에 접어들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에 거듭 초청받은 이력 때문이다. 전남 진도군 임해면 명슬리가 고향인 ‘촌놈’ 김재식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4세 때 난생처음 큰 상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교육부장관상 정도를 받은 셈이네. 초등학생이 일반부에 출품해 최우수상을 받았지라.”
수상 이후 소년의 하늘은 달라졌다. 종이 걱정도 끊었다. 얼굴 모를 여학생들이 책상 서랍에 켄트지 스케치북을 놓고 가곤 했으니…이제와 돌아보니 인생의 봄날이었다.
“여북하면 한겨울에 맨발로 십 리 길을 걸어 학교에 갔겄어요. 배우고는 싶고, 형편은 찢어지고…. 공부하고 먹고 살라꼬 어린 나가 하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위로 형들은 서울로, 군대로 가고 아시(동생)들까지 내가 먹여 살렸거등. 내 밑이 쌍둥이 동생인데 갸들을 서울 오기 전꺼정 17년을 델꼬 있었소.”
진도에는 하늘이 없었다. 상경했다. “‘할 도리’에 대한 책임감을 28세에 비로소 털었다”고 했다. ‘호연지기’ 품고 떠나왔으나 서울 하늘에서 무지개는 늘 저편에 있었다. 다시 ‘생존’에 매달려야 했다.
“소망이 다 한군데서 이루어진 셈이네. 어릴 때부터 책이란 책은 안 본 책이 없어요.”
1968년이다. 서울 만리동 진영정판사에서 만화를 그리고 편집을 했다. 먹물 갈아 마루펜으로 켄트지에 그림을 ‘마음껏 그렸다’. 당시에도 만화 역사시리즈물과 만화위인전이 인기였다. 몇십 명의 위인을 그리고 역사인물을 다듬었는지 모르겠다. 소년 김재식을 그림의 세계로 인도한 초등학교 스승이 출판사로 찾아왔다. ‘소문 듣고 물어물어 먼 길 온’ 스승은 장전 하남호 화백이었다. 스승의 매운 질책에 “참 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스승의 ‘매’ 이후 30여 년간 해남과 서울을 오가며 남종화에 매진했다. 스케치북을 들고 10차례 이상 우리 땅을 걸어 훑었다. ‘실경산수’는 그냥 그려지는 게 아니다. 그 순간, 하늘과 땅과 물이 ‘내 안’에 담겨야 온전한 실경이 손끝에서 나온다. 가솔의 생계를 위해 일하며 그림을 그렸기에 어느 쪽이든 “미친 듯 매달렸다”고 고백한다. 돈 되는 일은 다 했다. 그래도 먹고살기에 빠듯했다. 빈 지갑 인생, 스케치북 대신 비료포대를 접어 들고 다닌 스케치 십 수 년 전국 기행이 오늘의 그를 키운 셈이다.
그의 필법은 굵고 거침이 없다. 젊어서는 의제 허백련의 제자인 옥산 김옥진, 옥전 강진주 선생에게 의제 화풍을 익혔다. 스승들은 그만한 제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진경 실경산수화부터 사군자, 화조도, 인물화까지 넘나들었지만 고희 이후에는 실경산수화에 전념 중이다.
일생 다섯 번 째 전시인데 초대전 제의가 또 들어왔다. 두달 후인 7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회관에서 일정을 잡겠다는 이는 김정일 목사(철학박사)다. 우연히 들렀다는 관람객이 10호 풍경작품을 산다. 그가 그 자리에서 ‘대(竹)’를 한 장 더 쳐준다. 대가에게 대는 덤인가. 화가도 팬도 웃음이 환하다. 찰나, 선 굵은 붓질 딱 그만 선 곳에 ‘행운유수(行雲流水)’, 봄바람이 비낀다. 대 옆 여백이 곧 봄이다.